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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1 17:56

스키와 키스의 유사점은?


위키피디아

http://kr.news.yahoo.com/servi


*스키와 키스의 유사점은?

1.스키는 두 발로 타고 키스는 두 입술로 한다.

2.스키와 키스는 할 수록 실력이 는다.
3.스키와 키스는 마찰계수가 작아야 한다.
4.스키와 키스는 둘 다 짜릿하고 시원하다.
5.스키와 키스는 때론 모험이 될 수 있다.
6.스키와 키스는 둘 다 끝나고 나면 더 하고 싶다.
7.스키와 키는 둘 다 약간은 촉촉해야 한다.
8.스키와 키스는 둘 다 몸과 머리를 틀어야 효율적이다.
9.스키와 키스는 둘 다 스틱과 혀라는 보조 도구가 필요하다.
10.스키와 키스는 둘 다 삶의 활력을 샘솟게 한다. 

*스키와 키스의 차이점은?(클릭)

주의: 스키 타는 법으로  키스 하거나 키스 하는 법으로 스키는 타지 말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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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1 02:25

목욕탕의 추억(2)




이미지의 출처는 http://kr.news.yahoo.com/servi

터키목욕탕(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vsv12






목욕탕의 추억(2)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목욕탕 가는 것이 두려웠던 때가 있었다. 그 두려움은 뜨거운 물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피가 나도록 까칠한 때밀이 타월로 등껍질이 벗겨지도록 박박 문질러대던 시력 나쁜 엄마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라거나, 욕탕에서 물속으로 머리를 강제로 밀어 넣곤 하던 삼촌의 잔인성에 대한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목욕탕 자체에 대한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아버지가 하던 작은 떡집이 망하고 말았다. 사업이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보증을 잘못 선 탓이지만, 그 이전부터 아버지의 가게는 내리막길이었다. 떡에서 쥐꼬리가 나왔을 때만 해도 동네 사람들은 이해해주었다. 그러나 두 달 뒤 바퀴 벌레가 한 마리도 아니고 무려 세 마리가 나오자 동네 사람들은 발길을 다 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빚보증까지 뒤집어쓰고 만 것이다.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한 동안 나앉아 있어야만 했다. 나는 바퀴 발레가 한 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어디 한적한 시골 마을의 외양간에라도 정착할 수 있을 만 한 돈을 구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셨다. 아빠의 그런 노력으로 길바닥에서의 생활을 그나마 일찍 끝낼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여름이었기에 비록 짧은 기간이라도 견딜 수가 있었다.

이사를 간 곳은 북쪽으로는 폐광이 있고 남쪽으로는 6.25때 미군의 오폭으로 마을 주민들이 몰살되어 이제는 지명조차 사라진 곳으로 대규모 개사육장이 있었다. 동으로는 높은 산들로 막혀있고 서로는 큰 사과 과수원이었다. 나는 사과 과수원이 있는 마을 학교로 매일 아침 30분을 걸어 다녔다. 그 곳에서 정착하고 아빠와 엄마와 누나는 개사육장과 과수원으로 일하러 나갔다. 아빠와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체 개 사육장에서 개밥과 오물을 처리하는 누나가 너무 안쓰러웠다. 그것이 생계를 위한 수단 전부였다. 물론 계절에 따라 약간 달라지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사는 마을은 집이라고는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서로 외떨어진 10호의 초가와 슬레이트집들이 전부였다. 작은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이런 곳에 공중목욕탕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물이 귀한 작은 마을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이었다. 그 온천수 위에 지어진 목조의 목욕탕이었다.

그 때 목욕탕은 내게 지옥과도 같은 곳이었다. 이제는 그런 목욕탕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외관을 하고 있었다. 방금이라도 쓰러질 듯한 목조벽에 슬레이트 지붕이 덩그러니 놓여 진 단층 구조물이었다. 그 구조물을 정면에서 보면 시골의 여느 재래식 화장실의 문짝처럼 사개가 맞지 않아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삐거덕, 삐거덕거리며 을씨년스런 소리를 내는 두 짝의 볼품없는 나무문이었다. 그 문에는 붉은 페인트로 각각 남, 녀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었다. 욕실 안에는 나무 바닥에 온천수가 퐁퐁 솟아나는 작은 샘이 있고 그 샘 주위의 편편한 돌 위에 두 개의 비누와 그 옆으로 목욕용 수세미 바가지가 몇 개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마을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이었다니! 그나마 공짜로 목욕을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목욕다운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그곳이 아니면 1시간을 걸어서 읍내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감수하지는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곳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산중의 음산한 폐가보다도 나에겐 더욱 무서웠다. 도대체 나는 그런 목욕탕을 한 번도 본적도 없거니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그곳에서 나는 혼자 목욕을 해야만 했다. 엄마는 저녁을 먹은 후 누나와 나를 거의 강제적으로 목욕탕으로 쫓아내곤 했다. 그것은 아빠 때문이었다.

처음 산골 마을에 정착을 하면서 아빠는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사과 농원에서 잡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빠는 술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방에서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술만 마셔대었다. 엄마와는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알콜 중독에 무능력해진 아빠와 생활력이 강했던 엄마 사이에 고요한 샘물이 솟아날 수는 없었다. 사나운 물살에 누나와 나는 휩쓸려가지 않으려고 매일 매일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아빠는 술 만 마시면 신세 한탄에 엄마와의 언쟁에 폭언에 폭행을 일삼았다. 그 해 겨울, 아빠는 삶을 포기한 것 같았다.

그렇게 엄마에게 떠밀려 밖으로 나가면 사방은 흰눈으로 덮여있었고 목욕탕 외에는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것이 불행이었다. 목욕하는 것도 싫었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목욕탕 그 자체가 정말 끔찍이도 싫었던 나로서는 너무나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목욕탕까지 흰 눈을 밟으며 누나와 함께 걸어가면서 나는 누나에게 같이 목욕하자고 졸라대기도 했다. 그러면 누나는 내가 사내답지 못하다고 타박했다. 나와는 9살 터울인 누나는 내게 언제나 부드럽게 대해주었지만 목욕을 함께 하자는 말에는 완고하게 거절했다. 또한 마을 주민이라고는 10여명이 전부다 보니 나는 혼자서 목욕을 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가끔 누군가가 먼저와 있으면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너무나 드물었다. 아무도 없는 음산한 욕실에서 혼자 목욕하는 어린 아이의 심정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목욕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목욕이 부수적인 활동이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몸에 물을 끼얹고, 머리를 감는 동안 오싹해지는 등짝을 몇 번이나 추슬러야 했는지 모른다.

바로 그런 곳, 나의 육신과 정신을 사납게 물어뜯던 그 음산한 공중목욕탕을 떠나는 것은 내 기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마침내 그토록 시달리던 공포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왔다. 2년 후 그 산골 마을을 떠나 한 작은 도시 변두리로 이사를 하였다. 정말 너무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허물어진 폐가 같던 공중목욕탕을 떠나게 되었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감당하기 어려운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슬픔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그 마을을 떠날 무렵 그 공중목욕탕은 전국에서 제일 큰 온천으로 변했고, 그 산골 마을은 한 순간에 벼락 부자촌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는 누울 수 있는 손바닥만한 작은 땅 한 평조차 없었다. 어쩌면 개발이 가져다온 더 커나 큰 불행이었는지 모른다. 더해, 아빠는 죽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변하는 산골 마을을 보면서 떠나야 했던 것이다. 그 산골 마을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온천파크가 될 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도대체 그들이 슬퍼해야 할 이유를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자식의 해방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들이 그저 못마땅할 뿐이었다. 오직 내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공중목욕탕을 떠나는 것이 그저 다행스럽기만 했다. 나는 정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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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30 16:02

음식의 역사 (8):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음식의 역사 (8) :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1.음식의 역사 개괄
2.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3.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4.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5.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7.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8.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9.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10.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1.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2.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3.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4.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5.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이 책의 3부에는 중세(AD1,000 ~ 1,500)가 시작하기 이전까지의 아시아와 아랍의 음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중국의 고대 음식의 역사는 서구의 그것에 비해 그 시대적인 구분이 훨씬 더 모호하고 요리법의 기원은 분명하게 규명되어 있지도 않다. “기원전 1천년기 이전의 문헌자료도 없으며, 금세기에 일어난 중국의 정치적 대변동은 최근까지도 과학적인 고고학을 심히 저해해왔다”(p.176) 이 책이 1973년에 초판이 나오고, 2002년에 재재판이 나온 걸로 보아 현재의 중국의 상황과는 다른 측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것임으로 책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자 하며, 이후 수정된 부분은 따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작가가 참고로 하고 있는 중국의 문헌자료 또한 상당히 제한적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최고의 문헌으로 기원전 1100~600년경의 전통민요를 중심으로 모아놓은 시가집인 『시경(詩經)』과 『도덕경(道德經)』 『논어(論語)』, 그리고 제의에 관한 지침서로 한나라 때 편찬된 『예기(禮記) 』가 거부 전부이다. 이것은 수천 년 음식역사에 대해 불충분한 서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인으로서 중국 음식역사에 대해 겸손하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 깊이도 얕지 않음에 감탄하게 된다.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란 질문에 대해서는 길기는 하나 질문에 대한 적확한 답이 되는 긴 문장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인용이 길지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중국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농사짓는 사람들이 봄에 전부 마을을 떠나 9월이나 10월경의 추수 때까지 들판의 임시적인 오두막에서 사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비록 필수품들 공급해 주는 몇몇 공동조직이 있긴 했어도 비교적 고립된 이 시기 동안 농부들은 제한된 물자에 의존해야 했다. 연료는 큰 문젯거리였다. 완전한 농업경제가 발전했을 때 황하유역의 들판에는 단지 제방에 의해 나누어진 논밭들만 쭉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여름에는 둑 위에 난 덤불과 관목들이 너무 싱싱하고 물기가 많아서 연료로는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며, 벌판의 일꾼들은 먼 곳에서 가져온 나무나 숯 또는 몇 마리 안 되는 견인용 동물들의 마른 똥에 의존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리 시간이 짧고 연료가 적게 드는 요리법인 팬을 흔들면서 센불로 재빨리 볶는 방법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 요리법에 의해 채소나 고기의 얇은 조각들, 거칠게 간 기장가루나 밀가루로 만든 부침개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요리되었을 것이다.” (pp.180 - 181)

*위 사진들의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ur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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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9 17:38

음식의 역사(7):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7.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헤로도토스는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을 “말등에 올라 탄 채 활과 화살을 가지고 능숙하게 싸우고, 음식은 농업이 아니라 소에 의존했다.” 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카스피 해와 북해 연안에서 가축들을 방목하면서 가축에서 얻는 육류나 유제품 외에도 다랑어와 철갑상어, 양파, 마늘, 콩을 먹었고, 사치품을 가지기 위해 고대 세계의 도시들과 교역을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들이 대체로 뚱뚱하고 유머감각이 있는 민족이라고 묘사했다.“(p.164) 이와는 달리 보다 동쪽 중국의 경계의 스텝지대에 거주하고 있던 유목민들은 ‘거칠고 정력적인‘ 사람들로 언제나 말을 탔기 때문에 O형 다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살던 유목민 부족들의 기질적인 차이와 자연적인 환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목축에 대한 필요성이나 식습관은 거의 동질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AD 1,000년경 유목민들은 말젖은 그들의 활동성에 결정적인 음식이 되었다. 이것은 채식의 부족에서 생기는 괴혈병을 예방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육류를 주식으로 하던 그들에게 단백질, 지방, 비타민A, B의 섭취는 충분하였지만 비타민 C의 섭취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젖을 섭취함으로서 비타민C의 결핍을 막을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말젖에는 비타민C 가 모유의 2배, 우유의 4배나 들어 있기 때문이다”(P.169)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목민들에게 채소의 부족으로 인한 비타민 C의 결핍은 말젖을 통해 충분히 공급되어 비타민 C의 결핍으로 생기는 괴혈병이 예방될 수 있었다.

