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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31 17:33

재미있는 합성 사진 만들기





                         재미있는 합성 사진 만들기

①프로그램 다운  PhotoFunia(http://www.photofunia.com)
②적당한 얼굴 사진을 저장(500 kb이하, jpg,png.gif)
③위 사이트 홈에 있는 사진들 중에 하나 고른 후
④저장해 놓은 사진을 열고
⑤Browse 번튼을 누르면 끝.

한 번 해보세요, 재미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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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30 14:17

[꽁트] 신 벌거벗은 임금님




신 벌거벗은 임금님

-모두들 거짓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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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였으나 그다지 오래전 과거가 아닌 어느 적(2456년경)에,  한 임금님이 살고 있었다. 그 임금님은 젊은 시절 방탕하게 생활하였다.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여자를 탐했고 심지어는 아편과 마약을 하고 혼몽한 상태에서 온갖 종류의 엽기적인 일을 자행했다. 이를테면 인간을 똥통에 빠트린후 득실거리는 쥐들 사이에 밀어 넣기도 하고, 기름에 튀겨 벌레들의 먹이로 던져대기도 했다. 그는 이런 엽기 짓을 하면서 항상 괴성을 내질러댔는데 마치 쥐들이 찍찍거리는 소리와 흡사했다. 그렇게 방탕하고 엽기적인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아침 자고 일어나 보니 임금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누드우스 시바르호모우스 14세다. 애칭으로 누드 시발노르 왕으로 불린다.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의 아버지, 시발리우스 시발리네 3세(재임기간 2398-2455)는 무척이나 혈기왕성했다. 갑작스런 죽음이 그를 덮치리라고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시종들에 따르면 시발리우스 시발리네 3세는 아침부터 꽥꽥거리면서 폭식을 하고 마리 포르노네트 왕비와 씩씩거리며 정사를 즐겼고 이웃의 작은 나라로부터 거둬들인 조공을 허허거리며 둘러보았다고 한다. 그 조공의 80%가 왕실의 품위와 시설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그 항목 중에 하나를 들자면 150여 마리의 애완동물의 배설물 처리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150여 마리 애완동물은 왕궁 건물들의 서쪽 왕궁 전체를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별채를 따로 이름 지어 딴나리아라고 불렀다. 10%가 그 나라의 수도 조덴스덴에 있는 중앙정신병원에 지원되었으나 서민들의 치료비가 아니라 실상은 왕족들의 요양비나 치료비로 사용되었고 5%가 감옥의 유지비로, 남은 5%가 군대의 지원금으로 하사되었다. 시발리우스 시발리네 3세의 사망원인은 추측들이 난무하기는 하였으나 끝까지 밝혀지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시발리네가 마리 포르노네트의 배위에서 코를 박고 죽었다는 사실 뿐. 또한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신음 같기도 하고 모호한 대답 같기도 한 ‘으흐~~으으응‘ 소리였다는 것 뿐.


왕비 마리 포르노네트는 시발리우스 시발리네 왕의 시해 혐의를 덮어쓰고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녀가 마지막 남긴 말은 “시발리네는 죽지 않았다. 그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내 속에 영원히 살아있으며 나는 시발리네의 천국이다.” 그녀의 이러한 말은 끝까지 왕의 시해 혐의를 거부함과 동시에 자신의 신성을 주장하는 것이기도 했다. 만약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죽어서도 아니 되고 죽여서도 아니 되었다. 그녀가 곧 시발리우스 시발리네였으니 말이다.


마리 포르노네트는 시발리네 왕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의 누이이기도 한 따따날리아 황후였다. 말하자면 마리 포르노네트는 시발리네와 남매사이인 것이다. 마리 포르노네트는 거둬들인 국민 세금의 15%를 그녀의 품위 유지비에 충당할 정도로 호사스러운 생활을 했다. 백성은 그녀의 시종시녀들에 불과했다.


이런 시발리우스 시발리네와 마리 포르노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임금님이 바로 누드우스 시바르호모우스 왕이다. 시바르호모우스 왕은 아버지의 저속하고 야비함에 어머니의 허영심과 호색기의 유전자를 물려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기에 더해 엽기적인 잔혹함까지 더해졌던 것이다. 조덴스덴의 10%를 차지하는 왕궁에 머물면서 그가 하는 짓들이란 엽기적인 행각들이었으며 백성들과의 접촉이나 대화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에게 백성들이란 왕궁을 유지하는 일꾼들에 불과했다.


임금님이라고 하면 위엄있고, 근엄한 모습을 연상할 것이지만 시발리네나 마리와는 달리 누드우스는 전혀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야만에 가까웠다. 아무리 시발리네나 마리가 왕과 왕비로서 자격을 상실하고 있었지만 위엄과 근엄함만은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척은 했다. 그러나 누드우스는 위엄과 근엄함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생긴 것도 그에 걸맞았다. 다람쥐와 하이에나를 합쳐놓은 듯한 이상야릇한 동물을 연상케 했다. 누드우스는 마치 아프리카의 부시맨처럼 옷을 훌렁 벗고 왕궁의 실내나 정원을 돌아다녔으며 맨손으로 밥을 먹고, 팬티만 입고 집무실에 앉아 집무를 보거나 벌거벗고 바닥에서 자기도 했다. 심지어는 홀딱 벗고 찬란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춤을 추거나 자위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왕비인 까따리나 꼴리넬 몰래 근처에 있는 시녀들을 불러들여 부적절한 행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처있는 귀족이나 시종시녀들 아무도 누드우스가 벌거벗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도 함께 벗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잠시 왕비 까따리나 꼴리넬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겠다. 왕비 까따리나 꼴리넬은 마리처럼 사치스럽기는 하나 무기력한 여자였다. 까다리나는 더 넓은 왕궁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왕비의 방에 머물면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침대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뒤척거렸다. 그녀의 육중한 육체에서 가장 활기 있게 살아 움직이는 부분은 입이었다. 그녀는 입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무언가를 지껄여댔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녀가 엄청난 비만의 상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체중은 300kg에 가까웠고 살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혼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의 침실 공기는 언제나 혼탁했다. 입으로 쉴새 없이 침을 튀기며 솟아내는 말들과 아래로는 빈번하게 뿜어내는 방구가스와 트림으로 침실은 악취로 진동했다. 그럼에도 까따리나는 마치 삶을 포기한 흉측한 동물처럼 창문을 열어 공기 소통이나 햇빛 한 번 들여보내지 않았다. 삶을 포기한 한 마리의 거대한 그러나 불쌍한 야생동물 같았다. 이런 그녀에게 색녀라는 말이 붙은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침대에 누워있는 그녀 또한 누드우스 몰래 시종들을 침실로 불러들였고 시종들은 초죽음이 되어 나왔던 것이다. 심지어 몇 몇의 시종들이 질식사나 압사 당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누드우스 왕이 거구의 왕비 까따리나 꼴리넬 몰래 시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저지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 부적절한 행위를 한 시녀 중에 로라 리웬스키라는 러시아 출신의 시녀가 있었다. 리웬스키는 누드우스와 아주 잘 어울리는 시녀였다. 리웬스키는 개인적인 야심이 남달랐다. 그기다 까따리나 왕비에게 압사당한 한 젊은 시종과 내연관계였던 리웬스키는 왕비에 대한 복수의 염을 품고 있었다. 실제적인 권력과 애인의 복수가 동시에 리웬스키의 깊은 감정의 골속에 꼭꼭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떻게 하던 왕비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리웬스키의 모의와 관련해서는 독립된 글 을 써는 것으로 하고 여기에서는 멈추어야 겠다.


누드우스 왕의 기행은 성적인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행이 아니었다. 누드우스 왕은 집무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각종 서류들로 똥을 닦거나 코를 풀어 그것을 시종에게 씹어 먹도록 했다. 그런 서류들 중에는 서민들의 호소문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런 이유로 귀족들 사이에서는 백성과의 소통을 넘어 소화를 시키는 정도라는 우스개가 떠돌았다. 누드우스 왕에게 백성 따위는 그의 왕국을 지탱하는 부속물이거나 기계 장치에 불과했기에 형식상 백성들의 호소를 들어주는 척을 했지만 그 호소문들은 주로 화장실의 휴지로 사용되었다.


