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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4 23:19

블로그 당분간 중단합니다!




이웃님들, 그리고 블로거님들 죄송합니다. 당분한 블로그를 중단하기로 하였습니다. 충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2개월 정도 블로그를 중단하고 자신을 더욱 냉혹하게 바라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블로그를 공개적으로 운영하지 않을 뿐 비공개적인 포스팅은 하고 싶습니다.  혹 rss를  통한 구독자님들께는 대단히 미안한 마음입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rss를 취소하십시오. 다음에 제가 돌아와 가치있는 포스팅을 한다고 판단되면 다시 구독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Mr.번뜩맨, Maro님, 초하님, 로망롤랑님, 명이님, freesopher님, 열산성님, inuit님, susanna님, 리브홀릭님, 러브네슬리님, cliomedia님,비트손님, 김치군님, 호박님, mindeater님, 미미님,  A2님, 김Su님, Future sharper님, rince님, Fallen Angel님, 백마탄초인님, Char님, Mr.Children님, 챈들러님, 신어지님, 시골친척님, 세담님, 펀펀데이님, 호박님, skyplot님, Dramatique Essay님,  도꾸리님, 베쯔니님, 고군님, ggacsital님, Bay님, a님,먹는 언니님,하얀 로냐프강님,w0rm9님,김진애님,사앙라이님, j4blog님, jjoa님, life is good님, 이해님, Make Your Life Happy님, moondog님,oddlyenough님, PLUSTWO님,plusone님,KeunNaRa님,차완무시님,살타래님,sleep Attack님,Slow Adopter님,pictura님,sujae님, Ikarus님,잉샨님,짠이아빠님,tasha님,결정적 순간엔 평상심, 독설닷컷님,근대사 박물관,LoveWish님,다희님,온누리님,채다인님,달빛새님,더필름보이 닭컴님,도아님,류토피아님,맛짱님,달려라 멀더님,미도리님,미쓰.문.님,반추사님,필감준수님,별바라기님,북대인님,붉은매님,비바리님,유주언니님,Ray님, 그외 알게 모르게 스쳐간 수많은 이웃님들......혹 이름이 빠졌을지도 모를 소중한 님들. 

그 동안 블로그를 하면서 오프상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소중한 시간을 일깨워 주신 분들입니다.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지치고 힘들었을 때 받았던 격려와 위안은 제겐 참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짤막한 지식이나 정보보다는 삶의 진솔한 모습들, 살아가는 모습들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는 추억들입니다. 지금껏 짧지 않는 삶을 살아오면서 비록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참 순박하고 진솔한 관계를 맺으며 가졌던 추억들은 흔하지 않았습니다. 블로그를 통해 너무나도 소중한 인간의 냄새를 맡았다는 것은 참 역설적입니다.

 그 동안 컴속의 나는 참 행복했습니다. 컴밖의 나는 참 그가 부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2개월 정도 블로그를 중단하고자 합니다.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새로운 만남을 기약하겠습니다. 다시 컴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동안 모든 이웃님들 건강하시구요, 항상 행복한 나날들 가지시길 바랍니다.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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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18:53

마음이 괴로울 땐...

이미지 출처: http://kr.blog.yahoo.com/gdy23



마음은 바다와 같아요. 언제나 잔잔하기만 할 수는 없거든요. 파도가 일기도 하고, 소용돌이 치기도 하고, 사납게 출렁이기도 하지요.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요? 언제나 평온이하기만 할 수 있을까요? 나의 소망은 그렇습니다. 언제나 평온한 마음을 갖는 거지요. 하지만 그런 소망은 언제나 깨어지기 일쑤 입니다. 

호수에 던지는 작은 돌이 파문을 일으키 듯, 마음에 던져지는 작은 돌에 마음의 파문이 크져 가기도 하지요. 태연한 체, 아무렇지 않은 체 해도 마음은 작게나마 출렁이지요. 마음은 그런 겁니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 관계 속에서 수 많은 오해들이 생기고 수 많은 갈등들이 생기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음에 떨어지는 돌은 수도 없이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관계를 끊고 살 수는 없는 거 잖아요. 관계를 끊는다는 말은 관계 속에 탄생하고, 관계 속에 놓여있는 모든 인간적인 조건을 거부한다는 것이지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성직자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수행승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관계를 벗어나기는 불가능 한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관계를 마음에 띄우는 배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배를 소중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서로 배를 타고 잔잔한 마음의 물 위를 쉬엄 쉬엄 저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배는 숭고한 관계로 만들어진 것이니까요. 이건 너무나도 어려워서 실천하기가 어렵기도 합니다.

