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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9 16:52

젊음과 늙음







 

젊음과 늙음


이해하지 못할 무지(無知)같은 것이 있다. 젊음과 늙음이란 현상에 대한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너무나도 단단히 고정이 되어있어 마치 두 개의 사과처럼이나 독립된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젊음과 늙음 사이에는 연속하는 시간으로 이어져있고 미분할 수 있는 변화들이 연속적으로 내재한다. 결코 독립된 두 개의 실체가 아닌 것이다.


우선, 젊음은 인간들에게 맹목의 믿음 같은 것을 심어주는데 ‘젊음이란 현상’ 이 그것이다.  ‘젊음이란 현상’은 절대적으로 존재할까? 그렇지 않다. 절대적인 젊음의 현상은 일종의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단지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변화하는 ‘생명’의 긴 기간에서 좀 더 활동적이고 좀 더 생기있는 시기가 있을 뿐이다. 도대체 젊음이 있다면 그 젊음이란 어떻게 정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늙음에 대해서는 더욱 더 무지한 인식이 존재한다. 늙음은 젊음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아주 초라하고 볼품없으며 실용성도 없는 어떤 현상이란 믿음이 그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통과해야할 일종의 의식으로서 늙음에 대해 특히 ‘젊은이’ 라고 자처하는 인간들은 극단적으로 거부하기를 즐긴다.


하지만 늙음과 젊음이 이토록 이분화된 현상은 근대 산업사회의 부산물이라 감히 주장하고 싶다. 특히 오늘날의 정보화시대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더욱 팽배해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늙음에 대한 인식은 삶의 경험이 누적된 지혜와 권위의 상징이었다. 늙음이 결코 피상적인 현상으로 삶과 유리된 소외되고 무기력한 추상화된 관념적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나이던 어른들은 언제나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이 인간에게 나이는 그 자체로서 존경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늙음은 삶의 저 바깥으로 추방당해 버렸다. 우리의 삶과는 관계없는 덜떨어지고 낡은 것으로 말이다. 경험과 지혜 따위는 현대적 가치들과는 공존하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이러한 때는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늙음이 이토록 무시되어 버린 다는 것은 자기 학대인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늙음을 통해 사라진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다. 젊음과 늙음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다른 실체가 아니다. 젊음과 늙음은 살아있는 하나의 생명체에 나타나는 다른 현상일 뿐 독립된 두 개의 현상이 아니다. 늙음을 동떨어진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젊음의 부정이며 삶의 부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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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5 06:39

눈물이 나네요, 힘내세요!

생방송으로 세종로 시위를 보고 있습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함께 할 수 없지만
마음으로 뜨거운 성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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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4 10:31

죽은 기자의 사회(Dead Journalist s Society)





 

죽은 기자의 사회(Dead Journalists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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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정신은 사회의 정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기자 정신은 사회의 불의와 거짓을 고발하고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자 정신이 상업주의, 권력과 결탁하거나 심지어 종속되는 듯한 느낌을 뿌리 칠 수 없다.


살아 있는 기자 정신이 실종되면 사회의 비판적인 기능이 무뎌지면서 민주주의를 황폐하게 만드는 검은 독버섯이 도처에서 활개를 치게 된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거짓이 횡행하면서 사회는 적당주의와 무기력 양심과 도덕에 대한 무감각이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있는 기자 정신의 실종이란, 곧 기자 개인의 사욕의 충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의 타락을 잉태하게 되는 것이다. 기자는 공인 중에 공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쓰는 기사 하나 하나에 살아있는 양심과 정의의 혼을 불어 넣어야 하는 것이다.


기자는 공인 중에 공인이라는 생각을 언제나 명심하면서 보편적인 진리와 인간애를 기사의 근간에 깔고 객관적인 사실 보도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욕의 추구나 일신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기자정신은 실종될 것이고 비판과 저항이라는 대항적인 존재가 아닌 권력과 상업주의의 기생적인 존재나 홍보요원으로 추락할 것이다.