참고: Kumis(발효시킨 암말의 젖으로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중요한 유제품이다). 몽고에서는 Airag로, 다른 지역에서는 Chigee 로 불리기도 한다.

 

사진출처:영문판 위키피디아Kumis

  

사진출처:영문판 위키피디아 몽고의 Air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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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23:36

대통령 오바마, 귀여운 금바마



열악한 조건에 금붕어들을 기르고 있는 모습을 노출하자니 죄송합니다만, 블로그의 포스트를 위해  기르던 금붕어들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을 계기로 검은 금붕어를 금바마로, 주황색 금붕어를 한국의 토속적인 냄새를 풍기는 호돌이로 지었습니다. 금바마와 호돌이 앞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좋은 관계를 맺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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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8 05:56

헐리우드의 유명인 불교도들





오늘날 티벳 불교는 티벳 고원, 네팔, 부탄, 몽고, 칼미키아(러시아 연방 자치 공화국으로 카스피해의 북서쪽에 위치해 있음), 시베리아, 그리고 티바(Tyva)에 걸쳐 신봉되고 있다. 또한 인도 지역인 시킴과 라다크에 티벳 불교 인구가 밀집해 있다. 현재 티벳 불교는 서구와 전세계적으로 신도의 수를 넓히고 있는데 미국과 유럽에서만 수만명의 신도들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헐리우드에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리처드 기어를 비롯해 샤론 스톤, 안젤리나 졸리, 스티븐 시걸 등 유명 연예인들이 티벳 불교 신도 또는 다른 방식으로 티벳 불교와 관계를 갖고 있다. 


스티븐 시걸(Steven Seagal)


영성주의(Spiritualism)와 불교는 스티븐 시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티벳 불교의 라마인 페놀 린포체(Penor Rinpoche)에 의해서 환생한 Tulku(Chungdrag Dorje)로 인정을 받았다.2006년 11월의 한 인터뷰에서 시걸은 " 나는 영성을 가진 치료사로 다르게 태어났다" 고 했다( "I was born very different, clairvoyant and a healer".)

Tulku(Chungdrag Dorje): 티베트 불교의 경전상, Tulku는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은(득도한) 불교 스승의 육적인 존재를 언급한다 (In the context of Tibetan Buddhism, tülku is used to refer to the corporeal existence of enlightened Buddhist masters in general.)



리처드 기어



리처드 기어는 감리교 신자인 부모에 의해 양육되었지만 1978년 브라질의 화가 실비아 마틴스(Sylvia Martins)와 네팔을 여행하면서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불교신자로 달라이 라마의 적극적인 지지자이도 하다. 기어는 또한 티벳의 인권에 대한 지속적인 옹호자이며 Tibet House의 공동 창시자이며, 기어 재단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리처드 기어는  the Tibetan Independence Movemen 단체를 열렬히 지지하기 때문에, 영국적으로 중국 입국이 금지되고 있다. 2007년 9월에는 티벳 독립을 위해 중국에 압력을 넣기 위해 2008 베이징 올립픽을 보이콧을 요구하기도 했다.   


Adam Yauch(아담 야츠)



유대인의 뿌리를 가지고 있지만 불교도이다. 프리티벳 운동(Free Tibet movement)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Jet Li(이연걸)


이연걸( 리롄제, Jet Li)은 티벳 불교 신도이다



Sharon Stone(샤론 스톤)


Sharon Stone(샤론 스톤)

  스톤은 동료 영화배우 리처드 기어로부터  달라이 라마를 소개받고 티벳 불교로 개종했다. 샤론 스톤은 중국인들이 그녀의 좋은 벗인 달라이 라마에게 우호적이지 않기 때문에  2008년도에 중국에서 일어난 쓰촨성 대지진이 악령(bad karma)의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Ginsberg(긴즈버그)

 Ginsberg는  뉴욕에서 택시 승객으로 우연히 Chögyam Trungpa Rinpoche( the Vajrayana schoold의 티벳 불교 명상 스승) 만나는데 Chögyam Trungpa 는 그의  친구이자 일생의 스승이 된다.




안젤리나 졸리

Angelina Jolie(안젤리나 졸리)

 이미지 출처: www.flickr.com  ElvisTR님

언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졸리가 불교도라고 하나, 그녀 자신은 불교가 그녀의 아들 Maddox(Maddox는 졸리가 2000년에 입양한 캄보디아 남아이다) 의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하기에 그에게 불교를 가르친다고 말했다. 졸리는 신을 믿는지의 여부를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다.  


 

Philip Glass(필립 글라스)

그는 자신을 , 유대교, 도교, 힌두교, 톨텍 숭배, 불교도인이라 표현하였다. 티벳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Jim Carrey(짐 캐리)


짐 캐리과 불교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그가 채식주의자이며 버마의 아웅산 수지 여사를 자신의 영웅으로 추앙하면서 버마의 정치적인 상황과 인권에 대해 관심을 보여왔다. 불교도의 여부나 관련성에 대해서는 추후 업그레이드를 통해 전달코자 한다. 




Goldie Hawn (골디 혼)


혼(Hawn)은 1972년에 동양철학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대교인으로 양육되었으나 지금은 불교신자이다. 그녀의 자녀들을 불교도와 유대교의 전통속에서 양육해왔다. 그녀는 래리 킹 쇼(Larry King Show )에서 유대인 불교도라고 말했다. 

 


*위 사진중 출처가 적혀있는 사진을 제외한 모든 사진들의 출처는 영문판 위키피디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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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20:57

음식의 역사(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대한 가단한 언급을 하고자 한다.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인류의 음식 문화에 대한 서구적인 편견 벗기‘ 라고 할 수 있다. 마빈 해리스에 따르면 서구 문화의 관점에서 특정한 인류의 음식문화를 야만적이라거나 이해 할 수 없는 ’수수께끼‘ 라고 단정 짓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다. 서구인의 눈에 비치는 그 야만성이나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는 사실 환경과 생태에 적응하려는 이해할 만한, 또한 설득력 있는 행동이나 생각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야만적이고 납득할 수 없듯이 보이는 음식문화는 서구적인 문화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일뿐 음식 문화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풀어야 할 이해 가능한 ‘수수께끼’ 임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레이 태너힐의 이 책<음식의 역사> 또한 마빈 해리스의 저작의 관점과 상당히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물론 마빈 해리스의 저작이 문화생태학적이고 문화유물론적 입장에서 인류의 음식문화를 인종과 민족, 그리고 생태학적 환경에 근거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면 레이 태너힐은 생태학, 사회학, 역사 전반을 아우르며 음식의 역사를 보다 개괄적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아무튼 그들에게 음식의 역사에 관해 관찰하는 태도에 대한 하나의 속담을 적용해 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는 속담이 아닐까 한다.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인도의 소 숭배는 참으로 기막히게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인도의 소를 아프리카로 보낼 수는 없다. 인도인에게 소는 신성한 숭배의 대상이지 굶주림을 채우는 식량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 이 말은 잘못되었다. 인도 내에서 소의 밀도살을 통한 식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의 상황처럼 굶주려 죽는 이들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말해준다. 오히려 소의 신성화가 소의 값을 상승시키지 않는 요인으로 작용하면서 빈자들에게 은밀하긴 하지만 싼 값으로 유통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아프리카인의 입장에서 인도인의 소 숭배는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 인도인들은 왜 소를 신성시 할까, 라는 질문 자체로 돌아가 보자.

힌두교에서는 소는 부, 건강, 풍요의 상징이다.

소고기를 먹는 이슬람교에 대항하는 반 이슬람 팜플렛



기원전 2,000년경에 아리아인들은 소를 몰고 인도로 들어왔다. “인도 토착민들은 유제품을 아주 열렬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소비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시기도 있었던 것 같다."(p.192). 아리아인들이 인도에 정착한 후 종교적 율법을 강화하면서 소를 도살하는 것보다, 소를 통해 유제품을 얻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아리아인의 종교적인 율법인 『리그베다(Rigveda)』에 따르면 양, 말, 염소, 물소 등은 음식물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는 예외적인 동물이었다. 또한 암탉의 계란처럼 소의 젖을 소 그 자체를 도살해 먹는 것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간다고 생각한 듯하다. 인도의 열대 기후에서 염소나 물소가 젖을 제공해 주기는 했지만 기름지고 독특한 냄새가 나는 녹색의 액체를 싫어했을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염소나 물소의 젖은 환영받지 못한다. 기원전 1,000년 인도의 또 다른 문헌인『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에는 고기를 먹는 행위를 조상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면서, 소를 먹는 것이 더욱 강력하게 금지되었다.