또 있습니다. 시간에 맡기는 겁니다. 시간처럼 효율적인 약은 없다고 봅니다. 명상이나, 독서, 음악, 기도, 조용한 산책, 잠 같은 것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면서 바다는 잔잔해 지는 법이지요. 마음이 바다라면 그 변화를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단서가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에 돌를 던지지는 말자는 것입니다. 비록 고독하고 외롭지만, 때론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조용히 마음을 시간에 맡기는 것입니다. 

또 있습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쾌락하니 무언가 성과 관련된 것으로 볼 것 같은 데 그것에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흥겨운 시간을 가지면서 망각하는 것입니다. 음악, 독서, 영화 같은 것들은 시간에 맡기는 수단들과 중복되는 부분도 있네요. 이것들도 쾌락을 주기도 하니까요. 아무튼 술이나 춤 같은 쾌락은 약간의 후유증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효율적인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단 중독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방법이랄 수 있겠죠. 

  
이렇게 적고 있다는 것이, 아직도 삶이 혼란스럽다는 반증이겠지요. 마음이 괴로울 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삶 속에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뒤섞여 있지요. 일관된 삶의 신념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세속을 초탈한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기에 참 약하디 약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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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11 00:43

일본영화 음악 3곡(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오늘의 사건 사고, 도쿄 맑음)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18+>은 사회와 인간과 남성과의 관계에서 겪는 여성들의 마음 상처의 결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또 보여줍니다. 그리고 공감하기도, 때론 오해하고 소통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의 보편적인 삶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사건 사고>는 사라져 버리는 시간 속에 인간의 삶은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상적이거나 무덤덤한 사실들이 되기도 하고, 또 그러한 사실들이 서로 거미줄처럼 관계를 맺으며 사건이나 사고로 우리들의 뇌리에 박혀 듭니다. 시간 속에 사라져 갈 것들 이지만, 사라지는 시간들 속에 희미하거나 때론 짙은 흔적이나 인상을 남깁니다. 이런 우리의 삶에 대해 환기시켜 줍니다. <도쿄 맑음> 은 위 두 영화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독은 도둑처럼 우리의 삶 속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웃음을 앗아가고, 행복을 앗아가고, 소중한 기억들을 앗아갑니다. 대신 상실감과 공허감으로 메워놓습니다.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감정은 너무도 모순 투성이라서, 변덕스럽기도 해서 때로 설명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과학이 헤집고 들 수 없는, 이성이 메꿀 수 없는 모순의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Strawberry Shortcakes)




오늘의 사건사고(きょうのできごと, a day on the planet )




도쿄 맑음(Tokyo Biyori, 東京日和), 터키행진곡




도쿄 맑음(Tokyo Biyori, 東京日和), MihoKomatsu
영화제목과 동명의 노래로 감상하세요 




도쿄 맑음(Tokyo Biyori, 東京日和), Van Tomiko (伴 都美子)
영화제목과 동명의 노래로 감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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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9 02:27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誰も知らない)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 조금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언짢은 기분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이 영화를 보았으니 그러한 연관이 필연적인 것인지 우연의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겠지요.