과연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자들이 살아있는 기자정신으로 보편적인 진리와 인간애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사실 보도에 충실할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대단히 비관적이다. 이번 광우병 사태와 관련하여 기자정신의 실종을 더욱 끔찍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해 주기는커녕 권력의 시녀처럼 홍보와 합리화, 심지어 궤변에 가까운 기사들을 양산해 내었다. 특히 조중동의 경우는 기자정신의 실종을 넘어 권력과 상업주의와의 기생적인 관계에서 사욕을 추구하지 않나 하는 의혹을 갖게 될 정도였다. 광우병 문제로 촛불 시위가 한창일 때 MB 어천가를 불러대던 중앙일보의 한 기사는 이러한 기자정신의 실정을 보여주는 백미였다. 


      

*


좋은 신문을 말할 때 흔히 ‘보도의 객관성’, ‘날카로운 비판정신’ 그리고‘ 창조적인 대안’ 같은 말들이 떠오르는 것은 신문의 공익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문(pen)은 무(sword)보다 강하다는 격언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신문 사명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신문을 보노라면 원칙 없이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기사들과 광고들이 무분별하게 뒤섞여 세상의 축소판을 보는 것 만 같아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러한 무원칙의 가치 혼란 상태는 사회적인 문제들의 악순환을 조장한다는 차원에서 신중하게 선별되어야만 한다. 경제가 어렵다는 기사 밑에 수억 원씩 하는 아파트의 광고가 등장하는가 하면 실증되지도 않은 과장된 영어 광고로 독자들을 현혹시키고 해외의 쓰레기 같은 기사들을 버젓이 해외 토픽으로 포장하여 상업주의를 조장하며 어학연수다 이민 설명회다 하여 서민들의 의욕을 상실케 하고 과장된 약 광고로 국민 건강까지 왜곡하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원칙 없는 짓들을 자행하고 있다.


특히 신문의 공신력을 앞세워 과장된 광고들을 확대 재생산하게 되고 당연시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어 심각할 지경이다. 건강식품, 영어회화, 식품광고, 광고(classified ads)란 등은 신문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와는 걸맞지 않는 전형적인 과대, 과장 광고로써 신문의 기능을 다시 한 번 재고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과장과 왜곡 광고 및 상업주의 못지않게 언론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권력을 견제하는 언론의 사명을 망각한 체 권력의 혜택을 누리려는 실종된 기자정신을 보고 있노라면 민주주의의 가면을 뒤집어쓴 지식인들의 허위와 위선을 보는 것 같아 분노하게 된다.


정론과 비판정신, 객관적인 사실 보도라는 불변의 기자 정신을 팽개쳐버리고 사욕에 눈이 먼 듯한 왜곡과 과장과 궤변을 토사물처럼 토해내는 신문기사들을 볼라치면 과연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인가, 언론이 민주주의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히 걱정스럽기도 하다.


사회의 병적 징후들을 드러내 놓고 예방과 처방과 심지어는 수술까지도 해야 할 언론이 사회의 문제들과 악순환의 연결 고리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이다. 기사 선택에 있어서 사회 현실과 조화될 수 있는 신중한 선별이 필요하며 광고의 경우에는 비록 광고가 재정을 지탱해 주는 원천들 중에 하나이지만 그 광고들을 비판하고 선별하는 사명도 신문의 사명들 중에 하나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권력으로부터 객관적인 거리감을 두면서 비판하고 견제하는 언론(기자)의 본질적인 소명의식을 견지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소수 기자들의 정론이나 객관적인 사실로 포장된 권력자 예찬이나 주관적인 사설등을 접하면서 언론, 특히 기자들의 소명의식이 죽은 사회에서 민주주의도 함께 죽는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


기자들은 우리 사회가 죽은 기자의 사회(Dead Journalists Society)라는 의혹을 불식시켜주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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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2 22:51

[생각 돌아보기] 빌딩속 사바나의 세계





 

빌딩 속 사바나의 세계


참 이상하기도 한 것이 하나 있는데 사람의 목숨을 유린(?)하고 있는 폭력적인 교통문화가 왜 인권과 인간 존엄성의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달려야 하는 길바닥이 어째서 무법천지로 선언되고 강력한 공권력이 투입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법이 없는 불법과 탈법의 온상(溫床)인데도 왜 이토록 허술하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온갖 개혁의 물결이 범람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이 항상 가장 가까이에 도사리고 있는 이 무법천지를 빨리 개혁해야 한다.