대개의 법이 그렇듯이 시대상의 변화와 함께 법의 적용이 사람들의 의식, 현실적인 삶과 괴리를 보이게 된다. 인도의 『리그베다(Rigveda)』나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기원전 700년경에 이르러 소 식육에 대한 금지는 현실적으로 사문화되면서 손님접대와 제사을 위해 가축 도살이 일반적으로 허용되었다. 브라만 사제들은 희생제의를 위해 지역사회에 더 많은 가축을 요구하게 되었다. 농업에 유용하게 이용되고 유제품의 공급원인 소들의 수가 줄어들자 반란까지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혼란은 불교와 자이나교의 위대한 지도자인 석가모니와 마하비라 등장의 사회적인 역사적인 출현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아리아인의 카스트 제도와 짐승도살에 반대하는 것을 그 교리로 삼았다. 석가모니는 살생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고, 자이나교는 야채, 과일에 들어있는 곤충을 엄격하게 가려내어서 먹었다. 이러한 채식주의적인 발상은 생태학적인 인식이나 단순한 종교상의 교리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배타적 계급 제도인 카스트와 제의적 희생에 대한 반대의 산물이었다.”(p.193) 이처럼 불교와 자이나교가 채식주의를 교의화하면서 소 도살은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이전의 소 살 금지에 대한 인식을 다시 일어나게 했다. 두 종교는 정통 베다신앙에도 영향을 미쳐 기원전 100년경에는 브라만 사제들이 동물 희생을 제의 포함하지 않는 규정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인도의 세 종교인 불교, 자이나교, 베다는 소를 신성시하게 되었다.

*위의 사진들은  영문판 위키피디아 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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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5 12:49

자석이 붙어있는 보드 광고지 뒤에 그린 그림


블로그 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딸아이가 냉장고 같은 곳에 부착하는 자석이 붙어 있는 작은 보드 광고지 뒷면에 그린 그림입니다. 검은 직사형의 자석 부분을 눈, 수염, 문으로 이용해서 그린 그림이 제게는 기발하고 퍽이나 인상적(?)이어서 이렇게 사진에 담아 올려 봅니다. 많은 양해 바랍니다. 님들 모두 잘 감상하시라 믿습니다.


 
뒷면에 자석이 붙어 있는 작은 보드 광고지





혹 사진을 가지고 가셔야 할 경우에는 추천을 누른 후 마음껏 가져가 주시구요, 출처 꼭 밝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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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4 04:52

개콘 달인의 수염은 무슨 수염일까?



수염(facial hair)은 우리가 흔히 보고 지나치면서도 그 모양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처럼 여겨집니다. 물론 인상적인 수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동시에 별 인상적이지 않는 경우는 그냥 지나치리라고 봅니다. 아니 관리하지 않은 덥수룩한 수염을 보면 개성있다는 생각보다는 깔끔하게 깎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지요. 그 한 예로 만약 개콘의 달인 김병만씨의 수염이 무슨 수염인가 라거나, 달인의 조수의 수염은 어떤가? 라고 물어보면 약간은 당황해하거나, 황당해하거나 아니면 무시해버리기도 할 것입니다. 그냥 기르거나 또 기르다 보면 그런 스타일로 정착되는 것이리라  여기면서 무슨 다양한 스타일이나 종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염에는 그 종류가 다양하고 수염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항상 대하면서도 무심하게 지나쳐왔던 수염에 대해 살펴보도록 합니다. 
 
 
위의 달인 김병만씨의 수염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트레이닝복을 입고있는 달인 조수의 늘어진 저 수염은 무슨 수염일까요?



우선 기본적으로 수염(facial hair) 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턱수염(beard)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beard는 사람의 턱, 뺩, 목, 그리고 윗입술 위에 기르는 모든 수염을 통칭합니다. 그러나 윗 얼굴 수염(upper facial hair)과 아래 얼굴 수염(lower facial hair)으로 구분할 경우, beard는 윗입술과 그 주위의 수염인 moustache 를 제외하고 턱의 아랫 부분에 기르는 수염(facial hair)를 특정적으로 지칭합니다. 둘째로는, 코밑수염(moustache)이 있으며 셋째로,  구레나룻(whisker, sideburn)로 나누어 집니다. 이 세가지 스타일의 수염은 다시 각각 하위 스타일로 구분이 됩니다. 단 구렛나루의 경우는 beard와 연결되어 주로 beard의 범주에 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A beard

더보기






먼저, 위 두 개의 질문에 먼저 답하고 이어 글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달인의 수염은 moustache로 그 종류의 하나인  Pencil moustache(연필형 콧밑수염)입니다. 수염이 좁고 가늘며 코와의 간격이 넒습니다.  Mouthbrow 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말 그대로 입눈썹이란 뜻입니다. Pencil moustache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가 드물고 외국인들 중에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John Waters

 

이것도 Pencil moustache라고 할 수 있을라나?

 



그런데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달인의 조수(?)의 수염은 무슨 수염일까요? 이 수염은 수염을 감식할 수 있는 아마추어의 감식으로서는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비대칭적인 데다가 너무 무성의하고 관리가 소홀해서 스타일리쉬한 수염의 범주에 포함하기에는 수염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가장 안전한 대답이 프리스타일(Free style)이라고 하면 되지만, 대충 판단해보면 아마도 오른쪽은 Chinese(Fu Manchu)이며, 왼쪽은  The GG 스타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1991년부터 격년으로 세계 수염 챔피언대회(The World Beard and Moustache Championships)이 열리고 있습니다. 대회 명칭처럼 구렛나루(Whiskers)[구렛나루 단독 부문은 없지만 구렛나루가 Beard 의 두 부문에는 포함이 된다]는 제외하고 턱수염과 콧수염을 기른 남성들이 그 우아함을 겨루는 대회입니다. 독일의 호벤-엔츠(Höfen-Enz)에서의 제 1회 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2009년 5월 20일에서 24일까지 알래스카의 앵커리지에서 제 9회 대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대회의 심사 분야는 크게 세개의 영역입니다. Moustache와 Full Beard, 그리고 Partial Beard 이렇게 세 분야로 나누어 집니다. Moustache 는 윗입술 위에 있는 수염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국제적인 대회에서는, moustache는 윗입술의 끝에서 최대 1.5cm정도에서 부터 기릅니다.(Moustache is the word for the facial hairs on the upper lip. At international contests, it is agreed that moustache hairs can start growing from up to a maximum of 1.5cm beyond the end of the upper lip.) Full Beard는 자연적이거나 면도한 틈이 없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턱, 뺨에 있는 수염과 sideburns로 이루어져 있습니다(A full beard is considered hairs on the upper and lower lip, the chin, the cheeks, and the sideburns, without any natural or shaven gap.). 마지막으로 Partial Beard 는 Full Beard도 아니고 Moustache도 아닌 수염을 지칭합니다(A Partial Beard is any facial hair that is neither a full beard or a moustache.). 정리해 보면, Moustache 는 콧수염을 의미하며 Full Beard는 얼굴상에 기를 수 있는 있는 모든 수염을 빈 공간 없이 빼빽하게 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Partial beard는 Full Beard에서 어느 하나가 빠지거나 빈 공간이 생겨있는 상태의 수염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약간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위키디피아에서 Moustache 로 분류되어 있는  Fu Manchu 가 세계 대회에서의 분류에서는 Partial Beard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이 각각의 Moustache, Full Beard, 그리고 Partial Beard 분야는 다시 5-6종류의 카테고리로 해서 총 17개의 분야로 나누어 집니다. 올해 앵커리지 대회에서는 대회 분야가 18개로 약간의 변화가 있습니다 (참고: http://www.akbeardclub.com/judgingcategorie.html) 2007년 대회의 심판들은 배우이자 가수인 Nick Cave, 영국 시인 Billy Childish등 수염을 기르고 있는 유명인들이 맡았던 것과 같이 올해도 멋진 수염을 기른 유명인이 초청되리라 생각됩니다.



2007년 대회 Imperial Partial Beard 부문 우승자

2007년 대회 Partial Beard Free Style 분야 우승자



 
이제 콧수염(Moustache)과 턱수염(Beard)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moustache는 The World Beard and Moustache Championships 는 6개의 분야로 나누어지는 데 대회에 채택되지 않은 더 많은 종류의 moustache가 있다.

 
1. Moustache
 
1)Natural Moustache:  이 콧수염은 스타일리쉬하나 보조적인 도움 없는 경우가 많다. 수염은 윗입술의 끝을 넘어 최대 1.5cm 부터 기르는 것이 허용된다
 

죠지 해리슨


 
 


2)Hungarian Moustache:  윗입술의 중앙에서 시작해서 크고 덥수룩하다.  수염은 윗 입술 끝을 넘어 최대 1.5cm 부터 기르는 것이 허용된다. 보조적인 기구가 허용된다.
 
 
 
 

3) 
Dalí Moustache:  좁고 긴 끝이 가파르게 윗족으로 휘어져 있다. 입의 모서리를 지나친 부분은 면도가 되어져야 한다. 인공적인 보조기구가 필요하다. 콧수염의 끝으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살바도로 달리의 이름을 땄다. 
 
 

 

4)
English
Moustache: 영국식 콧수염으로 윗입술의 중간에서 시작해서 가늘어 지며 약간 휘어져 옆으로 길에 당겨져 있다. 끝이 뾰족하고 약간 위로 향해있다.  입의 모서리를 지나는 부분은 보통 면도를 한다. 인공적인 보조기구가 필요하다.
 
 
 
 
 
5) Imperial Moustache:  윗입술과 뺨에서부터 자라 위로 휘어져 올라간다.
 
 
 
 
 
6) Freestyle Moustache:  분류와 일치하지 않는 모든 콧수염들을 지칭한다. 수염은 윗입술 끝을 넘어 최대 1.5cm 정도에서 부터 기르는 것이 허용된다. 보조기구들도 허용된다.



위의 6번까지가 세계 수염 챔피언대회(The World Beard and Moustache Championships)의 moustache 분문에 포함되는 수염의 종류들이다.  이 대회에 포함되지 않는 Moustache 종류는 아래와 같다.

 

7). Fu Manchu : 콧수염이 일반적으로 턱아래까지 길에 늘어져 있다.
 




8) 'Pancho Villa' Moustache : Fu Manchu와 흡사하나 좀 더 두텁다. droopy moustache(늘어진 콧수염)로 알려져 있는데, 역사적인 인물인 판포 빌라( 
Pancho Villa)의 수염보다 훨씬 더 처져있다.
 




9)
Handlebar Moustache: 뽀죡한 끝이 위로 향하고, 덥수룩하다. 야구 선수 롤리 핑거즈( Rollie Fingers) 참조. 또한 이탈리아 남성들의 전형적인 연상 때문에 스파게티 콧수염(spaghetti moustache)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10) Horseshoe Moustache :  종종 Fu Manchu 와 혼돈이 되지만 다르다. 이 수염은 대체로 현대의 카우보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두 입술의 모서리에서 부터 턱선 아래까지 수직으로 늘어진 완전 콧수염(a full moustache)이다. 거꾸로 해놓은 말꿉과 흡사하다.  




11) Pencil Moustache : 연필과 같이 좁고,  곧고,  가는  수염으로  윗 입술의 윤곽을 따라 다듬어져 있다. 코와 간격이 넓다. Mouthbrow로 알려져 있다. 




12) Chevron Moustache: 두텁고, 넓은데 일반적으로 윗입술의 윗부분을 덮는다.

