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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24 18:29

[꽁트] 몰입은 너의 운명



 



몰입은 너의 운명


난 지금 굉장히 심각하다. 이렇게 심각한 적이 별 없었다. 초등학교 2학년때 “내게 왜 엄마가 없냐” 는 질문에 할머니가 “너를 낳다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참 심각했었다. 할머니는 너무 솔직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냥 ‘죽어다‘ 라는 표현보다는 좀 더 인간적이긴 하지만 나를 너무 사실적으로 개입시킨 것은 너무 비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할머니의 판단으로는 별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이었겠으나 나에게는 크나큰 슬픔이었고 절망이었다.   


그리고 아빠가 중 2때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난 또다시 참으로 심각했었다. 나에게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아빠의 죽음을 통해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내게 아빠가 있었다니! 한 밤중에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외할머니는 아빠의 존재를 확인했다. 길바닥에서 얼어 죽은 아빠! 엄마가 죽기 전에 이미 내게서 죽음보다도 더 하얗게 지어져 버린 아빠의 존재. 그렇게 아빠의 죽음으로 아빠의 존재를 알았던 것이다.


엄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세상을 떠났고, 아빠는 당신의 죽음으로 내게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세상에 죽음과 삶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동전의 양면처럼 잇닿아 있다는 생각을 그 어린 시절부터 했던 것이다.


외할머니와 외삼촌과 함께 살아온 지 이제 4년, 내게 또 다른 위기가 찾아 들었다. 연세가 많이 드신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어렵다. 외삼촌을 부양하기에도 힘이 드신다. 외삼촌이 머리가 비상해서 경제적인 부담보다는 도움을 많이 주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할머니의 삶은 고달프시다. 당신은 손녀 용돈이라도 쥐어주려고 봄이면 시장통 구석진 한 모퉁이에 앉아 상추를 팔곤 하시고, 여름이면 바닷가에서  환경정화 활동으로 젊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버린 오물이나 휴지를 처리하거나 주우시고, 가을에는  각종 스티커나 광고물들을 나누어 주신다. 추운 한겨울도 예외는 아니다. 연말연시 대목을 맞은 식당에서 청소도 하고 주방에서 일당으로 일을 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위기가 할머니 때문은 아니다.


외삼촌은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라고 이미 말했다. 과외 한 번 시킨 적도 없고, 좋은 책 한 번 사준 적이 없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혼자서 척척 잘해서 외할머니가 입에 댄 적이 단 한번 도 없다고 하셨다. 지금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교수 생활을 하고 있다. 나도 외삼촌 같은 사람이 되어 외할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의 위기가 또한 외삼촌 때문은 아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의 위기는 영어 때문이다.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해 그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나는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당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에 몰입해야 하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알지도 못하는 영어의 웅웅거림에 스스로 최면상태처럼 몰입해야 한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고역이 아닐 수 있겠는가? 내게 들리는 것이라곤 한국의 지명이나 인물의 이름들, 그리고 숫자들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사실  남들에게는 대수로운 일이 아닐지 모르지만 나는 정말 심각하다. 나는 국문학자나 사학자가 되는 것이 장래의 꿈이다. 국문학자가 되기 위해 영어권 대학으로 유학갈 일이 있을까? 나는 또한 학자가 아니라면 멋진 한정식 식당 주인이 되고 싶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영어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내가 생활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두 가지의 상반되는 경우가 나를 심각한 딜레마로 빠지게 한다. 어쩌면 아이러니인지도 모르겠다. 영어 몰입에 몰 자도 모르고 살아오신 외할머니를 보면 영어는 필요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할머니는 “앞으로 니가 이 할미처럼 고생 안할라믄 영어는 꼭 유창하게 해야 하닌기라, 알겠나! 니 외삼촌을 바라, 영어 잘하니까 유학도 가고 얼매나 좋아.” 하고 마치 영어의 필요성을 간절하게 느끼시고 있는 것처럼 강조를 하신다. 언젠가는 영어 몰입교육이 무엇인지를 교회에서 듣고 오셨다고 하시면서 “몰입 거, 좋은 거라더라! 니는 영어에 몰입해서 영어 그거 콱 아작을 내비리야 하는 기라. 알겠나! 한국말은 몰라도 영어는 유창하게 해야 되는 기라, 알겠나!” 나는 할머니께서 살아오신 삶을 되돌아보면서 할머니가 몰입되어온 신산스러운 삶이 나를 영어 몰입으로 내 모는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당신께서는 어려운 삶을 살아오셨지만 내게 만은 그런 삶을 물려주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리라.