사바나의 약육강식(?)의 세계처럼 강자만이 군림하는 무법(無法)과 탈법(脫法)의 도로를 그대로 방치해 두고서는 결코 ‘기본이 바로선 나라’ 나 ‘성숙한 민주주의’는 기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질 어쩌구 할 수 없는 것이다. 무정부 상태, 아니 폭치주의(暴治主義) 상태의 교통 문화가 반드시 해결되어야 인권이고 인간의 존엄성의 실현여부가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성폭력이란 말이 유행이다. 몇 몇 성폭력 사건들로 나라가 발칵 뒤집혀질 정도였다. 남자들은 특히 입과 손을 조심해야만 한다. 입은 음탕한 언어를 만들어 내는 사악한 혀가 있기 때문이며 손바닥에는 이성의 육체를 더듬거리면서 느낄 수 있는 성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약과다. 이 입과 손이 도로에서는 더 추잡해진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야말로 혀는 도로를 달리며 세상 모든 욕을 다 토해내며,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은 거대한 흉기를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운전자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한 마리의 동물 곡예사’ 가 되는 것이다. 성과 폭력만이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 빠져버린 모든 동물적인 특성이 다 만나는 것이다. 예로 음주운전은 인권 모독(冒瀆)의 극치이다. 성폭력보다도 더 폭력적이고 더 비도덕적이다.


그런 대도 언론이나 방송에서 그것을 다루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힐 정도이다. 성폭력은 대문짝만하게 다루어지는 반면 음주운전은 코딱지 만하게 다루어진다. 물론 교통 문화에 대해서는 기획 캠페인의 형식으로 간혹 크게 다루어지지만 언제나 일관성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성폭력은 상업적인 이용가치가 많아서일 것이다.

음주운전을 비롯한 폭력적인 교통사고들을 일관성을 갖고 대문짝만하게 다룬다면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인간성 상실과 생명 경시 풍조가 하루빨리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욱 엄격한 법(심지어 살인미수나 성폭력 그리고 인권 유린 조항 같은)을 적용하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연중 시행하여 운전자들의 의식의 대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처럼 도로 위에서 야수로 돌변하는 이 위선적 문화를 뿌리 뽑아야 기본이 바로 서고 삶의 질이 높아질 수 있음을 명심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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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22:26

[꽁트] 영재를 위한 몰입식 교육법 특강






 

영재를 위한 몰입식 교육법 특강


나는 한 번도 글자와 숫자를 배운 적이 없었다. 2살 밖에 되지 않은 내가 글자와 숫자를 배울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글자 읽기는 물론이거니와 숫자 읽기는 아주 쉽게, 덧셈 뺄셈은 가뿐하게, 구구단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익힐 수 있었다.


하루는 아빠와 엄마 앞에서 신문 사설을 줄줄 읽고, 숫자를 읽고, 더하기 뺄셈을 하고, 구구단을 외었고, 그런 나를 지켜보던 아빠와 엄마는 입에 거품을 물고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2살이었으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영재의 탄생이라고 흥분하셨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겐 아주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을 뿐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흥분으로 몸을 떨면서도 평소 글자와 숫자 공부를 시키지 않은 자신들이 미안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아빠와 엄마처럼 숫자 공부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준 사람들도 이 세상에 없지 싶다. 그러니 지금 아빠와 엄마에게 말하건대 정말 고맙다는 말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말한다. 내가 참으로 고맙다고. 과외를 시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좋은 학습지 한 권 제대로 사주지도 않았는데 숫자를 익히고 글을 익혔다는 것을. 경제적인 손익을 따져보더라도 그 엄청난 투자의 생략이야말로 그 만큼 가계부담을 줄이는데 기여했음에 고마움을 표했던 것이다.  


