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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역사(4) :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by 컴속의 나 2009. 1. 22.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음식의 역사(4) :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기원전 10,000를 전후한 신석기혁명과 함께 인간의 농경과 목축이 발전하고 농경지를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식량의 생산량은 급속하게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은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목축 또한 목초지를 고갈시키게 되어 농경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화전민이나 반 유목적인 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의 증가와 음식 요리법의 발달은 인구의 증가와 인간의 문명을 형성하는 계기 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초기의 수천 년은 발견과 확장 그리고 파괴의 기간이었다. 곡식의 새싹이 돋아나는 넓은 들판은 해충의 번식을 부추겼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들은 설치류를 급증시켰다. 농경은 단지 토양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데만 급급했고, 그 대가로 되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토지를 소모시키는 데는 2~3년 밖에 안 걸리지만 그 땅이 재상되는 데는 50년이나 걸린다. 신석기시대의 중심지역에서는 우선 대지의 나무와 잡목들을 다 베어버리고, 그 다음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키고, 또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게 했다. 그러자 대지는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으며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자꾸 줄어들었다. 신석기 혁명은 현대문명의 기초를 쌓았지만, 20세기의 인간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의 절박한 생태학적 문제들의 원인을 낳기도 했다.”(p.67)

농경이 최초로 발달한 중동의 경우 기원전 5000년 경, 현재의 페르시아 만 위쪽에 있는 쿠지스탄(Khuzistan)이라고 알려진 지역에서 제방을 터서 물을 공급하는 작은 수로 기술을 개발했다. 이 수로의 개발로 강의 양쪽 3마일에 걸친 토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개기술의 발달은 몇 가지의 결과를 낳았는데, 첫째로, 수확량의 증가, 둘째로 도시가 형성되고 수메르와 같은 문명을 탄생하는 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중동의 사막화를 초래한 사막화를 불어왔다. 관개에 의존하여 형성된 국가들은 국경을 넘어서 새로운 토지를 찾아야 했으며 이것은 제국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신석기 혁명들의 결과들이 기원전 5000년경에 중동으로부터 수에즈의 지협을 건너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밀과 보리가 잘 자란 덕택에 단지 몇 세기 동안 인구가 100배 이상 증가했다.” (p.72)기원전 3000년경에 이집트의 농부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량보다 3배나 많은 식량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은 홍수를 통제하는 사업, 대규모 공공건축사업, 피라미드 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메리카의 경우는, 혁명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7,000~9,000년에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산맥의 둥굴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채집과 더불어 작물들을 배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테우아카 계곡에서 옥수수를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보다도 신석기 혁명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선사시대 아시아의 음식에 관한 정보의 결여는 인도와 중국의 경우에 특히 불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인더스강과 황하유역의 위대한 문명들이 역사의 무대에 돌연히 그리고 장엄하게 등장했는데, 이들은 선례가 없을 만큼 충분히 발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식습관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p.75)

특히 기원전 3,000 ~ 기원후 1,000년에 걸쳐 중동, 이집트, 중국, 유럽의 문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수메르와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에 장거리 무역을 시작했다. 2000년 후 그리스도 식량 공급을 위해 페니키아인들을 앞세워 지중해의 대부분의 국가와 무역을 해야만 했다. “로마 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수세기 동안 밀의 공급이 행정, 경제에, 국제적 정책을 수립하는 데 지배적 역할을 했다. 로마 제국의 대부분 국경지방은 고대 세계의 밀 재배지역들의 경계와 거의 일렬로 접해 있다.“(p.83)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고 인간의 문명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국가와 국가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식량의 무역과 함께 팽창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후 수세기의 발전을 서술함에 있어 세계의 지역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중세 이전의 아시아와 아랍을 거친 후 이 책이 도달하는 시대는 1,000 ~ 1,500경의 중세 유럽이다. 이후 세계의 확장편(1,500 ~ 1,800)에서 다시 아메리카, 인도, 중국이 등장하지만 유럽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팽창을 이 책의 행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암시받고 추측하고 해석할 수 있으나 좀 더 꼼꼼하고 확신적인 정리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음식과 관련된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의 기술은 중세 유럽에서 발전한 농업 혁명 이후 급속하게 증가한 인구와 도시의 팽창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6세기 북동부 지역에서 시작한 중세의 농업 혁명은 식량의 공급를 획기적으로 증가시켰고, 이 결과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또한 “새로운 농업 체계는 간접적으로도 마을과 도시의 부활에 기여했다. 이전에 토지를 경작하던 농부들은 자신의 다리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가축 이외에 다른 운송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귀리가 새로운 윤작 시스템에서 중요한 작물이 된 것은 말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된 부분적인 이유가 되었다. 말은 농사일이나 짐을 나르는 일 외에도 유용한 교통수단 역할을 했다. ...... 이제는 말을 들에서 떼어 놓을 수 있을 때면 언제든지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p.225)

이렇게 기동력이 원활해지면서 시장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장의 규모도 대규모화 되었다. “한 도시의 번영은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도 및 폭력조직의 협박에 대항하여 노점상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중한 경계를 취해야 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와 유사한 ‘시장 평화’ 가 확립되었는데, 이 새로운 기독교 세계에서는 시장에 세워진 십자가에 의해 상징화되었다.”(p.235) 시장의 확대는 도시 자체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나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들이 형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