할머니와는 달리 국비 유학을 떠나 작년에 영국 옥스포드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빋고 교수생활을 시작한 외삼촌은 영어 몰입 교육에 조소를 보내기만 한다. 삼촌의 빈 방 책꽂이에 꼽혀있는 영문 원서들하며, 논문 자료들, 각종 서류들을 보면, 또한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것을 보면 외삼촌은 영어 몰입식 교육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외삼촌은 영어 몰입식 교육에 조소를 보내면서 “모든 국민들이 영어를 다 유창하게 할 필요가 어디에 있냐? 할머니를 봐라, 할머니가 영어가 필요하냐? 영어가 없이도 잘 살아 오지 않으셨냐? 삶에는 영어보다 더 필요한 가치들이 너무나도 많은 데 모든 사람들을 영어에 몰입시킬 필요가 어디에 있겠냐. 심지어 영어 공용어를 주장하는 분들도 있더라. 가슴 아픈 건 내가 존경하시는 분이 영어 공용어를 주장하시는 거야. 몰입도 안되고 영어 공용어도 안되는 거야. 영어 때문에 좀 불편은 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말이야,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기독교인으로 전도하려는 생각과 같은 거야, 알겠냐.” 외삼촌의 편지를 읽고 있노라면 외삼촌이 영국에서 보내 온 편지가 맞는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할머니와 외삼촌의 영어 몰입에 대한 상반된 생각 사이에서 혼란스럽다기보다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그 상반된 생각들이 할머니와 외삼촌사이에서 뒤바껴 주장된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다. 즉, 할머니야 말로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해 영어 없이도 다 살아가는데 뭐 필요한가하고 비판을 했어야 하고, 외삼촌이야 말로 외국물 먹은 경험으로 봐서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반대였던 것이다.


사실 나는 몰입식이니 비몰입식이니에 관심이 없었다. 나라에서 한다면 할 수 밖에 없고 뭐 별수 있나 하는 식의 체제와 정책에 순종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런데 자꾸만 주위에서, 특히 할머니와 외삼촌의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한 상반된 생각에 몰입에 가까운 강요를 당하면서 그것의 타당성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호기심은 무학의 할머니에서부터 최고지식층이랄 수 있는 외삼촌에 이르기까지 커지면서 다양한 의견으로 폭발하고 있는 것이기에 이제 나 자신도 국가와 민족을 떠나 나 자신을 위해 과연 영어 몰입식 교육이 필수적인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자 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영어를 배우신 적이 없다. 영어와는 상관없는 삶을 살아오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영어 몰입식 교육을 찬성하신다. 이러한 할머니의 태도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자신은 영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몰입식 교육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을까?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을 손자에게는 시켜보겠다는 그 한의 읊조림일까?


또 외삼촌은 어떤가? 외삼촌은 누구보다도 영어가 필요한 사람이다. 영어가 외삼촌의 삶의 근거마저도 지탱하는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외삼촌은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해 비판하고 심지어 조소를 보내기까지 한다. 삼촌의 그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깊이 안자의 깊이 있는 통찰의 결과일까?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충분히 들었다. 그렇다면 영어 몰입교육이 외국에 여행 몇 번 하면서 영어가 필요하더라, 의사소통이 필요하더라는 피상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일까? 오렌지가 아니라 오뤤지로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몰입식 교육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할머니와 외삼촌의 상반된 주장은 우습기까지 하다. 영어가 절실히 필요한 외삼촌은 몰입이라는 단어에 조차 알레르기와 스트레스를 보이고, 영어가 전혀 불필요한 외할머니는 몰입이라는 단어 하나가 벌써 나의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듯이 찬사를 보내시니 말이다.