 

NASCAR driver Richard Petty



13)
Toothbrush Moustache: 아주 유명한 콧수염이다. 두텁고, 중앙에서 1인치(2.5cm)정도를 남겨놓고 면도가 된다.  ( Adolf Hitler, Charlie Chaplin, Oliver Hardy, and Robert Mugabe. )

아돌프 히틀러

찰리 채플린




14)
Walrus Moustache: 털이 덥수룩하고 입술을 아래로 드리워지고 종종 완전히 입을 덮는다.( Wilford Brimley and Jamie Hyneman )




15) The GG Moustache: 중앙은 면도가 되고, 입의 모서리에서 덥수룩하게 길러진다. GG Allin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이 수염은 징기스칸(Ghengis Khan)의 수염의 축약형(a shortened version) 이다.
 

GG Allin

징기스 칸

 


2. Full Beards

1) Verdi: 
10cm를 초과하지 않는 길이로 짧고 둥글다. 반드시 꾸며져야 하고 보조기구는 선택이다.

베르디





2)Garibaldi: 넓고 둥글며, 길이가 20cm를 초과하지 않는다. moustache와 합쳐지며 보조기구는 선택적이다.

가리발디





3)
Natural Full Beard:  Asmoustache와 함께 자라며 보조기구가 허용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엘겔스




4)
Natural Full Beard with Styled Moustache: Natural Full Beard 와 같으나 단지 차이는 moustache가 보조기구로 꾸며질 수 있다. Moustache는 윗입술부터 난 수염으로 간주되며 beard 에 포함되지 않는다.




5)
Freestyle Beard:  위의 스타일들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full beards.



3. Partial Beards



1) Musketeer : Moustache 가 길고 가늘다. 수염은 윗입술의 끝에서 최대 1.5cm 정도 넘어서부터  기르는 것이 허용된다.  Beard는 작고 뾰족하며 보조기구는 허용되지 않는다.
 



2)Chinese(Fu Manchu):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moustache로 분류되어 있으나 세계대회에서는 Partial Beard 부문에 포함되어 있다

John Lennon

 



3) Natural Goatee : Goatee는 우리나라 말로 염소수염이라고 하는데, 단지 턱, 윗아래입술 부근에만 기른다. 보조기구 없이 꾸며질수도 있다.




4) Alaskan Whaler : 전통적인 알래스카 수부의 수염(seafarer's beard)이다. 뺨과 턱, 그리고 아랫입술 아래쪽으로 기르고 덥수룩하다. 윗입술 위쪽에는 기르지 않는다(moustache는 기르지 않는다) 보조기구가 허용되지 않는다. 







5)Sideburns - Mutton Chops : 반드시 Sideburn 이어야 하며 귀 아래로 자연적이거나 면도를 한 틈이 없어야 한다. 턱 부분은 면도가 되고 윗입술위의 수염(moustache)은 선택적이다.  보조기구는 허용된다.






6)Imperial Partial Beard (Imperial Moustache와 다름):  단지 뺨과 윗입술 위에서 기르며 moustache와 합쳐진다. 끝은 위쪽으로 향해야 하고 완전히 굽어져서는 안된다. 보조기구가 허용된다.

 





7) Freestyle Partial Beard : 위의 스타일들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partial beards.

링컨


*Chin Curtain Beard


*위의 모든 사진과 영문의 출처는 위키피디아 및  ttp://www.akbeardclub.com/judgingcategorie.html
  그리고 flicker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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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3 21:17

음식의 역사(5):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유럽 전체와 아드리아 해와 지브롤터 해협 사이에 살고 있던 모든 야만 민족들은 일체가 되어 이동했다…… 온 가족을 이끌고 유럽의 모든 나라를 가로질러 행진하면서…… 그들은 어깨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열광적이고 열정적으로 모든 도로에 모여들었다. 이 전사들과 함게 많은 민간인들이 왔으며, 그 숫자는 바닷가의 모래알과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았다.”
 


1차 십자군 원정 중 안티오크 포위 공격, 중세 세밀화.(The Siege of Antioch, from a medieval miniature painting, during the First Crusade.)
 
 
 

비잔틴 황제의 딸인 안나 콤네나는 최초의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p.224)

안나 콤네나의 묘사는 십자군을 야만 민족이라 비웃고 있지만 ‘열광적이고 열정적으로‘ 란 표현에서는 어떤 두려움이나 심지어 경외감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어떻게 유럽의 ’야만족들‘ 은 십자군과 같은 ’모험적인 계획’ 을 생각할 수 있었을까? 십자군 원정은 대단히 힘들고 심지어 무모하달 수 있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험한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생겼을까?



휘어진 보습이 달린 중국 철제 쟁기, 1637
(Chinese iron plough with curved mouldboard, 1637.)

 




소들이 끄는 보습 쟁기. 브리티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16세기 초 중세 영시 원고의 삽화 ( Ploughing with oxen. A miniature from an early-sixteenth-century manuscript of the Middle English poem God Spede ye Plough, held at the British Museum)





바로 이 힘이 쟁기에서 생겨났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중세의 농업 혁명을 구체화한 도구는 평범하게도 새로운 형태의 쟁기였다.“(p.230). 수메르 시대 이래로 쟁기는 그 기능과 모양이 꾸준히 개선되어 왔지만 실제적으로 땅을 갈기에 힘든 막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16세기경에 북동부 지역의 슬라브족은 이전의 쟁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쟁기를 개발했는데, 바로 이것이 '보습 쟁기(moldboard plow)' 였다. 이 보습 쟁기로 인해 땅의 깊은 부분을 파내면서 경작지의 면적을 획기적으로 넓히면서 식량의 증가를 가져왔고 이어 인구의 증가를 불러왔다. 예를 들어, 17세기 말엽에 독일의 한 지역의 인구는 로마 시대에 비해 4배나 증가하였다. 보습 쟁기의 출현은
북부 지방에서 단순히 식량과 인구의 증가뿐만이 아니라 생산성이 높은 3부작을 가능하게 하였고 더 많고 더 질좋은 곡물을 생산할 수 있었다. “단백질 섭취의 증가는 건강 증진, 열량 섭취 증가, 정력의 강화를 의미했다. 3부 윤작을 하는 토지 - 예컨대 샤를마뉴 대제의 프랑크 왕국 - 에서는 사회 자체도 더 부강해졌다. 한 과학기술 역사가가 표현한 대로, 북부의 민족들은 곧 모든 면에서 ‘원기왕성(full of beans)' 해졌다 ”(pp. 232-233) 이렇게 무역과 농업혁명에 따른 식량의 증가와 영양의 섭취는 유럽인들의 수적인 증가와 함께 더 정력적이고 활동적으로 되었다. 이렇게 쟁기에 의해 촉발된 인구의 증가와 육체적인 힘의 활동력의 증가가 십자군 원정을 가능하게 한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위 그림들의 출처는  모두 위키피디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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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4:47

목욕탕의 추억(1)



 

순결한 수산나, 헤너


목욕탕의 추억

어린 시절 목욕탕은 놀이터와도 같은 곳이라 생각할 것이다. 오늘날의 수영장을 대체하는 의미가 있었다거나, 엄마와 함께 여탕으로 가던 추억이나, 목욕후 아빠가 사주던 짜장면에 대한 추억들 따위로 어린 시절과 목욕탕을 낭만적으로 연결 지으려고도 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 추측은 9할 정도는 맞을지도 모른다. 목욕탕이 낭만적인 곳이었다는 생각은 보편적인 생각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목욕탕에 대한 기억이 그리 낭만적이지 못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엄마와 함께 여탕을 이용했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간혹 여탕에서 목욕하기도 했다. 이건 내겐 낭만이 아니라 차라리 악몽이었다. 엄마의 편리를 위해 희생된 비극적인 결과였다. 빈도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심지어 나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도 엄마와 함께 여탕을 들락거렸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애가 여탕에 가기에는 좀 커지 않나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면서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여탕으로 향했다. 엄마는 억척같고 생활력이 강한 여자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상하게 내가 엄마 손을 잡고 여탕의 탈의실에서 옷을 벗는 순간부터 같은 반 여학생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나의 초등학교 1, 2학년 여학생들은 나의 나신에 꽤 익숙해 있을 것이다. 남자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드물게 보았기에 나는 여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 더욱 부끄러웠다.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목욕을 할까? 아빠를 따라 남탕으로 가겠지? 여자 아이들을 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고추가 뻣뻣해져 얄궂은 수치심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탈의실에서부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여자 아이가 있는가부터 살폈던 것이다. 만약 여자 아이가 있으면 아예 등을 돌리고 후다닥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욕실에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참 단순한 행동이었다. 작은 욕실은 더욱 더 피할 곳이 없었으니 말이다. 공간의 제약이 더욱 심해서 함께 나란히 앉아야 할 경우도 있었다. 작은 목욕탕은 가끔 악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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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00:07

음식의 역사(4) :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음식의 역사(4) :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기원전 10,000를 전후한 신석기혁명과 함께 인간의 농경과 목축이 발전하고 농경지를 중심으로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식량의 생산량은 급속하게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은 토지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목축 또한 목초지를 고갈시키게 되어 농경지를 중심으로 한 정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화전민이나 반 유목적인 생활을 영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의 증가와 음식 요리법의 발달은 인구의 증가와 인간의 문명을 형성하는 계기 되었을 것이다.