내게 최적의 학습 조건은 무엇보다도 아빠와 엄마의 자유방임에 가까울 정도의 개방적 태도였다. 내가 2살이 되던 그 해 겨울에 아빠와 엄마는 좋게 말하자면 냉전(冷戰)중이었다. 서로에게 무관심했고 그들 사이에 대화는 차단되었다. 그러니 그 냉기(冷氣)같은 침묵이야말로 우선 기본적인 학습조건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침묵과 학습효과와의 상관관계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모범적인 사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냉전은 나에게는 크나큰 배려였고 관심이었다는 것을 아직도 그들은 모르지 싶다.


다음으로 냉전의 기류를 사이에 두고 있던 아빠와 엄마의 참호를 오갈 수 있던 나는 그들이 언제나 중독처럼이나 똑같은 일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빠는 신문 읽기와 컴퓨터에 엄마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잡지에 열중해 있었다. 탁월한 반복 학습이 잘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는 그들의 참호에서는 물론이고 쉬리가 헤엄치며 노는 어항이 있는 거실과 해제된 무기들이 놓여있는 부엌을 포괄하는 공동경비구역(JSA)이나, 비무장지대에서 조용한 분위기의 휴식과 함께 무언가에 빠져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집중력은 물론이고 인내와 성실함 같은 덕목들도 함께 체득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집중해서 어떤 일을 성취해낸다는 침묵의 교훈을 배웠던 것이다. 그랬기에 학습 효과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풍부한 학습 교재와 자료였다. 무엇보다도 아빠의 컴퓨터 시디에서 반복해서 흘러나오는 뽕짝의 가사와 텔레비전 드라마의 대사를 듣고 감동적이고 살아있는 언어를 익혔는데 동시에 이것은 나를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아주 조숙한 인간으로 변화시킨 이유들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 신물 나도록 들은 뽕짝의 가사 때문이었는지 멜로 드라마의 대사 때문인지 사랑의 상처나 이별의 아픔 같은 것을 일찍이 경험했던 것이다. 뽕짝 노래와 가사집(歌詞集)과 텔레비젼 드라마의 대사는 내가 글자를 익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엄마의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아니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흘러나오는 표준말을 익힌 것은 엄마의 큰 배려였다는 것을 지금에야 느끼고 있다. 뽕짝과 드라마를 통해 글자를 듣고 외웠다면, 집의 곳곳에 흩어져있는 신문과 가사집과 잡지를 통해 듣고 외운 글자들을 복습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영재적인 재능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언어감각도 한 몫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후천적인 환경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글자는 그렇거니와 숫자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문 한 장으로 충분했다. 아빠가 즐겨 읽던 스포츠 신문을 통해 수많은 숫자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스포츠 신문에는 수많은 전화번호들이 벌레처럼 우글거렸는데 아마도 스포츠에 전화 통화 종목 - 이를테면 누가 빨리 전화를 걸고 내리나, 얼마나 빨리 말할 수 있나 하는 서부시대의 총잡이처럼 손과 입의 재빠름과 속사를 측정하는 종목-의 추가를 주장이라도 하는 듯 했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 전화번호들이 하필이면 스포츠 신문에 그토록 많아야 하는지는 4, 5년이 지나서 다시 호기심을 부추겼고 그 스포츠 신문을 사서 밤낮 없이 전화번호를 돌려댄 것도 바로 그때였다. 조숙함을 넘어 완숙함으로 변화했다고 할까.