그 언짢은 기분의 전말은 이러합니다. 11시 쯤 가족 모두가 잠자리에 다 누웠습니다. 잠들기 전에 보통 한 두 마디씩 하게 되거나 장난도 치는데 어쩌다 기독교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아마도 큰 아이가 저의 종교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어린 아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가는 기독교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아내와 생각이 달라 조금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러한 행위에 호의적인 아내가 못마땅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이 아직은 어리니 교회에 따라갈 필요는 없다. 좀 더 자라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아이들을 과자나 학용품등을 이용해 교회로 데리고 가는 선교 행위를 싫어했습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치하고 악의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종교란 어떤 비극적이거나 절망적인 인생의 경험 뒤에 찾게 되는 근엄하고 경건한  무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이끌고 선교를 시작한 나이도 30세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대상들도 주로 가난하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상처받은 어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맹목적이기 보다는 절실한 무엇이기에 적어도 성숙한 나이에 어울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직 자아 형성도 덜 된 초등학교 학생을 교회에 데려가 예수만을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살인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교도들의 구원이 절실할 것이고 저주 받은 인간을 살려내는 행위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선교의 대상이 나이에 의해 제한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면 구원받지 못하는 이교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기독교의 교리 앞에서 왜 신성함이나 두려움 보다는 어떤 속박감이 먼저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양자 택일의 강요가 너무나도 모진 이 기독교에 대해 우유부단해지는 제 자신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러한 선택의 강요가 너무나 모질고 확신에 차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러한 잡념 속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다 컴퓨터를 켜고 우연히 아무도 모르게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모태 신앙처럼 종교는 빠를수록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삶의 체험 속에서 신을 절실하게 찾게 되는 그러한 나이에 다다를 때가 좋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기독교를 꼭 믿으라고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영화와 기독교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물론 굳이 연결을 지으려면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만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기독교 운운하며 이 영화를 본 소감을 시작했을까요?


사진 출처  http://www.livedio.com/ImgPool/ImgPool.aspx?MediaID=693396


또 한 가지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훨씬 이전의 경험입니다. 지인과의 식사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아이들이 식당을 돌아다니려고 하기에 제가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납니다: “실내에서 남들에게 피해주지 말고 어른스럽게 행동해라!” 그런데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지인이 빙그레 웃으며 아이들에게 가능한 요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조금 부끄러워졌습니다. 정말 가능하지도 않는 요구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스러울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아이들이 어른스러울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들은 아이스러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에 대해 소감을 말하기 전에 이러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바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좀 과장이긴 하지만 인간은 아이와 어른으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든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어른은 아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언의의 유희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여자와 남자처럼 명확한 구분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른과 아이의 사이에는 시간의 연속성과 역사성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명확한 구분이 아니라 변화상의 구분정도가 가능할 수 있을 뿐입니다. 즉 편의적인 구분일 뿐이며 결국 아이는 어른으로 변화할 뿐인 것입니다. 아이였던 어른이며 어른이 될 아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아이의 시기를 경험한 어른들은 그 시기를 자주 망각합니다. 남, 여 간의 오해나 편견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다른 실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아이였던 어른들이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현실은 이 망각 때문이 아닌가도 합니다. 이 망각 때문에 우리 사회에는 아이들과 관련한 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모든 어른들에게는 아이일적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지만 정작 자기  주의에 존재하는 아이들의 세계에는 무관심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솔직히 우리에게 단절된 것은 아이와 어른의 세계가 아닌가도 싶습니다.