“신석기시대 초기의 수천 년은 발견과 확장 그리고 파괴의 기간이었다. 곡식의 새싹이 돋아나는 넓은 들판은 해충의 번식을 부추겼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들은 설치류를 급증시켰다. 농경은 단지 토양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져가는 데만 급급했고, 그 대가로 되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토지를 소모시키는 데는 2~3년 밖에 안 걸리지만 그 땅이 재상되는 데는 50년이나 걸린다. 신석기시대의 중심지역에서는 우선 대지의 나무와 잡목들을 다 베어버리고, 그 다음 지나치게 땅을 혹사시키고, 또 가축들이 풀을 뜯어먹게 했다. 그러자 대지는 점차 사막으로 변해갔으며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자꾸 줄어들었다. 신석기 혁명은 현대문명의 기초를 쌓았지만, 20세기의 인간을 괴롭히는 여러 가지의 절박한 생태학적 문제들의 원인을 낳기도 했다.”(p.67)

농경이 최초로 발달한 중동의 경우 기원전 5000년 경, 현재의 페르시아 만 위쪽에 있는 쿠지스탄(Khuzistan)이라고 알려진 지역에서 제방을 터서 물을 공급하는 작은 수로 기술을 개발했다. 이 수로의 개발로 강의 양쪽 3마일에 걸친 토지에 물을 공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개기술의 발달은 몇 가지의 결과를 낳았는데, 첫째로, 수확량의 증가, 둘째로 도시가 형성되고 수메르와 같은 문명을 탄생하는 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중동의 사막화를 초래한 사막화를 불어왔다. 관개에 의존하여 형성된 국가들은 국경을 넘어서 새로운 토지를 찾아야 했으며 이것은 제국의 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신석기 혁명들의 결과들이 기원전 5000년경에 중동으로부터 수에즈의 지협을 건너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밀과 보리가 잘 자란 덕택에 단지 몇 세기 동안 인구가 100배 이상 증가했다.” (p.72)기원전 3000년경에 이집트의 농부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식량보다 3배나 많은 식량을 생산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잉여 생산물의 대부분은 홍수를 통제하는 사업, 대규모 공공건축사업, 피라미드 등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메리카의 경우는, 혁명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기원전 7,000~9,000년에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산맥의 둥굴에 거주하던 주민들이 채집과 더불어 작물들을 배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6,000년경에는 테우아카 계곡에서 옥수수를 재배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아시아는 아메리카 대륙보다도 신석기 혁명에 관한 기록이 전무한 실정이다. "선사시대 아시아의 음식에 관한 정보의 결여는 인도와 중국의 경우에 특히 불행한 일이라고 하겠다. 인더스강과 황하유역의 위대한 문명들이 역사의 무대에 돌연히 그리고 장엄하게 등장했는데, 이들은 선례가 없을 만큼 충분히 발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식습관에 대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p.75)

특히 기원전 3,000 ~ 기원후 1,000년에 걸쳐 중동, 이집트, 중국, 유럽의 문명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수메르와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에 장거리 무역을 시작했다. 2000년 후 그리스도 식량 공급을 위해 페니키아인들을 앞세워 지중해의 대부분의 국가와 무역을 해야만 했다. “로마 역시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수세기 동안 밀의 공급이 행정, 경제에, 국제적 정책을 수립하는 데 지배적 역할을 했다. 로마 제국의 대부분 국경지방은 고대 세계의 밀 재배지역들의 경계와 거의 일렬로 접해 있다.“(p.83)

신석기 혁명이 시작되고 인간의 문명이 형성되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국가와 국가 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식량의 무역과 함께 팽창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후 수세기의 발전을 서술함에 있어 세계의 지역적인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중세 이전의 아시아와 아랍을 거친 후 이 책이 도달하는 시대는 1,000 ~ 1,500경의 중세 유럽이다. 이후 세계의 확장편(1,500 ~ 1,800)에서 다시 아메리카, 인도, 중국이 등장하지만 유럽이 중심이 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팽창을 이 책의 행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암시받고 추측하고 해석할 수 있으나 좀 더 꼼꼼하고 확신적인 정리를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음식과 관련된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의 기술은 중세 유럽에서 발전한 농업 혁명 이후 급속하게 증가한 인구와 도시의 팽창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다.

16세기 북동부 지역에서 시작한 중세의 농업 혁명은 식량의 공급를 획기적으로 증가시켰고, 이 결과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를 가져왔다. 또한 “새로운 농업 체계는 간접적으로도 마을과 도시의 부활에 기여했다. 이전에 토지를 경작하던 농부들은 자신의 다리나 느릿느릿 움직이는 가축 이외에 다른 운송 수단이 없었다. 그러나 귀리가 새로운 윤작 시스템에서 중요한 작물이 된 것은 말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된 부분적인 이유가 되었다. 말은 농사일이나 짐을 나르는 일 외에도 유용한 교통수단 역할을 했다. ...... 이제는 말을 들에서 떼어 놓을 수 있을 때면 언제든지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주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p.225)

이렇게 기동력이 원활해지면서 시장을 자주 이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시장의 규모도 대규모화 되었다. “한 도시의 번영은 시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도 및 폭력조직의 협박에 대항하여 노점상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엄중한 경계를 취해야 했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와 유사한 ‘시장 평화’ 가 확립되었는데, 이 새로운 기독교 세계에서는 시장에 세워진 십자가에 의해 상징화되었다.”(p.235) 시장의 확대는 도시 자체에 활기를 불어 넣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이나 베네치아 같은 대도시들이 형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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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20:25

벌거벗은 여인들의 정체





벌거벗은 여인들의 정체


사진출처: http://kr.blog.yahoo.com/pete_.



세상에는 수많은 만남들이 존재하지만 만남에 대한 희망에 비해서는 그 수가 적을지도 모른다. 원하지 않는 만남들이 수많은 만남들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세상은 또 그런 만남을 거품처럼, 아니 윤활유처럼 해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꼭 원하는 만남을 가슴 속 깊이 묻어 둔 채로 원하지 않는 만남으로 지루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떤 이유로 투덜거리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택배가 올 것이라는 것을 전화로 알고 있었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문을 열었다. 택배회사 로고가 붙은 모자나 옷을 입은 택배회사 사원이 아니라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있는 여자였다. 상상하지도 못한 광경이었다. 나는 급하게 문을 닿으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가 몸을 반쯤 안쪽으로 헤집고 들어 온 상태였다. 그녀는 숨을 조금 허덕이고 있었지만 그다지 다급한 움직임은 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녀가 안에서 문을 닫고는 돌아서서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그녀에게 남자 옷이긴 했지만 청바지와 셔츠를 건네주었고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는 옷을 입었다. 그녀는 음료수를 한 잔 마시고는 쇼파에 누워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서 너 시간 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머리를 쓰러 넘기며 내게 말했다.

“고마웠어요.”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을 뿐이다. 그녀는 들어왔던 문으로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졌다.

*

세상에는 수많은 죽음이 존재하지만 어느 누구도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는 없다. 살아있는 자가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일 것 같은 어떤 것’ 에 불과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강하기에 죽음일 것 같은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조차도 우리에겐 강한 호기심 일으킨다.

교통사고였다. 나는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이었고 길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시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워있었다. 그녀는 소파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있던 그녀의 얼굴과 중첩이 되었다. 그러나 같은 여자는 아니었다. 이번의 누드의 여자는 이전의 여자보다 머리칼이 짧았다. 그녀는 왜 벌거벗은 몸으로 도로로 뛰어든 것일까? 그녀가 쓰러져 있는 곳은 횡단보도가 아니었다. 불가사의였다.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나 차에서 내려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나 인도에 서있는 사람들이나 모두들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아무도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가던 장례식장으로 다시 향했지만 이 일은 오래 동안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

그 교통사고가 있고 몇일 뒤 나는 맛선을 보았다. 부모의 재촉 때문이었다. 나의 부모는 삼십대 중반이란 나이를 넘긴 내가 아직도 결혼하지 않고 원룸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언제나 걱정했다. 맞선을 본 상대 여성 O는 부모가 함께 나온 맞선 장소인 호텔 카페에서는 다소곳했다. 그러나 부모들이 물러나자 O는 내게 이색적인 제안을 했다. 결혼 같은 것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O는 과감하게도 나이트클럽에서 함께 춤을 추자고 제안을 했던 것이다. 나도 결혼이란 것에 부담감을 가지고 있지 않던 터라 O가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 밤의 시간을 O와 함께 즐기기로 했다. 정말 신나게 춤을 추었다. 술도 꽤 마셨다. 그런데 이상한 헤프닝이 발생했다. 무대 스테이지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을 부르던 악단도, 무희들도, 아래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던 한 무리의 남녀들도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3분 정도 나신으로 몸을 흔들어대다 조용히 무대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런 이상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날 참 흥겨웠다. 세상 근심 떨쳐내려는 듯이 춤을 추었고 현실을 잊기라도 하듯이 술을 마셨다. O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O와 나는 나이트 클럽에서 흥겨운 시간을 보낸 뒤 헤어졌다. O는 나이트 클럽에서 만난 친구들과 더 흥겨운 시간을 가졌고 나는 나이트 클럽을 나와 정적이 기다리고 있는 나의 원룸으로 향했다.

*

세 명의 벌거벗은 여자들! 쇼파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첫 번째의 여자, 도로에 쓰러져 있던 두 번째의 여자, 나이트 클럽에서 춤을 추던 세 번째의 여자. 나는 그녀들의 존재가 환영이라고 한동안 생각했지만 결코 그녀들은 환영이 아니었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은 얼마 전 달이 바뀌면서 넘겨놓은 달력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림 속에는 벌거벗고 있는 세 여인이 그려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루벤스란 화가가 그린 <파리스의 심판>이란 그림이었다. 그 여자들도 인간이 아니라 여신들이었다. 바로 아테나, 아프로디테, 헤라였다. 내가 현실에서 본 여신들의 이름이 일치되지는 않지만 내가 본 여자들이 <파리스의 심판>에서 튀어나온 여신들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여신들이 그 그림 속으로 다시 들어갔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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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00:35

생일 선물(Birthday Present)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



인간은 관계와 더불어 살아간다. 그래서 사회적인 동물이란 말도 있다. 관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관계의 대상보다 우위적인 위치를 점하고자 한다. 인간은 그 관계 속에서 보다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바로 그것이 사회적인 신분이랄 수 있다. 그러한 노력에 더해 현실적으로 도달하고 획득한 사회적인 신분을 넘어 과시나 과장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미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인 신분에 더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또 상대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모습으로 과시하고 과장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이성과의 사랑이라는 다소 동물의 본능에 가까운 관계에 처하는 경우 이러한 과시나 과장은 더욱 강해진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액세서리를 하는 등 보다 화려한 치장에서부터 직업등을 과시하고자 한다. 더해 사회적 신분이나 자신의 생물적인 조건을 과장하기까지 한다. 이런 과시와 과장이 이성간의 관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다. 선사시대 남녀들의 문신이나 장식도 과시와 과장에 속할 것이다. 현실은 인간과 인간의 꾸밈없는 관계가 아니라 과시와 과장이 게재된 불필요한 요소들로 거품이 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판단하고 관계를 맺을 때 인간 그 자체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아니 판단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주 비중있는 판단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대신 직업과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 인간 그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관습처럼 일반화되어있다. 이것은 순환적인 상승을 일으키면서 사회를 경쟁의 관계로 몰아넣고 있다. 보다 나은 신분을 위해, 직업을 위해 남들보다 앞서고 우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사진출처:http://www.maxmovie.com/



