일연의 자취를 찾아서
이 글은 일연의 사상이나 삶 또는 삼국유사에 관한 글이 아닙니다. 일연의 삶과 관련이 있긴 하나 일연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유서 서린 사적들을 둘러보려는 피상적인 글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직접 기행하면서 일연의 삶의 향기를 직접 맡고 사진에 담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이 글 자체로던 다른 지면(이 블로그의)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물론 여행기에 불과하겠지만 말입니다. 일연이나 삼국유사에 대한 내용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 글은 참조할 만한 글이 아님을 미리 밝혀둡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1206년에 1289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206년은 칭기즈 칸이 몽고를 통일한 해로써 몽고의 침입은 실제로 일연의 삶에 있어서 떼어 놓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삼국유사』를 집필한 동기 자체도 기실 몽고의 고려 침략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목적은 무엇이며, 그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삼국유사』「기이」편의 맨 처음에 있는 ‘서왈(敍曰)’에 명쾌하게 나타나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자주 의식의 소산이다. 일연은 그당시 고려 전기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사회가 지나친 사대주의로 일관해 중국 문화의 주변 혹은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의식을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고려가 떠받들던 중국 송나라가 망하고 중국인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몽골족이 새롭게 원나라를 세운 사실은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실상 일연의 삶은 몽골의 침략에 따른 내정 간섭과 상당히 관련된다. 그러나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민족 자주적 입장에 서서 우리나라가 중국에 버금갈 만한 유구한 역사 민족임을 드러내려 하였다.“ (삼국유사, p.12. 일연지음, 김원중 옮김, 을유문화사)
이제 일연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사적들을 돌아봅시다. 일연이 태어난 곳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으로 당시에는 압량이라 불렸습니다. 일연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는 밝은 해가 집으로 들어와 사흘 동안 배를 비추는 태몽을 꾸었다고 합니다. 일연의 성은 김씨였고 이름은 견명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일직 여윈 일연은 9살 되던 1214년에 어머니와 함께 압량(지금의 경산)에서 전라도 광주 무량사로 갔습니다. 무량사로 간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연의 행장을 기록한 비문에 무량사에 취학(就學)했다는 구절이 있고 또한 승려가 된 것은 14살 때이기 때문에 승려가 되기 위해 무량사를 찾은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14살이 되던 해인 1219년에 무량사를 떠나 설악산 자락에 있는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 에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진전사는 당나라에 유학했던 도의선사가 선종을 전파하기 위해 세웠는데(821년) 당시 신라의 지도층에서 교종만을 인정하는 있던 터라 경주가 아니라 설악산 자락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선종은 도의선사의 제자 염거화상을 거쳐 보조선사 체징(804-880년)에 이르러 신라 지배층의 인정을 받게 되는데 이후 신라에는 산을 중심으로 9개의 선종 분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또는 구산문(九山門)이라고 합니다. 보조선사가 세운 가지산의 보림사 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본산입니다.
일연이 광주 무량사에서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까지 가서 구족계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광주 무량사 근처에 가지산문의 본산인 장흥 보림사가 있어서 가지산문의 정신적인 지주인 진전사를 선택했다고 보여 집니다. 진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된 일연은 가시산문의 승려가 되어 시간을 거슬러 도의선사에게로 이른 셈입니다.
이미지 출처:http://www.seelotus.com/gojeon
일연이 스물 살이 되던 해에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선불장을 치룹니다. 선불장은 교종과 선종으로 나뉘어 치러졌는데 선종은 개성의 광명사에서 치러졌습니다. 일연은 선불장에서 1등으로 합격하는 영예를 누립니다. 불교를 숭상하던 고려 사회에서 이것은 대단한 명예이기도 합니다.
선불장에서 합격한 후 일연은 경상북도 달성의 비슬산(당시에는 포산)으로 향합니다. 비슬산은 일연의 고향인 압량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습니다. 승려가 되어 속세를 떠난 일연이 고향은 찾지 못하고 근처의 비슬산을 찾지 않았을까 추측됩니다. 일연은 비슬산에서 3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냅니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비슬산 보당암에 거처를 잡았으나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고 전해집니다. 이것은 몽고의 침략과 연관이 있습니다. 몽고의 침략은 1230년에 이후부터 본격화되는데 경주의 황룡사 구층목탑이 불타 사라진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일연은 몽고군을 피하기 위해 문수보살에게 지혜를 구합니다. 기도가 통했던지 문수보살이 벽 사이에서 나타나 일연이 가야 할 곳이 무주(無住)라고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일연은 무주가 어디인지 몰랐으나 다음해 여름에야 비로소 묘문암의 북쪽에 있는 절이 무주라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일연은 바로 묘문암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이 묘문암에서 일연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1236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선사가 되어 비슬산을 내려옵니다.