백성들은 화가 났다. 쇠락해가는 왕국을 지켜보면서 최악의 왕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횃불을 들고 왕궁의 담벼락 아래에서 “벌거벗은 임금님 옷을 입어라!” “야만의 임금님, 옷을 입어라!” 하고 목이 쉬도록 외쳐대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화살과 창이었다. 때로는 뜨거운 물을 붓기도 했다. 성의 담벼락은 점점 더 높아져 감옥 같은 모습이었다. 이것에 백성들은 누드우스의 담벼락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항의도 위축이 되었다. 누드우스 왕의 막강한 친위대가 조덴스덴 전역을 돌며 불평 불만자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들였다. 이것을 백성들은 쥐도 새도 모르는 조덴스덴의 비극으로 불렀다. 조덴스덴은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조덴스덴의 인구가 120만이었으나 누드우스의 친위대가 휩쓸고 간 바로 직후에는 인구가 892,560명으로 줄어들었다. 감금과 추방과 행방불명이 그 주된 원이들이었다. 때문에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지는 못하고 화병이 되거나 아니면 생각을 포맷해 버리는 체념과 자조의 상태로 빠져들었다. 왕실을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누드우스 왕에게 옷을 입히려는 백성의 가련하고 안타까운 기대는 먼 하늘을 나는 불길한 블랙 버드가 되고 말았다. 파랑새는 아예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전 세계로부터 ‘누드우스의 왕국은 벌거벗은 임금님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왕국’ 이라 놀림을 받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고 조롱하거나 희화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지배하는 벌거벗은 나라의 벌거벗은 백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누두우스 왕은 벌거벗고 있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딴청을 피웠다. 그는 진정 벌거벗은 자들은 비록 옷을 걸치고 있지만 사실상 옷 같지도 않는 옷을 걸치고 있는 타인들이며 그들이야 말로 야만인들이라는 궤변을 토해내었다. 그는 인간만이 걸치고 있는 그 위선의 옷을 벗어버린 것이 뭐 잘못되었냐고 항변까지 했다. 그래 벌거벗었는데 배 한 번 째보시지! 하는 투였다.

“너희 가련한 백성들에게는 내가 벌거벗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가? 마음의 문을 열어라! 본능의 문을 열어라! 진실의 문을 열어라! 양심의 문을 열어라! 그러면 이태리의 고급 원단보다도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용의를 입고 있음을 알게 되리라!”

“너희들이야 말로 벗고 있다. 옷을 입고 있되 옷 같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다. 그런 따위의 옷을 입고 입었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벗어라! 벗어라! 벗어라! 그리고 크게 웃어라! 그러면 입을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벌거벗은 임금님, 옷을 입으세요! 하고 아무리 외쳐보아도 되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 그 현란한 궤변뿐이었다. 누드우스 왕은 위선의 옷을 벗어던졌다고 강변하지만 같이 벗고 있는 귀족들은 침묵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야만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한탄했다.(*)  (2008.7.30.12:45)

이미지출처: http://kr.n2o.yahoo.com/NBBS/1

신 벌거벗은 임금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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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9 23:20

[한 그릇] 카레 낙지 볶음



                       
                      카레 낙지 볶음

카레 삼겹살을 소개한 적이 있죠. 느끼한 맛에 개선의 여지가 있는 요리(?)였습니다. 느낌상 양념 삼겹살과 카레가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하고 이번에는 양념 삼겹살 카레를 준비하기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는데......오늘 낙지 볶음을 먹을 기회가 있어 카레와 한 번 섞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낙지 볶음이라면 카레와 제법 어울릴 법 해서  시도해 보았습니다. 카레를 낙지볶음의 매운맛을 순화시키는  소스로 말입니다.(카레는 시간과 비용관계상 3분 카레를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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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떨가 해서 구운 두부도 올려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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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식후기

기존의 익숙한 미각의 입장에서 보면 카레의 맛과 낙지 볶음의 맛을 동시에 잃은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미각의 차원에서보면 아주 새롭고 독특한(?) 맛이었습니다.  카레도 아닌 것이 낙지 볶음도 아닌 것이 요상스런 맛이었습니다. 상상이 가시죠. 생각컨데, 낙지 볶음의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에게는 부드러운 맛으로 전해 질 듯 합니다.


검색후기

설마 카레 낙지 볶음이 있을까 하고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고 검색을 했는데, 허걱~~ 카레 낙지 볶음이 있네요. 또 허탈 합니다. 새로운 음식 한 번 만들어 보려고 발악(?)에 가까운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라니  @@

서연맘님 블로그 (http://blog.naver.com/8292ilsun/80023448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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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체통(3)




무사의 체통(3)

― 누구의 사랑이고 명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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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士の 一分>의 영어 제목 <Love and honour>은 영화의 내용을 왜곡하는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제목 <무사의 체통>이 영화의 내용에 적확하다고 여겨진다. 영화의 내용으로 볼 때 사랑은 무사의 명예(체통)에 종속되기 때문에 그렇다. 일본의 전통적인 미덕을 love 와 honour라는 단어로 소개하려고 한 듯 하지만 기실 영어 단어 love와 honour의 의미를 변질시키고 왜곡시킨 일면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의 영제를 <Love and honour>라는 기만적인 미화보다는 일본어 제목과 마찬가지로 사무라이라는 한정사를 붙이는 것이 보다 솔직하다고 본다. 그것은 ‘사무라이의 사랑이고 명예’ 이지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이나 명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냐 무사의 사랑이냐를 떼어놓고 볼 때, ‘무사의 관점‘ 에서 보는 사랑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좁게는 한 개인으로서 사무라이의 사랑과 명예에 대한 태도일 수 있으나, 좀 더 공간을 넓혀 보면 의미 또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고한 계층질서에서 <남, 녀 간의 사랑>이란 감정이 주변으로 밀려난다는 의미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고, 또는 사랑과 명예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때 사랑이 무사의 명예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 더 넓게는 국가주의에 부속화 되는 개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무력에 압살당하는 사랑(일본군국주의에 희생당한 위안부 할머니처럼)의 일그러진 모습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무사의’ 라는 한정사는 내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영화 <색계>의 예를 잠시 빌려오면, 이 영화는 사랑과 애국이라는 선택에 흔들리는 한 개인의 감정, 특히 한 여자의 감정이 밀도 있게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이안 감독이 집단이나 국가 이전에 사랑이라는 한 인간의 감정을 유연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다고 애국과 민족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매국을 두둔하는 것도 아니다). 애국(민족, 국가)라는 중력과 개인의 일탈적인 힘이 부딪히면서 동정과 이해, 공포와 용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간들의 약한 모습이고 단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할 수 없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무사의 체통>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명예가 존중되는 국가주의나 군국주의의 초개인적인 냄새만을 맡을 수 있다. 마치 심오한 무언가가 있는 듯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맹목적인 개인과 개인들이 집단(사무라이, 더 나아가 국가)의 중력에 흐물흐물 떠다니고 있는 것이다. 신파조의 사랑타령이 조금 등장하기도 하지만 양념일 뿐 오직 하나의 중심에 수렴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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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무사의 명예에 사랑을 주변적인 것으로 종속시켜버린 다는 것은 사무라이 영화의 당연한 특성의 일부로 전통적인 미덕이나 영화 자체로도 사무라이의 남성성을 멋지게 드러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무서운 일면을 뿌리 칠 수가 없다. 무사와 칼에 여성과 사랑이 종속된다는 것은 아무리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인류 보편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일본의 과거도 미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역사의 경우도 가족을 몰살하고 전쟁터로 나아가는 장군의 이야기나 다소 성격을 달리하긴 하나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이 그러한 예로 들 수 있다. 칼과 무사, 사랑과 여성을 좀 더 단순화해서 인류 보편적인 상징으로 표현한다면 여러 가지 추상적인 단어들과 구체적인 존재들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중심주의, 가부장제도, 부자유와 복종 등의 단어들이 아닐까 한다.

장님이 되어버린 한 가난한 무사의 체통과 권위주의 아래에 사랑, 헌신, 봉사가 종속되면서 순수하고 희생적인 의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면 인간의 관계는 얼마나 삭막해질 것인가? 아니 삭막한 정도가 아니라 관계 자체가 두절되고 파괴되면서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며 비상식적인 어두운 통로들만이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닐까? 바로 남성중심주의요, 가부장제도이며 부자유와 복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아무리 무사도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고 해도 영화에 나타나는 남성중심주가 미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사도는 일본 군국주의의 실체였으니 말이다. 이러한 무사도가 <love and honour>라는 이름으로 그럴듯 하게 포장되고 상품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21세기의 일본 영화에 아직도 이러한 사무라이의의 전통적인 미덕이 칭송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 일본인의 마음에 내재에 있는 의식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랑보다도 사무라이의 명예를 추켜세우는 것은 결국은 국가에 종속되는 개인과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로 확대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해석이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의 독도 문제를 보면서 영화와 현실이 별개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미지출처: http://kr.blog.yahoo.com/iamji
                 http://kr.news.yahoo.com/ser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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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7 23:43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기이한 만남과는 달리 헤어짐의 담담함은 이 영화의 처음이자 끝이며 그 메시지가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예상치 않게 만난 예상치 않은 존재는 우리의 일상에서 벗어나 있지만(숭고함에 가까운 감정이던 호기심이던), 헤어짐은 이러한 만남과는 달리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통속적으로 보여줄 뿐이다(일순간의 동정이었을뿐). 꿈에서 깨어나는 아쉬움이라고 할까? 끝까지 조제를 책임져 주길 기대하는 우리의 상상적인 기대를 여지없이 배신해버리기 때문이다. 숭고함(또는 호기심)이 일상의 것으로 추락할 때 우리의 실망은 얼마나 클 것인가? 그러나 또 우리가 인정해야할 우리의 일상이기에 우리는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의 변화에 솔직해 진다는 것은 일상으로의 귀환이며, 의지는 또 다른 숭고함인 것을...... 조제의 삶을 책임지리라는 확고한 의지가 없다면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사랑은 휘발성이 강한 일시적인 사랑의 감정일 뿐이다. 아니면 동정이거나. 코네츠는 의지가 아니라 감정을 선택했다. 비통할 정도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코네츠의 가슴처럼이나 이 둘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가슴도 마찬가지긴 하다. 이 영화의 결말과 ‘영화가 끝난다는 사실’은 함께 이제 우리는 과장된 감정을 훌훌 틀어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인간적인 감정의 솔직함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엇으로 불리울까.