<생일선물(Birthday Present)>은 이러한 과시와 과장의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의 관계(특히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어 의미있게 본 영화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전도연을 닮은 영배우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경해 마지않는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도 그렇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바로 이성간의 관계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 보다 크지는 않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마사요시(키시타니 고로)나 아키코(와쿠이 에미) 모두 관계에 대해 인간 그 자체보다는 현실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적인 신분과 직업이 만들어 내는 과시와 과장된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 그들이 속물적인 것이 아니라 속물적인 현실에서 지속적으로 강요되고 쇠뇌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곡에서 예외적일 수 있는 인간이 우리중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마사요시는 여행사의 관광안내원으로 영화내내 자신이 관관관안내원이란 사실을 숨긴다. 우연히 화가로 자처하게 되었지만 의도적으로 화가라고 신분을 속인다. 이것은 화가로서의 사회적인 지위가 관광안내원보다 낮았다면 계속해서 화가라고 속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들러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인 신분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또 우연히 식당에서 아키코의 약혼자였던 변호사와 조우하게 되고 아키코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은 변호사를 향해 주먹을 날리긴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혼이 나는 것은 변호사라는 신분이 호락호락하지 않는 직업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아키코에게 사랑의 상처를 심어준 것이나 아키코가 그렇게 당한 것은 알고 보면 변호사라는 신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키코는 어떤가? 아키코는 비행기 여승무원이다. 그녀의 신분은 그다지 낮은 것이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비행기 여승무원에 대한 인식이 낮지 않은 것을 보면 일본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본다. 또한 관관안내원인 마사요시가 다소 부담을 느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사요시와는 달리 아키코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거나 고과장하기 보다는 상대의 신분을 너무 높이 잡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물질적인 보상을 위한 설득력 있는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 인간을 그 자체로 보는 관점과는 먼 인간에 대한 판단이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라리 사랑과 물질을 동시에 추구한다면 더 나을 것이다. 사랑은 온데, 간데없고 물질적인 보상만을 바란다는 것에서 아키코도 속물적인 관습에 익숙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성간의 사랑이라는 좁은 영역에서가 아니라 인간 일반의 관계로 넓혀서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 영화의 갈등은 과시와 과장에 가려진 관계에 의해 일어난다. 또 이러한 과시와 과장을 벗어버리고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고, 그 진실을 바라보는 가운데 갈등은 해소된다. 그러나 영화속의 이러한 갈등의 해소가 우리의 마음속에 동요를 일으키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 같다. 한 순간의 감동이나 위로를 제공하고 그칠 것 만 같다. 왜 그런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쩐지 현실의 높은 벽과 싸우기에는 이 영화가 다소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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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8 12:47

음식의 역사(3):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요리법의 발달은 인간의 건강을 비롯한 생존방식의 전반적인 측면에서 변화를 가져왔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특히 인간이 날 것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던 질긴 고기는 인간의 건강을 악화시키고 수명을 단축시켰을 것이다. 이와 위의 손상, 또는 신경과 조직의 손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생존을 위해 먹은 음식이 사실상 생존을 단축시키는 아이러니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날것을 먹어야 했던 우리의 선조들이 불을 발견하고 우연하게 익힌 고기를 접하게 되면서 요리를 할 수 있게 된 역사적 사실은 실제 어떠한 역사적인 발견보다도 우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요리법의 개발은 기원전 500,000년경과 네안네르탈인이 선사시대의 무대에 모습을 나타낸 어느 시기에” 불을 사용하게 되면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요리법에 관한 정보는 거의 찾을 수 없다 불을 사용해 음식을 익혀 먹기 시작해 토기를 발명하기 까기 수 만년 동안 요리의 변화상은 단순히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부언하는 말 같지만 『음식의 역사』의 내용을 따라 추측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불의 발견은 곧 굽는다는 행위와 직결된다. 즉 구이가 인간들에겐 최초의 요리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이는 고온으로 인해 그 양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타다 남은 불에서 구운 고기가 손실이 적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타다 남은 불에서 단단한 뿌리식물을 요리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다음의 변화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은 진전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요리법은 고고학적인 흔적을 남기지 않기에 확인해 볼 수도 없는 일이다.

기원전 6000년경에 토기가 발명되었는데, 그 발명의 영감은 흙투성이 돼지새끼를 진흙덩이 위에 놓고 구웠을 때 깨끗한 상태로 구웠을 때 보다 수분이 더 많이 남고 맛있다는 것을 알고부터였을 것이다. 토기와 관련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돌니 베스토니체(Dolni Vestonice)에서 기원전 2500년으로 추정되는 화덕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는 2천여개의 불에 구운 점토덩어리들이 들어 있었다. “이 점토들은 동물의 머리, 몸통, 발 등의 형상을 한 작은 모형들이었다.“(p.50) 우크라이나에서도 화덕이 작은 구덩이 같은 형태로 존재했으리라 추측된다. 이 작은 구덩이들에는 ‘예열된 뜨거운 숯이나 조약돌‘ 로 채워져 음식을 익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런 구덩이 요리법은 선사시대의 부족이 광활한 지역을 거쳐 이동할 때 소란스러운 모닥불로 요리하는 방법을 피하고 불꽃을 숨기기 위해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불을 피우는 방법을 개발 했을 것 같다.

굽는 것과는 달리 끊이는 방법에 대한 정보는 더욱 찾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불이나 굽는 방법은 우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으나 뜨거운 물은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접하기 어려우며 특히 불과 물에 견딜 수 있는 용기의 발명은 우연에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요리법은 증거가 발견된 기원전 5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이전에 삶은 방법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도처에 있다. 거북의 창자를 잘게 다져 만든 아마존의 요리인 사라파텔은 거북의 오목한 등껍질을 그릇처럼 이용하여 끓여졌다. 아시아에서는 대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인도네시아는 아직도 이 방법이 이용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 7000년경 중앙아메리카의 테우아칸 계곡에서 돌그릇과 돌냄비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토기와 청동기 이전에 널리 사용된 것은 동물의 위였다. 유목민인 스키타이족은 기원전 5세기에 위 속에서 음식을 요리했다고 한다. “기원전 13000년경에는 가죽 가공기술이 대단히 진보하여 가죽이 예전의 여러 가지 용기를 대처하게 되었다고 한다.”(p.53)

곡물요리의 경우는 단순히 불에 굽는 사냥한 동물의 원시적인 요리와는 달리 까다로운 곡물 처리로 인해 동물에 비해 좀 더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이 필요했다. 그 이유는 야생곡식 자체가 실제로 인간이 먹는 배를 배유라는 전불질 속에 들어있고, 이것을 다시 얇고 거친 까끄라기가 감싸고 있고 다시 전체적으로 왕겨로 싸여있었기 때문이다. 야생 곡식은 그 왕겨를 제거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인간은 이삭을 구워주면 왕겨를 제거하기가 쉬워진다는 사실을 터득했다. 고대 시리아의 무레이바트(Mureybat)에서 구덩이에 가열한 돌을 깔아놓고 이삭들을 탈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탈곡도 까끄라기나 왕겨가 잘 없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는 탈곡법이 발명되었는데 이집트의 콤 옴보(Kom Ombo), 나일강 상류의 사하바(Sahaba) 퇴적평원, 요르단 계곡의 말라하, 이라크의 자위 케미 샤니다르(Zawi Chemi Shanidar)에서 발견된 절구와 비벼대는 돌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곡식을 두 개의 돌 사이에 두고 비벼대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밀과 보리를 탈곡한다고 하더라도 날곡식과 인간의 소화기관은 잘 맞지 않아 곡식을 요리하는 방법이 개발되어야 했을 것이다. 동물요리와는 달리 작은 낱알들로 이루어진 곡물의 요리는 용기 문제가 걸림돌이었다. 곡물을 불 위에 직접 굽기가 어려웠고, “뜨거운 바닥돌은 종자의 양이 한두 줌 보다 많으면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 문제를 무시해도 좋을 곡식 요리법이 한 가지 있었다.“(p.60). 이것은 실수(?)에 의한 발견으로 탈곡을 위해 가열한 돌바닥에서 왕겨가 떨어져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과열로 인해 밀이 구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발견되어 돌바닥에서 탈곡이 되면서 구워진 밀은 소화하기에도 좋고 그 자체가 요리가 되었고 맛이 좋았지만 너무 건조해서 먹기에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다.

이것의 해결방법으로 발명된 요리법이 탈곡하고 구워진 밀에 물을 붓고 그 혼합물을 주물러 반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반죽한 곡물반죽 덩어리는 그야말로 곡물 요리의 혁명적인 발명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것은 그 맛에 있어서는 고대 식사의 기본적 품목이었던 곡물 반죽인 그리스의 마자(maza)나 로마의 풀스(puls)와 거의 비슷한 것이었으며, 질감에 있어서는 오늘날에도 티베트에서 즐겨먹는 트삼파(tsampa)와 비슷했을 것이다.”(p.61)

곡물 반죽의 발명 또는 발견은 음식의 역사에서 곡물을 인간이 가공한 효율적인 요리법으로 오늘날까지 이용되고 있다. 이렇게 발명된 선사시대의 밀가루 반죽은 기원전6,000 진정한 토기의 발명으로 그 보존과 응용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마침내 토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자 요리사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방열, 방수용기들이 원활하게 공급되어 용기들이 쉽게 깨어지더라도 손쉽게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곡식에 다량의 물을 넣고 끓이기, 소량의 물을 가하여 부글부글 삶기, 고기와 곡식으로 스튜 만들기, 납작한 빵을 더욱 맛있게 굽기 등등 여러 가지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하고 이전의 음식들을 개선하는 일들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토기가 깨지지 않는 금속용기로 대체되면서 현대적인 요리가 발달하기 시작했다.”(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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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7 23:49

독재자들

                                                    사진출처: http://kr.news.yahoo.com/servi


독재자들을 생각하며......

인간의 사전에 비극이란 단어는 사라질 수 있을까?

일회적인 역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가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그 문명에 대해서는 그 폐해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 혜택에 대해서도 늘 감사를 해야 할 것 같다.

만약 나 자신이 로마시대의 검투사로 태어나거나 노예로 태어났다면 그 잔인한 운명에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만약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하지 못한 네안네르탈인 이나 크로마뇽이었다면 또 어떻겠는가?

21세기, 법과 도덕이 인간의 잔인함을 다소나마 아니면 엄청나게 순화시키고 있는 지금에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인간의 문명에 대해 감사 정도로는 부족하지 않는가? 나의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만 할까? 문명에 대한 고마움은 곧, 문명을 이룩한 인간들에 대한 고마움과 다름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시대에, 이 공간에 태어나게 한 어떤 힘에 대한 고마움이기도 하다. 그 힘이 그저 우연이란 이름으로 불리던지 노력이고 필연이란 이름으로 불리던지 아니면 운명이고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던 간에 나는 무조건 나라는 존재의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진 축복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전적으로 비판하려면 자신의 존재의 전적인 부정이 그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오직 문명에 대한 제한된 일부의 비판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일부분의 비판이라는 것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다면 오랫동안 문명이 내재되어온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살상하는 일이다. 자기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것이 그래도 가능한 것은 미래 때문이다. 미래는 더 나은 문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희망과 믿음 때문이다. 나의 존재에 주어진 축복 중에 다소 불순한 것, 불편부당한 것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은 미래의 존재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미래의 그들이 진정으로 더 더욱 축복받는 존재가 될 수 있도록!