그랬기에 내게 스포츠 신문의 영향은 지대했던 것이다. 숫자들의 기능적이고 산술적인 의미를 익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숫자들의 상징적이고 이면적인 의미와 함께 성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사족은 떼버리고, 숫자는 그렇게 쉽게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영재 교육법을 스스로 발견, 터득하여 실천했고 그런 나를 지켜보며 아빠와 엄마는 그들의 의무를 다했다는 듯이 그 이듬해의 첫 달에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던 것이다. 이후 나의 삶의 크나 큰 부분에서 다시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었고 이제 <바부자모>, 즉 <바람났던 부모의 자녀들 모임>의 회원들인 여러분들 앞에서 <영재를 위한 몰입식 교육법 특강>이란 다소 늦어버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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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5 03:20

[꽁트] 만숙, 우리들의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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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ww.lythastudios.com/swarovski

 



만숙, 우리들의 천사


21세기도 7년이나 지났다. 올 것 같지도 않던 21세기였다. 그러나 7년은 21세기에 누적된 시간이 아니라 2000년이란 긴 세월을 한 순간에 폭발, 분열, 그리고 융합시키면서 스며든 변화의 시간이었다. 이러한 폭발로 사회, 정치 문화적으로 소외되어온 주변부와 타자가 파편처럼 떠오른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한 개인에게는 어떠한가? 개인의 이성과 합리성이 오히려 억압되고, 테크놀로지와 멀티미디어가 양산하는 고상한 이름으로 포장된 유행, 트렌드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온갖 욕망들의 부유가 개인의 정체성 해체, 곧 자아 해체라는 현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중심은 뻥 뚫려버리고 그 구멍 속에는 온갖 타자의 욕망들만이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아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초상에 덧붙여 자아를 빼앗긴 현대인의 초상화라 말해도 될까?


진정한 자아의 의미란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억압되는 이성과 합리성을 회복하고 상업주의에 의해 인위적으로 강요되는 욕망을 벗어난 자리에 진정한 자아, 즉 타인을 존중하고 진실하게 사랑할 수 있는 개인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러한 개인들이 모일 때 바람직한 공동체가 만들어 지지 않을까?


그러나 모두들 제 잘난 맛에, 제 기분 꼴리는 대로 아주 주체적으로 살아간다는 착각 속에 오만한 콧대를 세우고 있다. 어떤 거대한 것에 매달려 살아가고 있는 줄인형이란 사실을 모른 체 말이다. 이제 텅 빈 구멍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자아에 대해서 말하자면, 내가 우연히 알게 된 만숙의 이야기는 빠질 수 없지 싶다.


만숙이가 나를, 아니 내가 근무하고 있는 <청소년 문제 상담소>를 찾은 건 작년 가을이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몇 가지 경우에 한해서는 너무 늦어있었다. 그녀의 목에 찍힌 ‘이빨’ 자국이나 양팔에 새겨진 온갖 문신들과 약물 중독은 없애거나 치료하기에 늦지 않았지만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쩔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술과 담배에 찌들고 약물에 중독 된 상태로 보아 만숙이의 뱃속 아이는 기형의 가능성이 아주 높았지만 막상 산부인과에서 검사를 해 본 결과 다행히 기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낙태를 하기엔 늦어 있었다.


만숙이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물었을 때 만숙이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만 했다. 그러면 인생이 더욱 불행해진다는 말에도 그저 넋이 나간 모습으로 “몰라“ 라는 버려진 짐승의 신음 같은 단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불행하게도 만숙이가 모르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본명은 물론이고 나이, 주소도 몰랐다. 그러니 그녀 부모의 얼굴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는 목욕탕에 한 번도 안 가 보았는지 자신의 몸무게도 몰랐다. 그녀가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만숙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부풀어 오르는 뱃속에 아이가 들어있다는 그 단 하나의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그녀가 아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임신한 것 외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명언 같은 그 사실 하나 밖에 없는 셈이었다. 마치 나 , 만숙이를 알기 전에 너 자신을 알라는 항변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만신창이가 된 만숙이에게 그 자신의 존재는 ‘죽은 시체‘ 아니 ’살아있는 시체’ 와도 같은 모순적인 존재였을까? 어쩌면 그렇게 만숙이는 자신의 존재조차도 잊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인간과 세상에 대해 한없는 원망과 저주를 퍼붓기도 할 법 했지만 오히려 ’몰라‘ 라는 말만을 반복해 대던 만숙이는 텅 빈 구멍 바로 그것이었다. 새 생명이 자라고 있는 그녀의 자궁과 불러오는 배의 충만함에도 불구하고 만숙은 마치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검은 구멍 같이만 여겨졌다. 