1.사랑의 감정들


<오아시스> 와 <나쁜 남자>의 경우. 이 영화 내내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떠올랐다. 아마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영화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물론 오아시스의 주인공들은  둘 다 사회로부터 정신적 육체적으로 소외된 인간들이다. 그들의 관계에 ‘사랑‘이란 진정성의 무게를 두고자 할 때,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으로 작용한다. 영화 내내 보는 이들이 부끄러웠던 것도 그런 진정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잘 들어맞는 한 쌍이었고. 그것은 어느 일방의 동정심에 근거한 관계가 아니라 가식 없는 ’진정한 사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작 우리에겐 그런 진정성에 우리를 투신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그 대상을 파멸시킬 수 있을까? 대상을 파멸시키는 <나쁜 남자>의 그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은 그 모든 것조차 초월하는 것을 김기덕 감독은 보여주는 것일까? 한 여자를 덫에 걸어 자신의 옆에 애완동물처럼 두고자 하는 것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 아니면 나쁜 남자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영화임에도 내가 사랑이란 말을 잘못 갖다 붙이고 있는 것일까? 오아시스와는 달리 <나쁜 남자> 에서의 남녀의 관계는 부담스럽고 껄끄럽고 낯설기만 하다.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런 관계의 설정에서부터 <나쁜 남자>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하 <조제~>표기) 은 흡사하며 그 감정의 처리 방법에서도 흡사한 측면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감정에 솔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향은 극단적으로 다른데, 나쁜 남자가 감정을 폭력의 단계까지 극단적으로 과장하면서 끌어올리는 반면, <조제~’> 는 감정의 변화에 솔직히 반응하면서 감정의 가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제를 포기하는 것도 실상은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조제~>에서는 감정이 가변적이고 일시적이며 자연스럽다는 전제에서 감정을 쉽게 놓아버리지만, <나쁜 남자>에서는 강렬한 일시적 감정의  절대성을 포착하여 그 감정을 극단으로 수렴하는 병적이고 집착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가 감정에 솔직해 진다고 했을 때 <나쁜 남자>‘나 <조제~> 는 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진정성일 수 있다. 그러나 <조제~>에서의 코네츠의 사랑의 감정은 동정심에 가깝고 의지적이다. 이러한 감정은 의지가 약해질 때 더불어 약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나 있다. <나쁜 남자>에서의 사랑의 감정 또한 강렬하며 의지적이긴 마찬가지다. 다른점이라면, <조제~>에서의 동정심에 가까운 의지적인 감정이 쉽게 포기되는 반면, <나쁜남자> 에서는 감정대로 이루려는 의지가 너무나 강력해 조금도 약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폭력과 억압에 가까운 감정이 되어 상대를 파멸시킨다(이것에 진정성이란 이름을 달기에는 왠지 끔찍한 느낌이 들기는 한다.) 아마도 김기덕의 의도가 일반화된 사랑의 감정을 낯설게하기겠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사랑의 진정성과는 솔직히 거리가 멀다. 낯설고 도발적인 사랑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 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별스러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겠지만......사랑은 이럴 수도 있다는...... 감정에 솔직해 진다는 면에서 <조제~’>와 ,나쁜 남자> 는 서로 극단의 방향이지만 동질성을 나타낸다. 



2. 사랑과 동정의 사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사랑은 무엇인가? 일시적인 감정인가?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감정이 촉발시키는 행동인가? 그 어느 것에 사랑의 이름을 붙이던 개개인들의 정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존재하는 인간만큼의 사랑에 대한 정의들이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의 정의는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사랑이란 전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인 관계인 경우는 어떤가? 코네츠처럼 정상적이고 여자들에게 인기있는 대학생과 출생도 불분명한 뇌성마비인지 병명조차 모르는 장애인인 조제의 관계말이다. 코네츠의 조제에 대한 감정은 일시적인 감정일까? 지속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감정을 초월한 어떤 것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영화의 파국으로는 판단해 보면 분명 일시적인 감정이다.  그렇다면, 코네츠의 감정에 사랑의 라벨을 달아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랑에 ‘일시적인’ 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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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5 12:53

쥐잡기 운동

먹을 것이 부족하던 과거에 쥐는 주식을 축내는 도둑이었고,
의약품이 부족하던 과거에 쥐는 역병을 돌게하는 더러운 존재였다.

경제가 발전해 먹을 것 걱정없는 이제,
의학이 발달해 쥐가 옮기는 전염병이야 쉬 고쳐지는 이제.
문득 쥐들은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
쌀뒤주를 갉던 그 쥐들 사라졌지만
그 유전자를 고스란히 이어 받은 오늘날의 쥐들은
여전히 세상속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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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잡기 포스터 그리기 대회 입상자 수상 이미지 출처:http://wow.seoul.go.kr/wow/pho[원출처:서울시 언론담당관, 촬영일:197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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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잡기 운동 대책회의 이미지 출처:http://wow.seoul.go.kr/wow/p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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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http://kr.fun.yahoo.com/NBB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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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http://kr.fun.yahoo.com/NBB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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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kr.fun.yahoo.com/NBBS/n

쥐는 쥐덫, 쥐끈끈이,쥐약 심지어 방망이로 잡았다. 학생들은 쥐를 잡아 그 증거로 쥐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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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를 잡던 방망이의 이미지가 없어 야구방망이 이미지를 사용했다.(야구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미지출처:스포츠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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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눈에 보이는 실리를 위해 조심없이 덤비다 화를 자초한 쥐들. 눈에 보이는 실용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가치들도 아주 중요하다는 교훈을 깨우쳐 준다. 이미지출처:http://kr.fun.yahoo.com/NBB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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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http://kr.blog.yahoo.com/kim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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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kr.fun.yahoo.com/NBB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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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www.HANK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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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들이 큰소리를 쳐대는 요상한 세상 이미지출처:한겨레 신문



이제 쌀 뒤주도 옛 것으로로 사라진 지금 뒤주 대신 쥐들은 무엇을 노리고 있을까요.
이제 뒤주를 대신하는 것들이 무엇이던 간에 우리 마음 속 뒤주를 꼭 쥐들로 부터, 수퍼 쥐들로부터,
인간의 모습을 한 신종 변형 쥐들로 부터 지켜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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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kimho



소중한 우리의 마음 속 뒤주 예날의 그 소박한 쥐들이 아닌 교묘하고 영악한 쥐들로부터 우리가 지켜야 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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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4 22:05

대구 스파밸리의 추억

대구 스파밸리의 추억

지난 12일 대구 스파밸리를 다녀왔습니다. 아이들이 참 좋아하더군요. 저야 뭐 블로그에 사진 남기는게 우선이라 사진부터 찍기 시작했는데 이런, 이런 수영장에서 방수 안되는 사진기를 들고 다는 것이 참 한심한 몰골이더군요.  남들은 다 방수용 비닐 케이스를 다 들고 사진을 찍는데, 어휴~~ 제 사진기는 제가 실수로 밟아버려서 버튼 부근이 꽤 벌어져 있어 방수용 케이스가 꼭 필요한데도 말입니다.

하여, 사진이라고는 물에 들어가기 전에 고작 외곽에서 찍은  몇 장  뿐입니다.

아직도 워터 슬라이드의 기억이 생생하네요. 아래 사진들중에 뱀처럼 꾸불꾸불한 슬라이드가 있는데 흰색이 튜브를 타고 슬라이딩을 하는 튜브 슬라이드이고 파란색이 바디 슬라이드 입니다. 바디슬라이드를 하면서 선글라스는 수영복 주머니에 손으로는 구명조끼를 잡고 있었는데 원통속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입수하는 순간 뒤집혀진 체 허우적거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애들도 하는데 아이 쪽팔려~~ 아마 제 달팽이관에 좀 이상이 있는 모양입니다^^)

자주는 아니라도 가족들과 함께 가끔씩이라도 여행도 떠나고 자연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이번 여름에는 이런 시간을 가끔씩이라도 가져야 겠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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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탑같은 게 동양 최고의 높이라는 스피드 슬라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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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색이 바디 슬라이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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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주말인 탓에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오전에 도착해서 찍은 사진이라 사람들이 그다지 많아보이지는 않는군요. 오후 2시(?)가 넘어서자 사람들이 산해를 이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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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23 00:09

카레 삽결살



카레 삽결살 

얼마전 카레와 토스트를 섞어서 카레 토스트를 만들면서 카레를 더 다양한 소스로 이용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고 삼겹살과 카레를 합쳐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의 음식 문화는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음식 찌꺼기가 너무 많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겹살 카레라이스나 비빕밥과 같이 반찬이 필요없이 한 그릇으로, 한 접시로 먹을 수 있는 다양한 음식이 많이 개발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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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 삼겹살을 완성하고 나서 밥을 곁들여 삼겹살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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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식후기

한마디로 실패였습니다. 삼겹살의 고소한 맛이 사라지면서 카레와 섞여 느끼한 맛이 났습니다. 그러나 의미있는 실패라는 생각이 듭니다. 고추장으로 버무린 불고기 양념 삼겹살을 이용한다면 느끼한 맛을 가시게 하면서 고기의 맛이 살아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면서 카레 소스의 향도 유지하는... 아무튼 그릇 하나에 한끼의 맛있는 식사가 될 수 있는 퓨전 음식이 탄생했으면 좋겠습니다.  