나는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생각을 블렌딩하기로 했다. 그리고 쉐이킹하고 스티어링해서 내어 놓기로 했다.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 체 당신의 삶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영어를 죽어라고 하라는 것이다. 할머니에겐 놀랍도록 영어가 도구화 되어 있는 것이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너무나 순박한 생각을 하고 계신거다. 즉, 할머니는 영어의 가치를 너무 일방적이고 맹목적으로 성공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삼촌은 달랐다. 비록 나의 생각 속에 할머니의 생각과 외삼촌의 생각을 뒤섞여 놓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외삼촌의 생각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영어에 대해 왜? 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던지는 것이다. ‘내게 영어는 무엇인가?’ ‘나는 왜 영어를 배우는가?’       삼촌에게도 영어가 수단인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할머니와 다른 것은 영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목적인 경우에까지 영어를 수단화하고 도구화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영어가 필요 없는 할머니의 삶에서 영어는 그야말로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할머니처럼 삶에 대한 간절하고 절실한 의지를 보일 것. 그러나 맹목적이지는 말 것! 

외삼촌처럼 삶의 목적에 따라 다양한 수단들을 생각해 볼 것. 영어가 정보화 세계화의 도구로 긍정적으로 작용하긴 하겠지만 인간의 삶은 정보화 세계화가 다가 아니라는 것! 실용화가 다가 아니라는 것!


그래서 나의 영어 몰입식 교육에 대한 가치 판단은 상대적이라는 것! 민족과 국가이전에 나의 외할머니와 외삼촌의 생각이 나의 생각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 몰입을 절대적인 가치처럼 주장하는 인간들과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중이 절을 떠날 수 없는 상황에서 몰입을 강요하더라도 몰입하지 않을 것임!

그러나 나는 내 수동적인 독백에 불만스러워 이렇게 덧붙인다
몰입은 그저 니 운명이라고, 내 삶에 몰입을 강요하지 말라고!(*)

(2008.6.22.14:10)   



몰입과 관련있는 또 다른 꽁트: 몰입은 구원이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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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22:26

[꽁트] 영재를 위한 몰입식 교육법 특강






 

영재를 위한 몰입식 교육법 특강


나는 한 번도 글자와 숫자를 배운 적이 없었다. 2살 밖에 되지 않은 내가 글자와 숫자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글자 읽기는 물론이거니와 숫자 읽기는 아주 쉽게, 덧셈 뺄셈은 가뿐하게, 구구단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익힐 수 있었다.


하루는 아빠와 엄마 앞에서 신문 사설을 줄줄 읽고, 숫자를 읽고, 더하기 뺄셈을 하고, 구구단을 외었고, 그런 나를 지켜보던 아빠와 엄마는 입에 거품을 물고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2살이었으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영재의 탄생이라고 흥분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겐 아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을 뿐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도 평소 글자와 숫자 공부를 시키지 않은 자신들이 미안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아빠와 엄마처럼 숫자 공부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준 사람들도 이 세상에 없지 싶다. 그러니 지금 아빠와 엄마에게 말하건대 정말 고맙다는 말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내가 참으로 고맙다고. 과외를 시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좋은 학습지 한 권 제대로 사주지도 않았는데 숫자를 익히고 글을 익혔다는 것을. 경제적인 손익을 따져보더라도 그 엄청난 투자의 생략이야말로 그 만큼 가계부담을 줄이는데 기여했음에 고마움을 표했던 것이다.  