 
쿄코와 유키    사진 출처 http://www.joycine.com/service/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참 좋은 영화입니다. 잊고 있었던 아이들의 세계를 환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단절된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를 이으려는 진지한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의 자기 성찰을 진지하게 유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에서 어른의 존재가 없다면 아이들은 생존이 어렵습니다. 첨단 과학의 21세기에도 무기력하게 태어나는 인간은 원시인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아이와 어른들의 세계는 원시(자연)와 문명, 본능과 문화, 순수와 오염(타락), 환상과 현실등의 구분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인류 문명의 축소판이라거나, 문화의 창조적인 전수라거나 세속에의 적응 같은 알레고리로 파악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원시의 모습으로, 본능만으로, 순수하게만 살아갈 수 없도록 조직화된 세상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또한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의 세계(동심의 세계)가 필요한 것이 오늘날의 세계입니다. 문명과 문화와 순수함을 잃은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원시와 본능과 순수를 꿈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이와 어른은 공생의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아이들의 세계를 망각해버린다는 것은 어쩌면 끔찍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뿌리를 상실한 나무처럼 근원과 단절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이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과장된 것일까요? 결코 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는 단순히 ‘아이들의 세계‘ 만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영화 속의 4남매들처럼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눈물 없는 아이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영화 속의 아이들은 너무 어른스럽습니다. 따라서 아이들을 통해 망가진 어른들의 세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피가 다른 4남매가 그리는 비극의 세계는 어른들의 썩어가는 환부의 또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비극적인 실존을 통해 어른의, 더 나아가 문명과 문화와 타락의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세계와 관련해서 이점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떻게 아이들이 그토록 감정을 철저하게 절제할 수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일본인들의 특성을 잘 알지 못해서 그럴까요? 사실 일본인들의 감정 절제는 대단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속 다르고 겉 다르다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이들의 불행한 일상이 다루어진 <아무도 모른다>가 병들고 상처 입은 아이들의 세계를 강조하고 있지만 아이들의 세계 그 자체를 다루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감독의 의도가 의미심장하다고 하더라도 또 영화의 리얼리티가 그럴 듯 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와는 동떨어진 세계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른스럽기 때문입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세계가 있다’ 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어른들이 감정을 강요한 감정적 살인을 저지른 듯한 느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4년 칸느 영화제에서 영화제 사상 최초의 아역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훌륭한 영화입니다. 아마 <아무도 모른다>가 아니었더라면 <올드보이>의 최민식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우수한 영화입니다. 하드 보일드한 문체나 스타일이 예술적인 경향의 대세를 이룬다고 하지만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세계를 눈물 한 방울 없는 냉혹한 세계로 묘사한들 그리 탓할 일은 아닙니다. 앞서도 애기했지만 망각된 아이들의 끔찍한 모습들이 바로 우리 어른들의 모습임을 감독은 의도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돌아와 아이들이 환한 웃음을 짓게 되었다면 이 영화는 분명 실패했을 것입니다. 청중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스토리를 전개한다면 영화는 신선함이 없이 진부해지고 마는 것이니까요. 영화감독들이 고민하는 세계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일 것이니까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사진출처: http://www.myphototv.com/PhotoMagazine/


아이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몫입니다. 그들의 얼굴에 웃음을 돌려주는 것은 어른들의 책임입니다. 타락한 어른이 투영된 아이들의 눈물 없는 냉혹한 세계는 어린 시절의 상처와 고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어른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서로를 치유하는 방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에 의해 그들의 세계를 보호받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해 좀더 평화롭고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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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8 16:09

내게 남는 것 3가지



1.신은 일종의 인간의 한계, 즉 동물적 본성과 인간성(이성)의 모순적인 갈등을 극복하려는 변증법적인 현상 또는 이상태가 아닐까? 따라서 신은 인간 존재의 모순 자체가 그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닐까? 

2.무한한 우주를 보면 인간을, 인간에게서 나온 모든 것들, 어떠한 종류의 표현을 초월한 어떤 힘, 실체, 또는 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의심하기 힘이 든다.

3.이 정신적인 혼란을 떨쳐버리기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다.  이 혼란 속에서 나는 삶이란 것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남는 것은 의심 또는 변명, 확신 또는 두려움, 그리고 삶이다. 이래서 삶은 혼란스럽다. 그래서 단순해 지고자 하고, 단순해 지고 싶다. 삶은 모든 모순, 혼란을 안고 죽음의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그렇게 이어져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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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7 18:29

유대인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 적어도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유대인은 악마와 동일시 되었다.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대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먹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저주 받은 민족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유대인의 위상은 크게 향상되어 악마의 지위에서 탈피했다. 그러나 유럽인의 반 유대 감정은 너무나 뿌리가 깊어서 16세기 종교 개혁의 선봉자였던 마틴 루터조차도 그의 저서 <악마론>의 서문에서 "악마를 제외하고 가장 흉측하고 광포한 우리의 적은 유대인이다." 라고 서슴치 않고 단언할 정도였다. (이슬람, p.218. 이희수/이원상, 청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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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20:45

이명박 각하, 오바마와 형제 같습니다!