검색후기

블로그에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카레를 검색하다가 나자빠지고 말았습니다. 더욱 더 리얼한 카레 삼결살이 있었거든요. 그것도 한 4개월이나 먼저 말이에요. 삼겹살 3종세트(블로그명:오늘도 행복합니다. 열산성님)라는 글인데 너무너무 좋은 요리라 제가 완전히 삶이 허무하고 허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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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8 00:18

카레 토스트





                          카레토스트

블로깅을 하면서 네티즌 분들에게 무언가 관심을 끌만한 아이템이 없을까 하는 생각이 약간은 강박(?)이 되어 버린 듯합니다.  직장 그만두고 광고도 실고해서 블로깅으로 먹고 살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광고 클릭 횟수는 블로그의 질과 비례하겠죠. 길을 가다가도, 자다가도, 화장실에 앉아서도......블로그에 올릴 만한 게 뭐 없나 찾게 되었습니다.

이 카레토스트도 그러한 노력(?)의 결실입니다. 토스트를 먹다가 남아있던 카레를 토스트 위에 부어 보았거든요. 시중에 이런 음식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솔직히 순수한 저의 독창적인 푸전 음식입니다.  제법 먹을만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만들어 드셔보세요.

이렇게 해서, 카레를 좀 더 다양하게 이용할 수 없나 고민중에 있습니다. 다음에는 삽겹살 위에다가 양껏 쏟아 부어 볼까 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좋은 아이디어 있으시면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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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7 19:28

그 참을 수 없는 본능의 질주





 

 

그 참을 수 없는 본능의 질주


인간에겐 아주 강렬한 동물적인 욕구들이 있다. 바로 성욕과 식욕이다. 성욕을 좀 고상하게 말하자면 종족 보존의 욕구이며 식욕은 개체 유지의 욕구이다. 인간이 동물인 이상 이 두 가지 욕구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욕구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는 이면에는 절제의 언어가 스며있어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본능적인 욕구가 자연스러움을 이탈해 탐욕이 되어버린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쉽다. 사회적인 병리 현상이 이러한 탐욕에서 기인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능의 굴레를 끊어버리기 위해 종교에서의 신적인 비약을 위해 노력하는 성직자들과 승려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존경받고 감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이들에게조차도 이러한 욕구에 대한 번뇌와 유혹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동물로서의 인간의 단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상상키 어려운 자기 절제와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속의 범인(凡人)들이 이루기에는 정말이지 고통스런 노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신성(神性)으로의 비약을 꿈꾸는 그들과는 달리 범인들의 세속은 그야말로 동물성(動物性)으로의 하향적 추락들이 광범위하게 확대되고 있다. 교회의 수와 세속적인 탐욕이 정비례 하는 관계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면 과장일까? 경건하고 단순한 종교적인 삶보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삶이 보편화 된 것은 종교조차도 제어할 수 없는 인간들의 동물성이기 때문일까? 속단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세속의 여러 현상들을 보노라면 그러한 추측 또는 생각이 쉽게 싹튼다. 교회의 십자가만큼이나 성욕과 식욕의 탐욕적인 팽창의 물증들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성욕에 대해 말하자면 연령이 낮아지고 광범위하게 퍼진 10대 매춘, 소위 원조교제가 그렇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어서는 러브호텔이나 모텔등 숙박업소들의 난립이 그렇다. 성욕의 대상과 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식욕에 대해 말하자면 우후죽순처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밀집되고 있는 식당들이 그렇다. 특히 도시의 근교나 농촌, 그리고 관광지 주변등에 난립하는 무수한 식당들은 식욕을 위해 자연이 황폐화되는 생존상의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식욕을 위해 자연이라는 생존의 공간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식욕을 채워야 하지만 동시에 생존의 공간으로써의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식당이 취급하고 있는 음식을 보면 식욕의 대상 또한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한 소고기와 돼지고기에서부터 개고기, 흑염소, 뱀, 개구리등 온갖 동물들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성욕과 식욕은 그 물리적인 강렬함과 빈도는 확인 할 수 없으나 낮아지는 연령과 숙박업소와 식당의 난립으로 환경보전과 교육적 차원에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이 인간들의 동물적인 성욕과 식욕은 너무나도 강렬하여 도시계획의 불균형과 자연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다. 최근에 문제시되고 있는 러브호텔의 신축은 성욕이 도시 기능의 마비를 초래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되는 것이다. 즉, 학교와 러브호텔의 공존은 모순의 공간을 잉태하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를 일종의 유기체로 볼 때 병적인 징후가 아닐 수 없다. 인간들의 성욕과 그것을 이용한 탐욕이 조금은 자제될 수 있다면 이러한 현상은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상업주의와 성욕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확인해 주기도 한다. 성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 축적의 모범(?)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성욕을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의 기능들이 창출된다. 사실 성욕은 창조적이고 예술적인 방향으로 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승화를 촉진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승화의 결과로 도시 곳곳에 도서관들과 박물관 그리고 미술관 등 문화, 예술적인 공간들이 많이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흥적이고 일시적인 성욕의 해결은 그러한 목적을 위한 러브호텔과 같은 숙박업소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욕과 식욕의 절제가 자연 보전과 도시 생활조건의 개선을 가져온다는 것은 과장된 논리가 아니다. 도시의 구조적인 불균형과 자연파괴를 막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도시의 구조적, 정서적인 불균형이란 주거지와 학교에 모텔이나 러브호텔등이 들어서는 등의 모순적 공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순되는 것들의 혼란스러운 공존은 조화로운 삶의 질을 깨트린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또한 자연 속에 그럴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화려한 식당들은 식욕의 찌꺼기들을 끊임없이 방류하여 자연을 파괴하는 한 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성욕과 식욕이 조금이라도 절제되어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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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4 19:08

[꽁트] 이혼, 그 욕망의 그늘







이혼, 그 욕망의 그늘


존재가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머리가 부서질 정도로 괴롭다면 생각을 멈추는 것이 낫다. 잠시 생각을 멈추었다고 해서 존재가 아닌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주장할 작정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멈춘다. 그래도 나는 존재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머리는 너무 작다는 자책은 언제나 나를 괴롭힌다. 사실 ‘할 일’ 이라고 표현했지만 주로 정신적인 노동(?)에 국한된다. 이를테면, 머리를 깎고 절로 들어갈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콩트 습작에만 미친 듯이 빠져들거나, 주식 투자로 수지를 맞거나, 놀면서 먹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거쳐 결국 무능력을 인식해야 하는 작은 머리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지는 그런 공상들 말이다. 또한 작은 머리에도 화가 치미는데 거느리고 있는 식솔들이 작은 머릿속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이런 족쇄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더해지는 것이다. 이런 꿍꿍이속을 알기라도 하는지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절묘한 타이밍으로 바가지를 긁어대고 쌍둥이는 쌍둥이대로 공상의 자유로움에 앙앙거림을 투하해대니 하루하루가 불협화음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직장 일을 핑계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방구석에 앉아 사각의 천장을 그저 말똥말똥 쳐다보거나 컴퓨터를 켜고 콩트랍시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노라면 도피인지 바램인지 공상은 시작되는 것이다.


[직장을 때려치워......그럼 무슨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려......인생은 이래도 저래도 굴러가는 것 아냐......자유롭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거야, 박제는 자유의 상실이지, 날아오르는 거야......헌데 콩트는 아무나 쓰는 게 맞아, 아냐......뭐 지금부터라도 습작을 시작하는 거지......콩트는 내 체질에 맞는 것 같아. 그다지 심각한 무게에 눌리지도 않고 스케일에 억압당하지도 않고......난 말초적인 인간인가......그래도 대하 꽁트나 꽁트 전집 만드는 거사를 한 번 시작해 보는 건 어때, 만들면 되는 거 아냐......시장에서 붕어빵을 파는 건 어때......자유가 있어 좋지 않아......그리고 밤엔 미친 듯이 콩트를 습작하는 거지......재미있지 않을까......콩트의 소재도 더 얻을 수 있을 거고......글이란 게 그저 머리 속에서 나오는 게 아니잖아 발로 뛰어야지. 헌데 난 지금껏 발로 뛰어 쓴 글이 하나도 없잖아......헌데 붕어빵 장사는 잘 될까. 아이들은 어떻게 하고......우유값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이런 식이다. 이러면서 현실과 공상 사이에서 마누라와 쌍둥이의 채찍질이 더 보태져 삐꺼덕 소리는 커져만 가는 것이다. 현실과 공상사이의 이빨은 어긋날 대로 어긋나 이럴 때면 돈 많은 과부나 하나 낚아 놀고먹으면서 살고 싶은 욕구도 커지고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 의, 식, 주 구애받지 않으면서 살아가고도 싶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불면증까지 얻어 시달리다 보니 마누라의 은근한 재촉에도 지친 심신 탓에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고 아이들의 보챔이나 투정에는 짜증을 앞세우고 직장에서는 토끼 눈처럼 빨갛게 해 가지고는 졸기가 일쑤이니 단골 지적 대상으로 정리해고 1순위이고, 뻔한 일이지만 일의 능률은 더 떨어질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바닥을 친지가 오래건만 상승 기류는 전혀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이다는 말은 누군가의 말장난이란 걸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이 나는 현실과 공상의 끼인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못난 인간이라고 되뇌어보기도 하고, 미친놈이라 입 주먹질을 해보기도 하지만 바람난 년 작심삼일이듯 허파에 든 바람은 빠져나가질 않는 것이다.