내게 최적의 학습 조건은 무엇보다도 아빠와 엄마의 자유방임에 가까울 정도의 개방적 태도였다. 내가 2살이 되던 그 해 겨울에 아빠와 엄마는 좋게 말하자면 냉전(冷戰)중이었다. 서로에게 무관심했고 그들 사이에 대화는 차단되었다. 그러니 그 냉기(冷氣)같은 침묵이야말로 우선 기본적인 학습조건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침묵과 학습효과와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모범적인 사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냉전은 나에게는 크나큰 배려였고 관심이었다는 것을 아직도 그들은 모르지 싶다.


다음으로 냉전의 기류를 사이에 두고 있던 아빠와 엄마의 참호를 오갈 수 있던 나는 그들이 언제나 중독처럼이나 똑같은 일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빠는 신문 읽기와 컴퓨터에 엄마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잡지에 열중해 있었다. 탁월한 반복 학습이 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참호에서는 물론이고 쉬리가 헤엄치며 노는 어항이 있는 거실과 해제된 무기들이 놓여있는 부엌을 포괄하는 공동경비구역(JSA)이나, 비무장지대에서 조용한 분위기의 휴식과 함께 무언가에 빠져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집중력은 물론이고 인내와 성실함 같은 덕목들도 함께 체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집중해서 어떤 일을 성취해낸다는 침묵의 교훈을 배웠던 것이다. 그랬기에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풍부한 학습 교재와 자료였다. 무엇보다도 아빠의 컴퓨터 시디에서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뽕짝의 가사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사를 듣고 감동적이고 살아있는 언어를 익혔는데 동시에 이것은 나를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조숙한 인간으로 변화시킨 이유들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 신물 나도록 들은 뽕짝의 가사 때문이었는지 멜로 드라마의 대사 때문인지 사랑의 상처나 이별의 아픔 같은 것을 일찍이 경험했던 것이다. 뽕짝 노래와 가사집(歌詞集)과 텔레비젼 드라마의 대사는 내가 글자를 익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엄마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표준말을 익힌 것은 엄마의 큰 배려였다는 것을 지금에야 느끼고 있다. 뽕짝과 드라마를 통해 글자를 듣고 외웠다면, 집의 곳곳에 흩어져있는 신문과 가사집과 잡지를 통해 듣고 외운 글자들을 복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영재적인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언어감각도 한 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후천적인 환경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글자는 그렇거니와 숫자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문 한 장으로 충분했다. 아빠가 즐겨 읽던 스포츠 신문을 통해 수많은 숫자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스포츠 신문에는 수많은 전화번호들이 벌레처럼 우글거렸는데 아마도 스포츠에 전화 통화 종목 - 이를테면 누가 빨리 전화를 걸고 내리나, 얼마나 빨리 말할 수 있나 하는 서부시대의 총잡이처럼 손과 입의 재빠름과 속사를 측정하는 종목-의 추가를 주장이라도 하는 듯 했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 전화번호들이 하필이면 스포츠 신문에 그토록 많아야 하는지는 4, 5년이 지나서 다시 호기심을 부추겼고 그 스포츠 신문을 사서 밤낮 없이 전화번호를 돌려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조숙함을 넘어 완숙함으로 변화했다고 할까.


그랬기에 내게 스포츠 신문의 영향은 지대했던 것이다. 숫자들의 기능적이고 산술적인 의미를 익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숫자들의 상징적이고 이면적인 의미와 함께 성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사족은 떼버리고, 숫자는 그렇게 쉽게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영재 교육법을 스스로 발견, 터득하여 실천했고 그런 나를 지켜보며 아빠와 엄마는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그 이듬해의 첫 달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이후 나의 삶의 크나 큰 부분에서 다시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었고 이제 <바부자모>, 즉 <바람났던 부모의 자녀들 모임>의 회원들인 여러분들 앞에서 <영재를 위한 몰입식 교육법 특강>이란 다소 늦어버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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