일연은 비슬산에서 내려와 경남 남해의 정림사 주지가 됩니다. 정림사는 장안이 자신의 집을 절로 만든 곳입니다. 비슬산을 내려와 일연이 정림사 주지가 된 것은 팔만대장경 간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정안은 몽고에 의해 불타버린 황룡사 구층목탑과 부인사의 대장경을 보면서 팔만대장경 간행을 통해 민심을 모으고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팔만대장경은 강화도에 있는 대장도감과 선원사에서 간행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팔만대장경이 대장도감이 아닌 분사도감에서 간행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분사도감 가운데 그 이름이 전해지는 곳은 남해뿐이라고 합니다. 이 남해에 바로 정안이 세운 정림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 정암사의 주지가 바로 일연이었습니다. 일연은 1256년 정림사를 떠나 길상암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1261년에 일연은 왕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갑니다. 무신정권이 무너지면서 원종은 불교계를 쇄신하면서 일연을 강화도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때 일연은 대선사였습니다. 강화도에서 일연의 행적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단지 강화도에서 일연은 여러 차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일연은 3년 후에 강화도를 떠나 포항 부근의 오어사 (吾魚寺)의 주지가 됩니다. 1264년 일연은 경북 청도에 있는 인흥사로 갑니다. 이 인흥사는 이전에 일연이 머물던 비슬산에 있는 절로 일연의 감회가 남달랐을 것입니다. 비슬산에 머무는 동안 1268년 운해사에서 팔만대장경 간행을 축하하는 대장낙성회에 참석합니다. 1274년 충렬왕이 왕위에 오르고 인흥사에 사액을 내립니다. 인흥사에서 일연이 한 가장 큰 일은 『역대연표』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역대연표』의 일부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1277년 일연은 왕의 명령으로 인근에 있는 운문사로 옮깁니다. 이때 일연의 나이가 고희가 지난 72살입니다.
1281년 일본 원정을 위해 출항하는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과 함께 경주에 머물던 충렬왕은 일연을 경주의 행재소로 일연을 불러 개경으로 함께 가자고 합니다. 일연은 왕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개경으로 올라가 광명사에 머뭅니다. 그리고 국사에 책봉됩니다. 일연의 나이 78살 때입니다.
그러나 일연은 70년을 떠나있던 늙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충렬왕으로부터 떠납니다. 이때 일연의 어머니의 나이는 95세였습니다. 일연이 광명사를 떠나 거처로 정한 곳은 운문사라고 추측됩니다. 비문에 기록되어 있는 구산(舊山)은 일연이 떠났던 안흥사가 있는 비슬산이라 짐작되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른 뒤 일연은 운문사를 떠나 인근의 인각사로 갑니다. 이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언제부터 삼국유사를 시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인각사에서 완성한 것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1289년 84세가 되던 해에 일연은 다시 인각사를 떠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멀고 도 먼 입적의 길입니다. 그 해 7월 7일 칠석날입니다.
“『삼국유사』 에는 일연의 긴 발자취가 담겨 있다. 최남선은 일연의 『삼국유사』집필을 ‘일한사(一閒事)’라고 하였다. 하지만 『삼국유사』는 일연이 늘그막의 한가로움을 이기기 위해 쓴 책이 아니다. 일연은 삶의 황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삼국유사』를 마무리했다. 어쩌면 당시의 사람들은 『삼국유사』의 저술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연의 비에 『삼국유사』가 빠져있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삼국유사』의 가치는 커졌다. 만약 『삼국유사』가 전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고대 세계로 가는 거대한 문 앞에서 막막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했을 테니까. 『삼국유사』는 고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다.“(우리 고대로 가는 길, p.50. 이경덕, 아이세움)
참고도서: 1.삼국유사,일연,김원중 옮김
2.우리 고대로 가는 길, 이경덕, 아이세움
[이 글은 전적으로 책 2의 내용과 흐름에 의존하였음을 밝힙니다]
인터넷 검색 과정에서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 서울디지털 대학교 김대식 교수가 49회에 걸쳐 『현장에서 읽는 삼국유사』를 연재하시고 재개를 약속하면서 잠시 중단하고 있는 것을 알 수있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전문적인 답사 기행이 아니라 단순한 큰 인물 일연의 삶의 체취가 베여있는 유적지들을 가볍게 둘러 보고 일연의 삶의 향을 맛고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따라서 위의 글은 일종의 여행의 순서도 나 유적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많은 전문적인 기행기가 답사가 있어 공유할 수 있는 가치는 그다지 없으리라고 봅니다. 김대식 교수의 『현장에서 읽는 삼국유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정독의 가치가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듭니다. 아래 글은 김대식 교수의 연재를 마치면서 쓴 글입니다.
나는 지난 10년 여 동안 혼자서 『삼국유사』를 읽고 그 현장을 찾아보는 일종의 순례를 해오면서, 말하자면 순례기를 써 왔다. 지난 3년 동안 이곳 <프레시안>을 통해서 발표된 것은 그 순례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중간 점검 삼아 그 순례를 잠시 쉬면서 순례기 또한 잠시 쉬고자 한다.
『삼국유사』에 관해서는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책 한 권이 "조선 상대를 혼자 담당하는 문헌"이라든가,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靈感)의 원천"이라든가 하는 선학들의 평가가 있고 보면 『삼국유사』는 참으로, 차근차근 음미하며 두고두고 캐내어야 할 보배로운 고전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로서는 『삼국유사』를 읽는다든가, 그 현장을 찾는 일은 그만둘 수 없는, 일상의 작업이 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가 될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다시 『삼국유사』의 현장에 대한 순례가 재개될 것이다. 그때 다시 뵙게 되기를 희망한다. 지금까지 『현장에서 읽는 삼국유사』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대식/서울디지털대 교수 (inkyu@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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