너무 감동을 받아 할말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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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6 18:52

주술 풀기와 걸기

이미지 출처: www.flickr.com  mark.os님


"서구적 합리성, 서구 과학의 패러다임과 자유의 개념은 모두 이 의존성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데에, 자연을(남성) 의지에 종속시키고 자연의 모든 주술적 힘을 풀어버리려는 데에 바탕을 둔다. 이런 맥락에서 영성은 '어머니 대지를 치유' 하고 세계에 다시 주술을 걸고자 노력한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유럽 합리성의 진전 과정의 필연적 소산이라고 본 주술 풀기(disenchantment) 과정을 무위로 돌려 놓자는 것이다. " (에코 페미니즘, 반다나 시바/마리아 미스, 창작과 비평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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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22:14

삶의 시기 구분

흔히 위대한 존재들의 삶의 기록을 대하다 보면 전기, 중기, 후기니 하는 시기적인 구분을 하는 것을 접하게 된다. 만약 나의 삶을 연대기상의 시기로 구분한다면 그 시기의 구분은 어떻게 가능할 것일까? 그러한 구분의 근거는 무엇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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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5 21:50

자연은 슬픈 목격자

나무를 보면 부끄럽다. 꽃을 보면 부끄럽다. 산을 보면 부끄럽다. 그들이 보는 가운데 인간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던가? 문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얼마나 거만하게 살아왔던가? 자연은 역사의 슬픈 목격자다. 나무에 가만히 기대어 그 슬픈 목격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미지 출처는 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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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4 23:16

일본의 원숭이 웨이터들


일본의 식당에서 웨이터로 활동하는 원숭이들(얏- 찬과 후쿠-찬)이 참 이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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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4 04:51

일본영화 음악 3곡(같은 달을 보고 있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무지개 여신 )

일본영화 음악 3곡입니다. <같은 달을 보고 있다> 은 참 매력적인 영화였습니다. 인간의 마음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의사의 매스가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만져지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사랑이란 감정이 표현된 예술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듭니다. 진관희를 보면서 연예인들의 사생활과 영화와의 관계를 조금 생각해 보게 했습니다.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는 약간 진부했습니다. 엇비슷한 주제에 조금 다른 의상을 입힌 듯한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록 진부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수긍해야만 할 우리 자신들의 내면의 풍경이 아닐가 합니다. 그래서 또 가치있는 것일 테구요. 아사노 타다노부의 개성적인 연기가 인상에 남습니다. <무지개 여신> 은 슬픈 영화이긴 하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영화였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영화 자체의 흠이라기 보다는 제 감수성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君のそばに, 久保田 利伸, 같은 달을 보고 있다 






Gravity, 라스트 라이프 라스트 러브






Rainbow Song, 무지개 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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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3 19:34

술은 아름답다.

모든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인식하는 바다. 모든 인간이 추잡스런 것은 아니다. 이 또한 상식적으로 인식하는 바다. 세상은 아름답다거나 추잡스럽다. 이 또한, 또한 상식적인 인식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서, 취하고서 인간을 비난하는 인간들, 세상을 추잡하다고 하는 인간들은 상식적인 인식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술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인간을 아름답게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욕이 필요하다. 세상은 delagatory words  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fuck you 가 필요하다. 그런데 또한 증오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세상이다. 세상을 욕하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라면!

소통을 거부하는 인간들을 나는 조소한다.  술을 마시고 소통이 불가능한 인간을 나는 증오한다. 술은 소통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통을 거부한다면 술을 마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 술을 마시고 소통을 거부하다면 그는 인간이 아닐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소통을 거부한다면, 순수한 마음을 되찾으려 하지 않은다면, 술은 마시면 안된다. 술은 그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어떻게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미워도 증오스러워도, 원망스러워도 세상은 내가 몸담고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나이게 하는 것은 세상이고, 그래서 나는 세상을 증오할 수가 없다.

술을 마시고 세상에 욕을 퍼부어라! 미친듯이 외쳐라!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지만 나는 안다. 그나마 그렇게 외치는 인간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술은 그렇다. 밖을 시끌벅적하게 한다. 그러나 속을 , 속을 아프게 하는 것을 진실로, 진실로 소통을 바라게 하는 것을! 이 진실이 없다면, 껍데기로 노딘다면 껍데기는 가라!


