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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봅시다

정화의 배와 남해 대원정

by 컴속의 나 2009. 5. 4.



유럽의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 그리고 마젤란등의 이름에 익숙한 이들에게 명 성조의 환관으로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남해 대원정'를 이끌었던 정화(鄭和,Zhèng Hé 1371년~1434년)는 낯선 이름인지 모르겠다. 정화를 기억하는 이들도 콜롬버스나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처럼 위대한 항해가나 신대륙의 발견자 같은 별칭을 붙이는데 주저할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역시 역사란 그 결과를 중시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화가 아무리 27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동남아시아와 인도, 그리고 페르시아까지 항해했으며 심지어 그의 분견대는 아프리카의 케냐 말린디까지 항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가져다 준것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 가려져 버리고 만다.  


정화의 대원정 루트들: http://www.lcsd.gov.hk/ce/Museum/History/en/rteachingkits_route_zhenghe.php


만약 정화가 신대륙을 먼저 발견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 역사가 못내 안타깝다. 서구 문명의 식민주의에 점철된 동양의 역사이고 보면 더욱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 신대륙에 어느 정도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세력이 존재했더라면 서구의 식민주의와 대량의 학살과 문명 파괴, 그리고 착취가 존재했을까?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럴 개연성은 높다고 볼 수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남미의 원주민들에게 중국인들이 백인들에 비해서는 그다지 이질적이도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우선 정화의 함대와 콜럼버스와 바스코 다가마, 그리고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의 함대의 규모를 비교해 보면 정화의 함대가 얼마나 큰 규모 였던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정화의 함대는 27,000명 내외의 승무원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선박의 수도 60여척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콜럼버스의 함대는 3척의  배에 승무원이 120명(88명이라고도 함)에 불과했다. 바스코 다가마의 함대도 배 4척(3척 이라고도 함)에 170명이었다. 마젤란의 함대의 경우는 배 5척에 265명의 승무원이 전부였다.  이러한 규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화의 함대는 왜 세계를 제패하는 힘의 원천이 되지 못했을까?


정화의 배와 콜럼버스의 산타 마리아호의 비교. 정화의 배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Zheng_He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주제로 한 <1492년>이란 영화를 보면 콜럼버스는 대단한 모험가였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 의하면 이미 이 시기에 콜럼버스는 지동설을 믿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실제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1520~1530년경에 집필이 되는 데 이것은 종교적인 엄격함 때문에 늦추어진 것인지도 모르며,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은밀하게 지동설이 신봉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시기는 또한 지동설과 더불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종교개혁을 잉태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의 기운이 팽배하고 있을 즈음이다. 또한 과학적인 혁명이 싹트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영화 <1492년>에 의하면 콜럼버스가 기존의 종교적인 세계와 상당히 많은 마찰과 갈등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콜럼버스의 항해는 천문학, 합리적인 과학 지식,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가능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개인적인 모험 및 상업적인 이익이 큰 동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 당시 몽고 제국과의 교역을 통한 막대한 이익이 많은 대상들과 항구, 무역 도시의 팽창을 가져오고 있었다. 즉, 지구가 둥글다는 지동설에 대한 믿음과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한 상업적인 이익에 대한 기대가 유럽의 항해를 촉발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당시 원나라와 그 뒤를 이은 명나라의 중앙 통제적인 경직된 무역과는 달리 유럽은 개인이 중심이 되어 이익을 추구하는 과장되게 말해서 독점적 자본주의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이익 추구가 능동적이고 끈질기다는 측면에서 유럽의 여러 항해들의 성격을 규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flungingpictures/2045333854/


유럽과는 달리 중국 명나라 정화의 '남해 대원정' 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정화의 대원정은 정치적임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고 지동설과 같은 합리적인 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았다. 물론 개인적인 이익 추구라는 동기도 희박했다. 또한 몽골의 원나라를 이은 명나라는 원의 코스모폴리탄적인 개방성과는 달리 민간인들의 대외 무역을 금지하고 무역을 정부의 조공무역으로 제한시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항해에 치명적인 조치는 해금령이었다. 이 해금령이야 말로 동양과 서양의 무역을 급격하게 줄이며 중국을 페쇄의 대륙으로 이끌어 갔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에서 이루어진 정화의 대원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화의 배
http://www.flickr.com/photos/thevortext/66122999/



정화에 대한 정보 참조:http://ko.wikipedia.org/wiki/%EC%A0%95%ED%99%94_(%EB%AA%85)
                               http://en.wikipedia.org/wiki/Zheng_H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