           

설상가상 마누라가 떠난 것이다. 종이쪽지 한 장과 쌍둥이와 나만을 남겨 놓은 채 말이다. 그것은 설거지가 나의 독차지임을 의미하고 현실과 공상의 줄타기를 하던 내가 현실 쪽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쌍둥이를 먹여 살려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인 셈이다. 나의 공상 속에 이런 류의 공상이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마누라가 언제나 나를 견뎌 주리라는 기대는 참으로 이기적이었다. 관찰컨대, 마누라는 잘 견디는 듯 했다. 나의 무기력한 공상 놀음에도 잘 적응하면서 그녀 자신은 현실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육아와 교육, 의, 식, 주의 가사일과 허드렛일, 때로는 부업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인 삶 속에서 무언가 이루어 놓으려 발버둥치는 듯 했다. 간혹 마누라와 대화를 하는 경우, 그녀는 미래의 장미 빛 목표를 위해 어떻게 현실적인 계획을 설계하고 통제해야 하는지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듯 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돈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마누라는 효율적인 돈의 소비를 통해 저축하는 것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았다. 미래를 담보한 최선의 전략이었다. 한 가정을 지키고 책임져야 하지만 엉뚱한 공상에 젖어있는 가장인 나에 대해 마누라는 현실적인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랬기에 마누라가 마지막 남긴 종이쪽지 보다 더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 건 나 자신이 나의 세계에 빠져있을 때 간간이 울려대던 그녀의 목소리이다.


“여보, 설거지 좀 해요.”


설거지. 나는 멍하니 마누라의 설거지를 도와주기는 했지만 식기들의 기름때를 씻으면서도  나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공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주말 가족나들이나 생일 파티에서조차도 나의 작은 머릿속에는 잡다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여보, 설거지 좀 해요.”


나는 마누라가 왜 떠났는지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을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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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19:09

한우, 참 오랫만이다





한우, 참 오랫만이다

7월 6일 일요일 참 오랜만에 한우를 먹었습니다(너무 오래되어 얼마만인지도 모르겠네요.) 입에서 살살 녹는게 별미였죠. 경제적인 사정때문에 원껏 먹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랄까요. 사진을 보니 또 먹고 싶네요.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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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17:13

추억의 호두과자






추억의 호두과자 사진입니다. 겉모습 생긴 건 호두처럼 생겼는데 딱딱한 호두과는 달리 부드럽고, 달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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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10 00:42

[일본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기쿠지로의 여름 (菊次郞の夏)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영화명은 비트 다케시)의 명성에 걸맞는 영화입니다. 역시 다케시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오게 합니다. 감독, 각본, 편집은 물론 마사오 역의 유스케 세키구치와 함께 주연을 맡아 열연합니다.

꼭 외형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의 측면에서도 사무라이와 야쿠자 일색의 기존 다케시 영화와는 달리 잔잔한 감동을 줍니다. 놀라운 일이지만(이 말은 <기쿠지로의 여름>에서 폭력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다케시가 만드는 영화의 성격이 달라졌다는 뜻에서입니다. 물론 이 영화는 폭력이 전혀 필요 없는 영화이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들이 보는 만화 영화만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것도 없습니다. 폭력이 나쁘다고 하지만 만화영화의 폭력을 보면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는 느낌이 듭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에서는 폭력이 거의 사라집니다.

물론 다케시의 ‘폭력’ 이 한, 두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그리 심각하지도 않고 인간적이기까지 합니다. 예를 들면, 트럭의 앞 유리창을 깨고 도망가지만, 뒤쫓아 온 기사와 싸우는 장면은 트럭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또한 한 마을의 축제에서 야쿠자 일당과 맞서지만 폭력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얻어터진 키쿠지로의 모습만을 보여주어 싸움이 치열했음(?)을 대충 짐작케 할 뿐입니다. 야쿠자인 ‘기쿠지로‘ 에게서 완전히 폭력을 금지하기엔 불가능하겠지요.

아무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야쿠자에게서 폭력적인 요소를 배제했을 때 어떤 인물이 될까요? 예를 들면 야쿠자를 유치원의 보모 자리에 앉혀봅시다. 또 야쿠자를 전업주부로 만들어 봅시다. 사실 이러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은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조폭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의 여지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의 대상을 부조화/불균형의 대상으로 전락시켜 웃음이나 감동을 유발하는 것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두사부일체><조폭 마누라><달마야 놀자>등이 아닐까 합니다. 만약 야쿠자를 관광버스의 관광 안내원으로 내세운다면 이와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따라서 기쿠지로를 엄마를 찾는 마사오의 길 안내자로 만드는 것도 기발하고 의외의 상상이랄 수 있겠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만약 동화 속에 야쿠자가 등장한다면 그 야쿠자는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도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입니다. 좀 사내다운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그럴싸한 폭력물에나 어울리지, 무슨 이런 장난을 치나!“ 라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래전 제 경험상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 다소 유치한(?) 노래를 부를라 치면 분위기 깬다라는 냉소적인 표현(?)을 짓는 군자들이 꼭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들이란 설운도, 태진아, 조용필, 남진, 나훈아, 이미자 류의 그 애끊는 고상한 트로트들이었습니다. 분위기 띄우기의 정수를 보여주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태도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트로트 일색의 노래방 분위기에서 갑자기 유치한 ‘마법의 성’ 이 등장한다면 분위가기 썰렁해질 수 있으니까요. 그야말로 마법에 걸린 듯 얼어붙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어떠한 종류의 분위기도 인정하는 노래방의 성숙한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달마야 서울 가자>의 노래방 장면이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만약 이렇게 다양성을 인정하는 관객이라면, ”야쿠자가 백마를 탄 기사가 되었군. 아주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인데......“ 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동화 속에 등장한 야쿠자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두 입장 중에서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 서고 싶습니까? 저는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습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제가 후자의 입장에 서고 싶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부조화/불균형)을 비일상적으로 보는 관습적이고 경직된 태도, 즉 우리가 오랫동안 일방적으로 익숙해져온 편견이나 획일화된 사고를 지양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관습을 벗어난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이 영화를 더 재미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야쿠자가 리얼하게 폭력을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동화의 나라에서 백마 탄 기사가 되는 것은 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여러 관계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이란 말 자체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관계는 지속적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다 그 관계들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저를 나아준 부모의 존재가 사라지면 그 관계도 소멸합니다. 제가 자식을 낳으면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 집니다. 우리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가 사라질 때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것은 모든 관계의 소멸을 뜻합니다. 마치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관계들이 확정적이고 경직되는 것은 그다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새삼 언급하면 잔소리로 들릴 정도로 당연하게 여기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과는 달리 현실은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로 구획되어 있는 듯 합니다. 영화는 기발하고 의외적인 상상을 통해 이러한 관습화되고 경직된 관계들을 변화시키는 측면이 아주 강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친구의 관계로 유연화 되기도 합니다. 유교의 경직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으로서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비일상적인 남녀의 관계가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처럼 전도되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서는 인간의 여러 관계들이 일상적인 역할을 벗어나 작동합니다.그것은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려는 영화와는 달리 허구를 통해 현실을 허물려는 영화의 본질과도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기쿠지로와 마사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입니다. 영화 내내 느끼는 것이지만 도대체 누가 더 정신적으로 성숙한지? 도대체 누가 더 진정한 안내자인지? 도대체 누가 더 서로에게 감동을 주는지? 이 두 사람의 여행을 통해서 더 깊이 감동을 받고 정신적으로 변화한 존재를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이 영화의 제목이 <마사오의 여름>이 아니라 <기쿠지로의 여름>이란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마사오의 여름을 위해 기쿠지로가 떠밀려 동행을 했고 안내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하지만 정작 여행을 통해 변화한 쪽은 기쿠지로인 것입니다.  


출      처|pcrc.hongik.ac.kr/~subcom3/Fav...



조금 강요가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자의 입장, 즉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은 이 글을 읽으면서는 누그러트려 주었으면 합니다. 