불순하고 불편부당한 것이란 왜곡으로 변질된 문명이다. 광기와 전쟁과 기아와 증오이다. 그것에 근거한 문명이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든 문명의 왜곡들이다. 왜곡된 문명, 우리는 이것을 우리에게 축복을 주는 참된 문명 속에 깃든 불순물로 걸러내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나 자신이 나를 인간답도록 해준 이 문명에 참으로 감사하는 길은 문명의 왜곡된 부산물을 걸러내려 노력하는 것이다. 세상을 개화시켜온 인간들처럼 지금, 현재 우리가 또한 개화시켜할 세상이 있고 그 세상을 개화시키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문명에 감사하는 길이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어렵다. 역사라는 체계 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고 또 그렇게 단단한 체계로 움직이면서 끊임없는 쇠뇌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극을 잉태하는 인간은 너무도 완고하고 잔인하다. 현실에 얼룩져있는 비극을 잉태하는 불순함과 불편부당함이 스며들어 있는 문명의 일부와 인간의 일부로 부터 다수의 선량한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축복에 불순물과 같은 불행이 언제나 있다는 것은 끝없는 슬픔을 자아낸다.  인간들의 수많은 노력에 의해 무수한 불행들이 예방되고 막아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인간에게 무자비한 불행을 주는 인간들 또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것을 당연한 현실이라고 자위해야만 할까? 인간들 사이에 왜 이러한 비극이 생겨야 할까? 그것은 수많은 인간들의 인식이고 또 노력의 근거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인간들로 해서 축복만이 아니라 불행과 비극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다. 

인간은 죽어야 하는 비극적 운명의 존재이다. 죽음이라는 비극만으로도 고통스러운 인간들이 서로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존재가 될 수는 없을까? 인간의 사전에 인간이 자초하는 비극이란 단어가 사라질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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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13:30

일본 여자 영화배우들은 왜 생머리를 고집할까?

일반화 시키기는 어렵지만, 일본여자 영화배우들은 생머리를 고집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생머리를 한 여자 영화배우들만 보았기 때문이다. 거의 예외가 없었던 것 같다. 딱 한 번 예외가 있었다면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달린다>에서 우에노 주리의 파머 머리가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도 영화 속에서의 경우이며 실제로 우에노 주리가 파머를 한 모습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우선 일본 여자 영화배우들의 사진을 통해 이러한 모습을 확인해 보기로 하자.




슬라이더 순서대로
나카야마 미호,  미야자키 아오이,  사와지리 에리카,  스즈키 쿄카, 
시바사키 코우,  아오이 유우,  우에노 주리, 유민,  카시이 유우,  타케우치 유코,  히로스에 료코



한국의 여배우들
 
 


한국의 여자배우들과 비교를 해보면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듯 하지만, 그러나 한국 여배우들이 일본여배우들에 비해 퍼머 머리가 더 많다는 사실은 직접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개인적인 가치관의 문제일까? 사회적인 집단 의식의 결과인가? 아니면 종교적인 차원의 무엇일까? 이 질문 자체가 좀 생뚱맛아 더 진척시키기가 어렵고 개인적인 호기심을 일반화하는 것 같아 미안한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여우들, 아니 사실은 대개의 일본 여성들의 생머리가 일본을 이해하는 어떤 단서가 되지는 않는지 생각해 해볼 법도 같아 이렇게 올려 본다. 그 이유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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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13:02

음식의 역사(2)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인간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기까지는 일련의 당연한 진화의 과정을 밟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과정은 오랜 시간을 거쳐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고 경험이 전수 될 수 있는 지식으로 형성되는 데는 수 천년, 아니 수 만년의 시간이 필요로 했을 것이다.

기원전 500,000년경에서 네안네르탈이 등장하여 활동하던 어느 시기에 불이 발견되고 원시적인 요리법이 개발되기 이전 수십만년을 날 것으로 음식을 섭취하였으며 그리고 기원전 10000, 신석기 혁명 이전까지 수렵과 채집을 통해 식량을 얻던 “성공적인 약탈자” 에 불과했다. 기원전 10000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간은 농사, 목축과 더불어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이 생겨나게 되었다. 미국의 인류학자 칼턴 쿤이 “요리법의 도입은 원초적 동물 상태의 사람을 보다 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p.48) 하였듯이 음식과 관련하여 불의 발견과 요리법의 등장이 인간의 진보 그 자체에 미친 영향을 짐작케 한다. 단순한 불의 발견과 원시적인 요리법의 개발이 이러할 진데 농사와 목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원시적인 인간 그 이상의 존재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원전 10000년 경에 오랜 사냥과 채취의 경험을 통해서 얻은 동물과 식물에 대한 인간의 지식은 꽤 축척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축척된 지식으로 신석기혁명의 여명이 시작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여성은 종자, 채소, 과일을 채집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들이 바라는 일정한 장소에서 키울 수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 같다고 한다. 특히 동굴 생활중에 발견한 씨앗의 발아 현상은 식물 재배에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겨울에 저지대의 동굴에서 생활하다 여름에 고지대의 동굴로 이동한 후 다시 초여름 언덕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버려놓고 간 쓰레기 더미 위에서 식물이 무성하고 자라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채취와 종자 발아의 발견을 통해 여성들은 식물 재배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고 이것이 농사와 정착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남성들에 의한 목축도 신석기 혁명의 중요한 요소이다. 목축과 관련하여서는 책의 내용을 좀 길게 인용하고자 한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빙하기가 물러가기 전에 인간과 순록의 관계과 형성되기 시작했는데......순록은 눈이 녹아서 습해진 땅에서 자라는 이끼와 풍부한 양치류를 먹었다. 그러나 눈 녹은 물에 의존하는 동물들은 염분 부족 때문에 정기적으로 해변이나 내륙의 지표에 노출된 암염지로 원정을 가야했다. 그러다가 순록이 사람의 오줌을 염분의 급원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를 미끼로 사람은 그의 야영장 부근까지 순록을 유인할 수 있었고, 동물들을 길들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상호의존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p.54)

결국 순록이나 가젤같은 동물들이 가축이 되는 데는 실패했으나 이러한 경험을 통해 목축의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실제로 신석기혁명 이전 1천년 동안 아시아 늑대가 개로 길들여졌다는 사실이 미국의 아이다호에서 발견된 기원전 8420년경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정착농과 목축이 시작된 신석기혁명은 지구상의 다양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을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두 군데의 명확한 중심지역‘ 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은 카스피해 서쪽과 남서쪽, 그리고 중앙아메리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심각한 도전을 받게되는 데 완두, 콩, 오이, 마름의 종자들이 발견된 태국의 미얀마 국경 지대 부근의 ’스피릿(Spirit Cave)의 등장으로 인해서 이다. “이것은 농업이 중동이나 중앙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경우보다 거의 2천년이나 앞선 것이다.“(p.56)

마을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도 상충되는 이견들이 존재한다.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기록이 남아있는 중동에서는 농사와 목축이 시작되기 전에 마을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농사와 목축은 상당한 인력을 필요로 하며 그 인력의 확보를 위해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포기하면서 씨족 공동체가 더 큰 집단인 마을을 형성했다는 이론도 존재한다. 이 책에서 이러한 견해의 차이가 어떠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야 농사와 목축과 마을의 형성이 갖는 관계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형성은 야생 곡식이 풍부하게 자라는 들판이었다. 곡식을 거둬들이기 위해 수확기를 전후해 그곳에 정착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정착지들이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 둘씩 생겨났으며 수확물을 가지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는 것은 짐수레나 바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기원전 9000년경 북부 이스라엘의 말라하(Mallaha) 의 예는 정착과 농사, 그리고 농부의 탄생에 대한 좋은 예를 제공해 준다. 책의 내용을 인용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는데, 거의 알려지지 않은 단계들을 거쳐서 채집은 경작으로 발전했다. 우선 그들은 야생 곡식의 수확을 너무 효율적으로 하는 경우에 이듬해의 수확이 현저히 감소하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다음 줄기에 이삭의 일부를 남겨두자 그보다는 낫지만 불규칙한 결과를 얻었을 것이다. 마침내 그 다음의 합리적인 단계로서 씨앗들을 손으로 골고루 뿌려주게 되었을때, 그들은 단순한 채집자에서 벗어나 농부가 되었다.”(p.58)

기원전 10,000 경 중동의 야생곡식 들판은 그 주위에 마을 형성하였고 그 야생곡식 들판을 동물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했다. 왜냐하면 야생곡식 들판은 동시에 야생염소와 양들의 번식처를 제공해주었고 먹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3가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몰살, 들판을 지키기, 그리고 지배가 바로 그러한 선택의 여지들이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선택은 지배로 낙점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염소의 경우는 고기는 물론이고 농토를 확장하던 초기의 경작에 있어서 관목숲을 제거하고 잎사귀를 먹어치우는 능력을 가진 일꾼으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다. 양의 경우는 다소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한 마리의 양이 먹어치우는 목초의 양이 너무 많아 그 유지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돼지는 염소, 양, 다음으로 기원전 7,000년 경 등장하는 가축으로 되새김 동물과는 달리 목초들을 소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6100~5800년경 가장 늦게 소가 사육된다.

음식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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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4 20:25

말 할 수 있는 죽을 동물

"말 할 수 있는 죽을 동물": 아리스토 텔레스는 이 술어를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본다(아리스토텔레스, P.23, A.E. 테일러, 이정우 역, 종로서적, 1986)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이유로 "말 할 수 있는 죽을 동물" 이란 말을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표현한 것으로 보았을까? 여기에서 몇 가지의 개념을 추출해 보면 말, 죽음, 동물일 것 같은데 말은 미래의 죽음을 알게 한다는 의미에서 미래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동물임을 강조한 것일까? 말이 없다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다를까? 따지고 보니 말과, 죽음, 그리고 동물이라는 사실만큼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표현도 없을 것 같다.

인간의 문명과 문화는 말의 또다른 형태일 것이고,  역사는 죽음의 기록이며, 동물은 생존이며 번식으로 이어가야 하는 존재, 바로 현실속에 실존하는 생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죽을 동물은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다.