나는 술이 좋다. 술 그 자체가 좋다. 취하는 것이 좋다. 내 더러운 껍질을 벗겨내고 내 가식을 벗겨내고, 내 찡그린 표정을 벗겨내기 때문이다. 술은 취할 수록 좋다. 취하니 좋다. 내가 아니기에 좋고, 껍질을 벗겨놓기에 좋고, 흥겨웁기에 좋다. 나를 이 팍팍한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기에 좋다.

그래서 술은 아릅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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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02 18:19

위키피디아, 무엇이 문제인가!

위키피디아 열린 사전을 검색하다 보면 그 방대한 양과 질에 놀라게 된다. 인터넷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사이트 링크와, 꼼꼼한 참고 자료의 소개는 기존의 사전과는 다른 즉각적인 피드백이나 자료를 접할 수 있어서 너무나 좋다. 그기다 지속적으로 업데이트가 되면서 책과는 달리 낡은 느낌은 커녕 오히려 새로운 느낌 마저 든다.
 
그러나  위키피디아의 방대한 양에 비해 비록 둘러 본 양은 그리 많지 않지만 좀 이상한 점이 목격되어 그 명성이 과연 이름 값을 하고 있는지 다소 의문이 들었는데 한글과 관련이 있어 약간 씁쓸하기도 했다.


전세계 베트남어 사용자수 분포지도 



위는 위키피디아에서 캡처한 베트남어의 전 세계 분포 지도이다. 언뜻 보면 색깔상 베트남어가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나 곧 아래의 색깔에 따른 분포의 정도를 살펴보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이 분포 지도를 보면서 베트남어가 알래스카에 백만명 이상의 사용자(speakers)가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실상은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국 전역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놀라운 것은 고작 십만명 이상에 불과한 북미 캐나다와 호주, 그리고 프랑스 등을 그 국가 전체에 색깔을 넣어 너무 과장된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색깔에 따른 베트남어 사용자 수




알래스카의 총인구수와 인구밀도



미국의 베트남어 분포 정도의 표시에 한정하여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알래스카와 미국 본토를 합쳐 백만명 이상 사용자가 있는 국가로 표시하고자 하는 듯 하나 실제로는 알래스카에 베트남어의 사용자가 백만명 이상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베트남어의 분포를 좀 더 구체적으로 도시로 표기하지 않아 생기는 혼란이랄 수 있다. 알래스카의 인구가 68만 여명임에도 이를 확인하지 않은 검색자들은 알래스카에 백만명의 베트남어 사용자가 있다는 착각을 하기에 충분하다.  


이와는 달리 아래 위키피디아에서 캡처한  한글의 전 세계 분포 지도는 국가 단위가  아니라 도시 단위로 표시되어 베트남어에 비해 전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그 사용자의 수에 있어서도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아주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전세계 한글 사용자수 분포 지도. 도시 단위로 표시되어 있어 식별하기가 어렵다

 


베트남어 사용자수 분포 지도와는 달리 도시별로 작은 점만 찍어 놓고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위의 전세계 한글 분포도 지도는 어떻게 보이는가? 이미 살펴보았던 베트남어 분포도에 비해 그야말로 그 분포의 정도를 알아보기도 어렵다. 베트남어에 비해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이 분포되어 있는 도시들을 작은 점으로 표시해 놓고 있을 뿐이다. 만약 이것을 베트남어식으로 국가별로 분포정도에 따라 색깔을 넣어 표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베트남어의 분포 지도가 상대가 될 수 있을까? 한글 분포 지도는 아무리 보아도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한국인이란 민족적인 편견을 버리고 보아도 이건 너무나도 불합리한 모양새다.

이러한 실수는 단일한 편집인이 단일한 체계를 가지고 표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네티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생긴 실수 아닌 실수인 듯 싶기도 하다. 당연히 일어나는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용, 즉 정보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 형식의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서는 같은 범주(category)의 자료에 대해서는 동일한 표준을 설정하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누가 보아도 이토록 불합리한 지도가 위키피디아에서 검색되고 자료로 사용된다는 것은 사전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작지만 큰 흠이 되는 것이다. 



*위의 이미지는 모두 위키피디아에서 캡처해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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