<기쿠지로의 여름>의 구성은 여행의 시간 흐름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해서 보기가 편합니다. 이러한 단순함은 영화의 재미와도 연관되면서 지루하지가 않은데, 아이의 시선을 배려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이 영화는 소설처럼 각각의 장들이 존재하는데 마치 추억의 앨범이나 여행 기록 또는 일기장을 넘기는 듯한 효과를 줍니다. 각 장마다 영화의 압권이랄 수 있는 장면들이 숱하게 나옵니다. 여러 장으로 구성된 <기쿠지로의 여름>은 [할머니의 친구들]로부터 시작합니다.


마사오(유스케 세키구치)는 부모가 없이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9세 된 아이입니다. 여름 방학이 되었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친구들은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고 축구 교실도 여름방학 동안은 활동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학교에 찾아갔다가 축구 코치로부터 “방학인데 바다에나 다녀오렴. 재밌을거야.”란 속 모르는 소리만 듣는데, 이 학교 신(scene)에서 헛발질을 하고 넘어지고 혼자 운동장에 서있는 마사오의 모습이나 혼자 남은 집에서 밥을 먹는 마사오의 뒷모습은 아이의 작은 어깨에 드리워진 무거운 외로움 느끼게 합니다.

외로운 마사오에게 어는 날 엄마의 소포가 찾아듭니다. 그리고 소포의 겉봉투에 적힌 주소가 눈에 들어옵니다. ‘아이치 현, 토요하시 구’ 주소를 가방에 넣고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불량배들에게 잡히는데 이때 나타나는 기쿠지로와 그의 아내가 할머니의 친구들입니다(할머니의 친구들 치고는 너무 젊은데......) 이런 인연으로 아내로부터 여행 비용으로 5만엔을 받은 기쿠지로와 마사오는 토요하시로 떠나게 됩니다. 이 장면의 압권은 유흥가와 경륜장에서의 해프닝으로 누가 어른이고 어린이인지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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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어지는 [무서운 아저씨] 장에서는 유흥과 경륜으로 돈을 다 탕진해 버리고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기쿠지로는 마사오가 없어진 것을 알고 근처 공원으로 찾아 나섭니다. 어린이 마사오를 전혀 고려치 않는 무지막지한 어른인 기쿠지로가 공원에서 목격하는 것은 마사오에게 이상한 짓거리를 강요하는 변태 대머리입니다. 변태 대머리는 무서운 세상의 암시로 이로서 마사오를 지켜야하는 기쿠지로의 필연적인 운명(?)이 시작된다고 할까요? 그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토요하시‘ 로 떠나게 됩니다. 이 후로 [이상한 아저씨][실패였다][천사의 종][아저씨가 놀아 주었다] 등의 장들이 이어집니다.



다 이야기를 해버리면 재미가 없겠지요. 자, 이제부터는 기쿠지로가 마사오와 함께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그 일기장을 직접 넘겨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재미있어 눈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장난치나!“ 같은 냉소적인 입장만 갖고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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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19:10

인간의 굴레




 

인간의 굴레, 중심과 이탈


인간에겐 야성(野性)이 있다. 아프리카의 초원을 뛰노는 사자나 기린 같은 동물적인 야성이 있다. 그 야성 중에는 물론 온화한 초식성과 사나운 육식성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과 인간이 생존을 위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란 걸 보여준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과 살인이 끊임없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동물적인 야성간의 문제로 생각해 봄직도 하다.  


문제는 인간의 육식성이 초식성보다 비대할 때였다. 힘과 무력이 지배하는 경우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제도와 법과 종교를 보면, 인간의 야수적인 육체를 지배한 정신의 성과물처럼 여겨진다. 인간의 그 사나운 육식성이 어떻게 순화되고 있는지를 제도와 법과 종교는 잘 보여준다. 만약 제도와 법과 종교의 등장에 근거해서 '인간의 역사는 야수성과 순화(純化)로 얼룩진 역사이며 또 그렇게 전개 될 것이다' 라고 한다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중심(中心)을 제공한 인간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다. 도덕과 윤리와 신과 이념을 마치 오뚜기의 중심 추처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다잡는 그 자기 희생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인간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중심(中心)은 권위와 권력과 결합하여 많은 미덕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야수적(?) 억압으로 변질되면서 인간은 자기 내부의 야수성의 통제와 조절과 억압과 더불어 자기 외부의 거대한 권력과 권위라는 감당할 수 없는 억압에 직면한 것이다. 프로이드 식으로 말한다면 내면의 욕구를 억압하고 외부의 권력과 폭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면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권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을 온전히 맡겨버리거나 중심(中心)으로부터 이탈하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이탈은 악덕과 미덕을 다 포함한다. 먼저, 인간의 야수성에만 국한해 본다면 나쁜 의미가 선명히 드러난다. 중심에서 이탈한 새로운 야수성이 개인적인 살인과 집단적인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속적인 중심을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미덕으로 간주 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가장 극단적으로 인간의 야수성을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악덕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이다. 이탈이 이러한 범죄적인 양상으로 변질되고 새로운 억압과 권위주의를 낳는 것은 인간의 정신 속에 내재된 동물적인 야수성이 잉태한 가장 최악의 결과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경우로, 은둔과 세상과 인연을 끊는 이탈이거나 중심의 해악에 순수 비판적 이탈이라면 그는 온전히 자유로운 이탈을 이루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은 바로 이러한 이탈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탈은 인간의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즉, 순화(純化)는 완전한 질적(質的) 변화가 아니라 억압에 대한 일종의 반응 양식인 까닭에 더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한 질적 변화의 중심에 종교와 부단한 자기 수양이 있다. 


사족이지만, 그렇다면 현실이 완전한 파라다이스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인가? 가당한 결론인지는 모르지만 ‘불가능’ 하다. 억압은 끊임없는 이탈을 낳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완전’ 하고 절대적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그것은 수많은 철학자들의 좌절이기도 했다. 완전과 절대란 <관념>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지 현실은 결코 완전과 절대적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해 현실에 대한 실망과 도피가 그러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에서 실존적으로 주어진 이 구심력(중심)과 원심력(이탈)의 충돌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인간들을 피곤하게 할 것이다. 인간들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굴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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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18:34

[꽁트] 몰입 가족






 

몰입 가족

― 몰입의 양상들


내가 영어 학원을 운영하고 숱하게 많은 아이들을 보아왔지만 초등학교 5학년인 K 만큼 영어에 몰입하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학교를 마치고 곧장 학원으로 달려와서는 수업 시작하기 한 시간 전쯤부터 어학실 TV에서 CNN 방송을 틀어 몰입하는 것이다. 주위에는 시선 한번 두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오직 TV 스크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다. K의 모습이 어떠하리란 것을 쉬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학실의 격리된 부스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입을 벌린 체 TV 스크린에 몰입해 있는 모습을. 말도 없고 웃음도 없다. 그냥 앉아 TV에만 몰입하는 것이다.


하루는 내가 너무 궁금해서 원장실로 K를 불렀다. K의 그런 모습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몰입식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K의 행동은 결코 비정상적이지 않았다. 아니 아주 바림직한 자세였다. 그러나 어학원의 원장으로서 학부모들에게 언제나 몰입, 몰입하고 강조해 오긴 했지만, K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나도 K의 그런 모습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약간 몰려왔다.


“너무 영어에만 몰입하는 게 아니니?”

“당연한 거잖아요. 저 영어 몰입하지 않으면 아빠한테 맞아 죽어요. 아빠는 영어가 밥 먹여 준데요. 영어를 잘하지 못하면 굶어 죽는데요. 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데요. 아빠처럼 된데요.”

“아니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셔? 영어가 밥 먹여 준다거나 영어 못하면 굶어 죽는다는 말은 영어가 아주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겠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아빤 제가 영어에 몰입하지 않으면 정말 절 때려요. 아빤 영어 때문에 직장을 쫓겨났다고 했거든요. 그 놈에 영어라고 영어를 저주하면서도 저에겐 영어를 하라고만 하세요.”

“네 아빠가 영어 때문에 직장을 쫓겨났다는 말은 꼭 영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를테면, 회사를 그만둘 나이가 되었다거나, 건강상의 이유라거나, 아빠가 개인적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거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단다. 이 원장 선생님도 말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이 어학원을 시작했단다. 영어를 못해서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는 없단다. 아빠도 만찬가지란다. 네가 영어를 잘해 주었으면 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나는 K와 이런 대화를 이끌 가면서 서글픔을 느꼈다. K에겐 아니라고 부인을 했지만 실상 영어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는 말은 사실 같았다. K의 아버지가 영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이나, 영어가 밥 먹여준다는 사실은 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이었으니 말이다. 나 또한 영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고 영어 어학원을 운영하며 밥을 먹고 있으니 말이다. 몰입이 어학원의 운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달고 있는 간판이 <영어 몰입식 전문 어학원>이라고 적혀있으니 말이다.


비록 먹고 살기 위해 그럴싸한 <영어 몰입식 전문 어학원>이란 이름으로 영어를 가르치고는 있지만, 왜 영어에 이토록 발악에 가까운 몰입을 해야만 하는지 여전히 이해하지도 못한다. 영어가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것이 진실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잘하면 좋긴 하지만 그렇게 모두들 잘하면 정말 국가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일까? 경쟁력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일까? 그건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나는 그저 돈을 벌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 ‘몰입’이란 단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빤 술에 몰입해 있어요. 매일 매일 술이에요.”