어제는  한 지인의 부모의 화장을 위해 화장장을 방문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고역이다. 죽음은 내 속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마치 나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고역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죽음을 의식적으로 애써 회피하고자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 앞에서의 침묵은 참으로 무거웠다. 죽음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인간들에게 말은 정말 필요할 것인가 자문해 보았다.

이제, 역전이 되어,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이 고역이 아니라 말을 한다는 것이 참 고역이 되어버렸다. 참 역설적이다. 죽음을 잊기 위해 숱하게 많은 말을  지껄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너무나 조용하다. 죽은 자의 그 침묵, 죽음을 거부하기 의해 말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인간은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죽을 동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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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4 20:21

유대인과 집시

 

일본의 전후( 2차 유럽 대전후) 처리에 대해 그 피해 당사자인 우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독일의 피해 보상, 역사적 인식 등을 비교하면서 일본 정부의 비인간적이고 몰역사적인 태도에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전후 일본의 터무니 없는 피해 보상과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 왜곡, 성노예 할머니들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 등 반성은 커녕 자국의 역사를 오히려 미화하는 짓을 서슴치 않고 있다.

독일의 경우 전대미문의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장본인이라는 측면에서 그들 스스로도 유대인들에 대한 보상과 전범 처리, 역사인식등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유대인 대학살은 살아있는 역사이며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독일이 근본적으로 일본의 전후 태도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아니요이다. 독일 또한 일본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렇다면 무엇이 독일과 일본의 태도를 다르게 했을까?

우선 하나의 실례로 유대인과 한국인(피해 당사국을 한국으로 국한)이란 차이를 들 수 있다. 유대인은 어떤 민족인가? 올해 5월 14일로 건국 60주년을 맞이한 이스라엘을 세운 민족이 아닌가? 유대인의 선조 헤브라이 인이 B.C. 15세기 경에 팔레스티나에 나라를 세운 후 분열과 박해와 추방을 당하며 전세계를 떠돌다 19세기말 시오니즘 운동이 전개되면서 다시 팔레스티나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급기야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국과 미국의 정계를 움직일 수 있었던 그들의 경제력과 시오니즘이라는 종교적인 결집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미국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유대인의 영향력은 미국의 대 이스라엘 정책을 보면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전세계적인 유대인 리스트



Ruth Bader Ginsburg







Henry Kissinger

Jon Stewart



Steven SpielbergBarbra StreisandJon Stewart
Norman MailerMichael BloombergAlbert Einstein
Scarlett JohanssonRuth Bader GinsburgMel Brooks
Louis BrandeisHank GreenbergMilton Friedman




이에 비하면 한국은 가난한 아시아의 변방국에 불과했다. 유대인들과 비교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약소국의 현실을 안고 있었던가? 비유하자면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국과 영국이 팔레스티나 아랍인들에게 했던 처사와 일본이 우리에게 한 천후의 태도의 본질은 곧 강자의 약자에 대한 잔인한 태도 인 것이다.

독일인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피해 보상과 깊은 뉘우침은 실상은 유대인이 강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판단되며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행위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이 우리에게 아직도 역사왜곡을 일삼는 비상식적인 태도는 바로 우리가 약소국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 역사적인 인식을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박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유대인이 강했던 어떻던 독일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충분한 보상과 역사적인 인식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근본적으로 일본이 전후 보상과 역사인식은 독일과는 근복적으로 다르고 양심적이라고.

 그러나 전후 보상에 대한 독일인의 양면성을 알게 된다면 독일 또한 일본의 태도와 다르지 않으며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 보상은 유대인의 능력이 유발한 것이지 독일인의 근본적인 반성에서 나왔다는데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바로 집시들에 대한 독일인들의 전후 보상으로 볼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주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유대인과 집시에 대한 독일의 야누스적인 전후 보상과 태도는 독일의 뻔뻔스러움을 여지 없이 보여준다.

Gypsy costumes



우선 집시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유럽에서 집시에 대한 명칭의 유래는 세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이집트 인(Egyptian)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영어의 gypsy, 프랑스어의 gitan, 에스파냐어의 gitano(히타노) 등을 들 수 있다. 두번째는 중세 그리스어의 아팅가노이(이교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일어의 치고이네르, 프랑스어의 치가느(tsiganes) 등이 그 예이다. 세번째는 15세기 보헤미아 왕이 집시에게 영내 통행권을 부여한 것에서 보헤미안(bohemian)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정작 집시 자신들은 스스로를 롬(Rom) 이나 로마(Roma)로 부른다.

이 로마들이 나치스에 의해 학살된 숫자가 50만에서 70만에 이른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아마도 600만명 이라는 상상하기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 이러한 숫자를 가리고 있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50~70만명이라면 실제로 상상하기 끔찍한 숫자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집시에 대한  보상은 유대인들에 대한 피해 보상에 비해서 터무니 없다. 독일의 전후 보상법은 유대인들을 중점에 두었으며 그 보상액도 유대인들에게 집중되었다. 1981년에 집시와 동성애자등을 대상으로 하는 '비유대계 피박해자 특별기금' 으로 약 1억 마르크, 우리나라 돈으로 500억원이 조성되었는데 이 액수는 1991년까지 1월까지 유대인 희생자들에게 지급된 864억 마르크에 비하면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다. 이러한 집시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곧  전후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태도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독일의 전후 보상이나 역사인식이라는 것은 일본과 비교해도 오십보 백보에 불과한 것이다.

독일의 유대인 보상의 전례를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전후 보상에 대한 모범적인 사례로 들먹인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독일 또한 일본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일의 태도는 집시 학살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분명하게 입증하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어느 나라던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으로, 군사력으로 강하고 보아야 한다. 



*이 글은 이전 히틀러와 집시라는 글로 소개한 글이지만 이번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침공을 목격하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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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역사

음식의 역사
Food in History

래이 테너힐의 Food in History(음식의 역사, 손경희 옮김)를 읽으면서 음식이 단순한 인간 문명의 부산물이거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인간의 역사에 상호 영향을 끼쳐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가 과거와 미래의 대화’ 라는 카의 명언에 음식의 역사를 적용해보면 인간의 역사가 생물적인 한계와 관습을 가지는 보다 유기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역사의 모습을 제공해 주는 듯하다. 단순히 ‘대화’ 라는 유기적인 역사인식 보다 더 나아가 마치 역사가 우리의 식탁위에 놓여있다는 일상성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러한 느낌은 음식이 갖는 친밀감 때문일 것이며 삶의 현장이 곧 음식을 제공해주는 자연, 곧 현재의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그 공간과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의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과거의 거대한 정치적인 사건이 학습과 이성으로 그 심각성과 교훈이 전달되는 것과는 다른 이치이지 싶다. 단순이 요리의 레시피와 조리과정을 소개하는 요리책과는 다른 재미였다. 과장된 예가 되겠지만, 인간이 영양실조에 빠져 침대에 누워있다면 ‘역사’는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생물로서의 인간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그 에너지의 충족 여부에 따라 행동이 유발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음식의 역사가 여러 인간 역사의 한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

특히 식량(음식)이 인간의 생존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시기에 식량의 획득이야말로 인간 생존의 본질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인간의 역사가 음식의 역사와 동질적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좀 더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다양한 생존 요소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음식이 차지하던 절대적인 중요성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음식이 인간 생존의 수단인 이상 그 관계는 여전히 변함이 없으리라고 본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에 있어 음식이 미친 영향은 곧, 인간의 생물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하는 여러 단서들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목격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저자의 말」의 서두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음식의 역사』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간단한 주제를 다룬 선구적인 저작이다. 이 책을 쓴 목적은 인류의 3만 년 역사를 통하여 식생활의 특성을 형성해 온 영향 요인들을 조사하고, 보다 많은 양질의 음식에 대한 추구가 역사의 진행 방향에 때로는 결정적으로 또 대개는 미묘하게 작용하게 되는 경로를 쉽게 설명하려는 데 있다. 요컨대, 어떤 면에서는 음식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을 무엇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글을 읽는 내내 참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이를테면, 쟁기와 십자군 원정의 관계, 흑사병과 동물 쓰레기의 불법 투기, 인도인들이 암소를 신성시하는 원인등등 음식이 “역사의 진행 방향에 때로는 결정적으로 또 대개는 미묘하게 작용하게 되는 경로” 를 접하는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인간의 역사에 음식이 “때로는 결정적으로 또 대개는 미묘하게 작용해왔다면”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역사가 진행형이듯이 음식의 역사 또한 진행형이다. 저자의 말대로 “미래의 식량의 역할이 과거보다 덜 결정적이지는 않을 것”이기에 음식이 인간의 역사의 진행방향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작용을 하기를 바라지만, 음식과 관련하여 인간이 처한 현실은 다소 비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식량의 문제는 과거의 부족사회와 같은 국지적인 성격이 아닌 국가, 대륙, 지구적인 차원에서 발생하고 있다. 인종과 국가간의 교류가 증대함에 따라 그 규모는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후진국의 영양부족과 선진국의 비만이라는 극단적인 대비와 환경의 파괴에서 뚜렷이 볼 수 있다. 음식의 부패와 오염, 그리고 저장의 문제 같은 것이 아니라 음식 자체를 생산할 수 없는 어두운 현실에 직면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미래의 인간의 역사가 존재하는 한 그 변화의 저변에는 음식이 어떻게 자리할 것인지,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아닐까 한다.

책의 뒷표지에는 독자들의 시력을 측정하기라도 할 듯이 까만 바탕에 흰색으로 깨알같이 써놓은 아래의 질문들이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앞으로 해 나가고자 한다.


1. 인간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게 되었을까?
2. 사람들이 음식을 요리해 먹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3. 음식은 인구 증가와 도시팽창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새로운 쟁기가 어떻게 십자군 원정의 불꽃을 일으켰을까?

5. 인도인들은 왜 암소를 신성시할까?

6. 채소와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유목민들에게 왜 비타민 결핍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7. 센 불 위에서 프라이팬을 흔들면서 재빨리 볶아내는 중국식 요리법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8. 향신료를 찾아 탐험을 떠난 유럽인들이 어떻게 아메리카 주민들의 삶과 문명을 파괴했을까?

9. 통조림도 냉장고도 없던 시절, 몇 달씩 배위에서 생활하는 선원들은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10. 남아메리카에서 전해진 칠면조가 왜 ‘터키 닭’ 이라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11. 20세기초 영국의 징병검사에서 41%의 청년들이 병역부적합 판정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12. 식품판매업자들의 사기행위와 불량식품에 정부와 소비자들은 어떻게 대응해 왔을까?

13. 외국에서 들여온 값싼 농산물이 과연 자국의 식량 상황과 경제에 이익이 되는 것일까?

14. 식량 생산과 환경 파괴, 과식으로 인한 질병과 굶주림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 메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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