“아빠에게 괴로운 일이 있나보구나?”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 때문이라구?”

“예,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는 지난주에 집을 나가버렸거든요. 연락도 없구요. 아빠 말로는 애인에 몰입하고 있데요. 돈 없는 아빠보다 돈 많은 애인이 더 좋아 나가버렸데요. 아빤 그런 말을 하면서 또 화를 내세요. CNN만 계속 들으래요. 영어 모르면 굶어 죽는데요.”


K의 엄마를 몇 번 본적이 있다. 밀린 학원비를 내기위해 몇 번 학원을 찾아왔었고 날마다 전화를 해서 K의 진도나 성취도에 대해 직접 체크를 했다. 정말이지 귀찮을 정도였다. 어제도 통화를 했다. 그런데 가출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K의 엄마는 K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방학 때 마다 해외 어학연수를 보냈고, 전화영어를 했고, 수십만원씩을 투자해서 영어 동화 교재와 CD들을 구입했다. 몰입식 영어교육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았다. 자식의 교육에 몰입하는 것은 모든 부모의 인지상정이지만 K 엄마는 더욱 그랬다. 그런 K의 엄마였기에 가출이니 애인이니 하는 말은 의외였던 것이다. 그녀에겐 자식인 K가 모든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아니, 엄마가 집을 나갔다니, 그게 사실이냐. 네가 잘못 알고 있겠지. 할머니 집이나 친구집에 가 계시지 않을까?”

“절대 아니에요. 아빠가 그랬어요, 이제부터 둘이 같이 살자구요. 엄마가 보고 싶어 죽겠어요. 아빠 그러던데요, 내가 영어를 잘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면 엄마를 찾을 수가 있데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영어에 몰입해서 영어를 유창하게 하게 되면 엄마를 찾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영어를 잘하면 엄마를 찾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K가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몰입해 있어요. 아빠는 술에요, 엄마는 애인에요, 난 영어에요. 우린 몰입가족이에요.”    

(2008.07.07.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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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6 00:21

후쿠오카에서 먹은 도시락 & 음식





                        후쿠오카에서 먹은 도시락&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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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텐보스 행 열차 안에서 먹은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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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텐보스 에서 먹은 나가사키 짬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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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 공원 가는 길에 먹은 어묵(맛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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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찌란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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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주로 먹었던 도시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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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5 21:12

후쿠오카 자유여행(7.마지막날)







             후쿠오카 자유여행(7.마지막날)


이틀 동안 참 바빴습니다. 하우스텐보스와 다자이후 뗌만구도 다녀오고 후쿠오카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니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는 아쉬움도 컸습니다. 그랬던 탓인지 마지막 날 아침에야 비로소 민박집의 실내를 찍었습니다. 민박집은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데 낡은 전통 가옥에 그다지 아늑하고 편리한 곳은 아니었지만 깨끗했으며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특히 그 때가 비수기였던 탓인지 그 넓은 민박집에 손님이라고는 우리 가족이 전부였습니다. 정말 편안하게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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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비수기에 일본을 여행할 경우에 굳이 한국에서 예약을 미리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후쿠오카로 출발하기 직전 한국에서 민박집을 예약했지만 막상 후쿠오카에 도착하니 하까다항에 명함만한 숙박 안내지들이 널려 있더군요. 현지에서 찾아가는 것이 좀 불편하겠지만 자유여행이라면 그렇게 찾아가는 것도 재미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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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에서 먹은 음식은 주로 도시락이었습니다. 도시락의 나라답게 다양한 도시락들이 있더군요. 사진에 담지는 못했지만 하까다역 내의 쇼핑가에 도시락 코너가 있었는데 다양한 도시락들을 전시해놓고 있었습니다. 직접 주문을 해서 도시락을 만들 수 있기도 하구요. 한국에서 가져간 육개장이 국물이 없는 도시락을 먹는데 도움이 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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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도시락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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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는 좋은데 맛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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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을 나오면서 근처의 모습들을 찍었습니다. 한국과는 가까운 거리라 언제 또 오겠나하는 아쉬움은 덜했지만 그래도 짧은 일정과 근처를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은 남더군요. 하까다역으로 가는 도중에 거리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후쿠오카에 오기 전 한국에서 숙박지를 예약할 때 주로 소개되어있던(여행 동아리 카페, 여행사 정보 등등) 호텔들이 일대에 모여 있더군요. 아마 역 주변의 호텔이라는 편리성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민박보다는 호텔을 이용해서 다른 경험을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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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 바로 옆을 흐르는 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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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Boy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데 가보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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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정문 앞에 붙어있는 교육목표 같은데 해석 좀 댓글로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우스텐보스와 다자이후 뗌만구를 가기위해, 또 이런 저런 이유로 자유여행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되어주었던 하까다역은 아쉬움과 함께 정겨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하까다역내의 식당가는 식사를 하고 도시락을 구입하는 편리성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다시 한 번 하까다역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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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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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가 맞은 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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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과 커피, 빵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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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역 역내를 가로질러 맞은 편 출구로 나가 하까다항 행 버스를 탔습니다.(또 사진이 없네요. 분명히 버스 정류장이며 버스 노선도며 하까다역 주변의 이런 저런 사진들을 찍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입니다. 아까다 항 사진도 없구요.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바로 선실에서 찍은 사진이 등장하네요, 이런!) 선실에서 찍은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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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선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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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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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여행의 기록치고는 너무 엉성합니다. 사진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우스텐보스, 다자이후에서 너무 서둘렀던 기억, 후쿠오카의 커낼시티 등을 둘러보면서 남긴 사진들을 소개하지 못했다(사진들이 다 날아가 버린 것인지 원인을 모르겠네요)는 점은 너무나 부족했던 부분입니다. 여건만 된다면 다음에는 나가사키로 여행을 떠나고 싶습니다. 하우스텐보스에서 나가사키는 거리상으로 후쿠오카와 거의 비슷합니다. 하우스텐보스에서 나가사키로 가서 일박하고 후쿠오카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일정이 너무 빠듯해 포기했던 기억이 나는 군요.


지금까지 이 자유여행기를 보아주신 분들에게는 많은 것들을 못 보여준 것이 아쉽네요. 뭐, 다들 다녀오셨는데 괜한 말 같다구요?  아무튼 감사하구요, 좋은 여행들 하세요.(끝)

후쿠오카 자유여행 다시보기

1.선상에서 
2.후쿠오카에서 첫째날 
3.하우스텐보스 로 
4.하우스텐보스
5.다자이후 로  
6.다시 후쿠오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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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2 23:22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에게 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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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www.flickr.com/photos/djokomul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에게 고함

― 포세이돈, 테세우스, 그리고 미노토


미노토는 포세이돈(Poseidon)이 크레타(Crete) 섬의 왕 미노스(Minos)왕에게 내린 보복의 산물이었다. 포세이돈은 소 한 마리(a Bull)를 자신을 위한 제물로 바치도록 미노스 왕에게 하사했으나 미노스왕은 그 소를 보호했다.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아내인 파시파에(Phasipae)가 그 소와 사랑에 빠지게 하는데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반인반우(半人半牛)인 미노토였다. 미노스왕은 이 해괴한 존재를 다에달로스(Daedalus)가 설계한 미로(labyrinth)에 가두어 두었다. <미로(Labyrinth)속의 미노토(Minotaur)와 야만적 정치인들, 컴속의 나. >


신화는 인간의 의식의 원형이랄 수 있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느끼던 경외감과 호기심, 인간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에서 발생하여, 단순히 재미를 위해 덧붙여지거나 또는 교묘하게 신화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인간들에 의해 변형되면서 그 의미가 복잡하고 다양해 졌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에 대해 느꼈던 경외감은 아주 유치한 수준에 불과하다. 과학이 발달하고 과학과 함께 인간의 이성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면서 신화는 중단되었다.


그러나 솔직히 현대적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자연은, 그 자연을 제공하는 지구, 더 나아가 우주는 인간의 완전한 해석을 용인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우주에 대해 신화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신화를 낡은 것,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고작 상상력을 인정해 줄 뿐이다.


이러한 신화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지극히 편협할뿐더러 인간 중심적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연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도 호기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눈부신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의 본질적인 의문과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의문은 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신화는 인간 의식의 원형이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는 여전히 현대에도 유효하며 새로운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스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 사이에 위치해 있는 크레타섬은 문명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집트 문명이 크레타섬을 거쳐 그리스 문명을 꽃피웠기 때문이다.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에게문명의 특성이 이집트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 위의 인용글은 바로 그러한 문명사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크레타섬의 미노토는 덜 개화된 문명을 의미하며 테세우스는 새로운 그리스문명의 태동을 알리는 존재이다. 물론 신화의 의미가 전적으로 여기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큰 틀의 문명사적인 전환기에 일어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신화로 만든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문화적인 전환기에 직면해 있다.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넘어 내용상으로 민주주의, 정직하고 양심적인 정치 문화로의 전환을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적인 전환기에 테세우스와 미노토의 신화를 적용해 보는 것은 그 문화적인 전환의 방향성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미노토를 미로속에 숨겨두고 그리스로부터 인간 제물을 바치라고 한 비정상적인 미노스왕은 현재의 대한민국 상황으로 본다면 MB이다. 아무리 심리의 문제라고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먼 미래, 아니 가까운 미래에 광우병 희생자가 나타나지 않으리란 절대적인 보장은 없는 것이다. 테세우스는 촛불을 든 시민을 상징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테세우스가 파시파에의 도움으로 어두운 미로를 비추는 촛불과 길을 잃지 않으려고 준비한 실은 지금의 촛불정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테세우스는 미노토를 죽이고 그리스인 인질들을 다 구출해낸다. 미노토를 죽인다는 말은 촛불정국의 상황에서는 광우병의 위험을 철저하게 차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노토를 죽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듯이 고시를 철회하고 재협상을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랄 수 있다.


파시파에는 미노스왕의 아내이다. 반인반우 미노토를 잉태한 당사자인다. 그녀가 남편을 버리고 테세우스를 선택하는 것은 꼭 사랑이라는 문제보다는 미노토에게 그리스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야만적인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양심적인 정치인들이라면, 양심적인 관료라면, 테세우스를 도왔던 파시파에의 입장에 반드시 서야만 하는 것이다. 테세우스를 사랑했듯이 촛불을 든 시민들을 사랑해야 하며 때로는 폭력을 중재하고 촛불이 평화롭게 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이러한 파시파에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너무나도 부족하다. 문제는 미노스의 친위 세력 중에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아내인 파시파에가 그랬듯이 진정한 보수주의자, 양심적인 보수주의자들이라면 촛불을 들고 그리스인 인질들을 구출해야 하는 것이다.


소고기 사태는 결코 이념의 문제가 아니며 분열을 잉태하는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이며 신뢰의 문제이며 양심의 문제이며, 또한 의식과 문화적인 전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이 양심과 정의에 근거해서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조화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문제인 것이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싸울 필요가 없다. 긴 역사의 호흡으로 보면 그 싸움들이 얼마나 부질없었던가? 그 부질없었던 결과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하지 않을까? 보수주의적인 가치와 진보주의적인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충돌이 한 쪽을 압살하는 극단주의는 피해야 한다. 절충안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끊임없이 거쳐 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 절충이 사욕과 탐욕이 아니라 진정성과 양심과 진실에 입각해 있다면, 그 절충은 결코 변질도 아니고 비겁도 아니며 타락도 아닌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변증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아가고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 소고기 사태는 가치의 충돌이 결코 아니다. 건강과 양심과 정의와 겸손의 문제이다. 양심적이고 진실한 보수주의자라면 촛불을 단순히 좌파니 빨갱이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폭력을 지양하라고 비판하기는 하되 촛불의 의미에 대해서는 양심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고 본다. 폭력은 단호하게 비판하되 촛불의 의미를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를 떠나 양심적이고 진실한 정치인들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본다. 촛불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대해 계몽적인 자세로 국민들에게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 정치인들, 보수주의자들이 보여주어야 할 성숙한 보수주의적인 자세인 것이다.(*) (2008.7.2.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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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2 01:30

후쿠오카 자유여행(6.다시 후쿠오카에서)





                        후쿠오카 자유여행(6.다시 후쿠오카에서)

다이자후 뗌만구와 큐슈국립박물관을 둘러보고 난 뒤 갑자기 텐진 지하상가 사진이 등장합니다. 이후로의 사진들은 불완전하기는 하나 다소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텐진 상가를 둘러본 후 하까타 리버레인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그 일대를 둘러보고 쿠시다 신사로 향한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구입한 일본여행 책자 일본 100배 즐기기 (랜덤하우스 중앙)와 Just go 세계여행가이드북, 후쿠오카, 나가사키, 하우스텐보스(시공사)을 참고했는데 후자의 책 운명은 기구한데 일본에서 한 번 잃어버렸다가 하까다역 안내소의 한국인 안내원이 보관해서 찾았던 책입니다. 후쿠오카 시내 도보여행은 일본 백배즐기기소개된 코스를 따라 계획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행책자에 나온 순서를 그대로 따라했던 것입니다. 쿠시다 신사로 가는 도중에 작은 절과 그곳에 부속된 묘지를 지났고 편의점 어묵을 사먹었습니다. 쿠시다 신사는 참 아기자기한 신사였습니다. 신사 곳곳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사실은 도보여행으로 지쳐 신사 내 의자에 앉아 쉬는 동안 할 일이 없이 찍어대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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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진 지하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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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 리버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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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다 신사로 가는 길에 본 묘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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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다 시사로 가는 도중에 본 작은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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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먹은 어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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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다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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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다 신사 후문으로 나오자 놀랍게도 커낼시티가 있었습니다. 커낼시티가 쿠시다 신사와 바로 붙어있었다니 참 무모한 도보여행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노정을 더욱 효율적으로 짰을 텐데......아무튼 그 때 목적지는 커낼시티가 아니고 오호리 공원이었다는 것이 다소 위안이 되었습니다. 오호리 공원으로 가는 길에 하까다마찌야 후루사또관을 지나쳤습니다. 시간 관계상 내부를 둘러보는 것은 생략했지만, 인력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오호리 공원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오호리 공원역에서 내렸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자전거 보관소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호리 공원은 그다지 볼 것 없는 평범한 호수였습니다. 단 하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뭍에서 이어져 호수 가운데 서있는 정자 하나가 인상적이었는데 이러한 구조는 중국의 시후(西湖)를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일본의 중국과 문화적인 교류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습니다. 원래 이 호수는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던 후쿠오카성의 해자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둘레가 2km인 호숫가를 따라 산책로가 있고 보트를 탈 수 있는 공원으로 개조되어 있습니다. 이 오호리 공원에 앉아 호수 속 고기들과 비둘기에 먹이를 주면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습니다. 하나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호리 공원내에 있는 공중 화장실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대변기가 거꾸로 되어있는 것이 아닙니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으나 호기심을 자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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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다 신사 후문으로 나오자 커낼시티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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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세사리 가게 같은데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 포스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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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마찌아 후루사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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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오호리공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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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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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공원으로 가는 길에 본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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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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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적인 색채와 성격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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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공원내 공중화장실(구조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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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리 공원앞 도로



다시 또 시간과 공간이 끊어져 토막나 버렸네요. 오호리 공원에서 나올 때쯤은 저녁이었고 배가 좀 출출해지던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이찌란 라면가게 사진이 등장하는 것은 배고픔에 가게를 찾느라 사진 찍는 것을 잊었던 탓이었을까요? 이찌란 라면 가게를 찾는 노정에서 찍은 사진이 없어 아쉽기만 합니다. 솔직히 이찌란 라면 가게를 어떻게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번화가에서 빙빙 돌다 어느 작은 가게에서 이찌란이 어디 있는지 물었고(일본말은 전혀 못합니다. 그냥 웃으면서 이찌란하고 물었던 거죠.), 다행히 바로 근처에 이찌란이 있어주었기(?) 때문에, 가게를 찾았다기 보다는 가게가 와주었다는 표현이 더 타당할 듯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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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길로 들어서자 나타난 이찌란 라면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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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이 마치 독서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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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맛은 느끼하지 않고 깔끔한 편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고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다 커낼시티까지 가게 되었고 다시 하까다 역에 도착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참 미안했죠. 일본이라는 이국적인 모습만 아니었다면 그토록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긴 도시 도보여행 끝에 하까다 역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 피곤을 풀었습니다. 커피 맛과는 달리 사진은 참 멋없죠? 고작 찍은 것이라고는 테이블에 올려 진 커피 두잔 뿐입니다. 일본에서 찍은 것이 아니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네요. 분명 역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찍은 사진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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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를 나와 곧 바로 민박집으로 가기에는 일본에서의 시간이 너무 아쉬워 하까다 중심지를 구경하기로 하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나갔습니다. 한국에서의 이마트나 신세계같은 대형 마트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지하철 안내소에서 월마트 같은 대형 쇼핑 센타가 어디 있는지 물었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 때 시간이 10시를 넘어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기준에서 24시간 하는 대형 쇼핑센터가 영업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에 아마도 문을 닫았다는 대답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다소 의아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가게들의 문이 거의 닫혀있었고 말입니다. 사람들도 별로 없었구요.(소통의 부재로 정보를 정확히 수용하지 못했거나 그러한 문화적인 차이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쇼핑센터 가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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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내에 있는 도시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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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늦은 시간이 아닌데도(한국의 경우) 사람이 발길이 뜸하고 열려있는 가게가 드물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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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있어 보이던 거리의 포장마차


지하철을 이용해 오가면서 역 내에 노숙자들이 몰려들어 자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어느 나라고 사회의 구조에 의해, 또는 개인적인 이유로 아니면 또 다른 이유들로 어두운 이면은 있게 마련이라는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세계 경제 대국 일본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늘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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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지하철을 타고 하까다역에 내려 민박집으로 향해 출발할 시간입니다. 하까다 역에 내려 다음날 아침 먹을 도시락을 구입했습니다(사진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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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까다역으로 가는 지하철 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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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지하철 역의 방어벽과 자동문


*이제 후쿠오카에서의 마지막 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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