무엇이 만숙이를 그토록 공허와 자학으로 몰아가게 했는지 누구나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만숙이의 육체에 가해진 폭력의 검은 손길이 누구의 것인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욕망의 성격을 쉬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숙이의 정신에 검은 얼룩을 드리운 자들이 누구인지도 또한 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검은 손길의 실체들을 짐작에만 근거해 털어 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검은 실체들은 도처에 검버섯처럼 퍼져 또 다른 만숙이를 잉태하겠지만 어찌할 수 없는 슬픈 현실이었다. 만숙이의 상처와 고통과 공포는 그녀 자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역설을 잉태했다.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비극, 만숙이의 모습이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이해하고, 이해받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것은 비극이었다. 만숙은 그것을 증거했다.   


그러나 끝까지 만숙이가 붙잡은 것은 그녀가 잉태한 아이였다. 그녀의 공허한 검은 가슴에서 잉태된 밝은 생명이기라도 하듯 만숙은 어린 생명을 꼭 붙잡고 놓지를 않았다. 그녀의 가슴으로 꼭 보듬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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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3 00:05

이선영주부 AM1080 '강인호의 터놓고 얘기합시다' 방송 내용



            아틀란타 라디오코리아 이선영주부 AM1080 '강인호의 터놓고 얘기합시다' 방송 내용


이명박 정부가 도대체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
도대체 이명박에게 국민들은 어떤 존재인지?
국민을 위해 사용해야할 권력을 가지고 이토록 국민을 기만한다면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한단 말인가?
이건 정말 아니다, 정말 아니다.

가능하면 난 흥분하지 않으려고 했다.
최소한의 양심을 믿으려고 했다.

그러나 실용이란 이름으로 생명마저 거래의 무시해도 될 만한 것으로
여기는 그러한 실용이라면 싫다.

나라가 발전하고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 참 좋다.
그러나 국민을 미래의 불안으로 내몰고 자존심마저 포기하는
실용이라면 정말,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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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2 18:34

[패러디] 'The King Salt' 폐하의 후한 beef 인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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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http://www.flickr.com/photos/davichi/234989757/

 

패러디 기사 원문: http://news.joins.com/article/3142575.html?ctg=1003
기사 워문을 읽어보시고 패러디 기사를 읽으시면 더욱 좋아요

다우너 도축관련 노컷뉴스 기사


[Ssangnom Ji's Blue Hut 단신] ‘The King Salt ’ 님의 후한 beef 인심


Juding Daily |기사입력 2009.05.12 01:24|최종수정 2010.05.12 10:30



[주딩일보 지쌍연] Blue House Secretary Wing(=Chicken Wing) 엔 10일부터 자정만 되면 2 hours 동안 쌍들리제가 at the same time by force 꺼진다. 사진 현상과 전기 절약이 그 reason인데 한정 없이 임기 내내 계속될 예정이다. 원망하는 secretaries 에게는 "커텐을 걷으면 국민을 위해 일을 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있을 수 없다. 달빛이 밝아 업무보는데 아무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질책이 거울에 반사된 것처럼 돌아온다. The King Salt 님의 사진 현상과 전기 절약을 강조하는 애국심에 따른 step 이다.


The King Salt 님은 오일 달러로 전세계의 부를 쓰레기통까지에도 채워놓던 시절 Main dish 가 McDonald's Burger였다. The King's SALT(The King Salt 님의 개인 회사)의 최고경영자(C대) 땐 Sultan 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Hotel Bar를 자주 찾았다. 술자리가 끝난 뒤 "술 한 잔이 a gallon of crude oil의 pirce 인데 (then 1500 US dollar)인데 왜 호텔 바에서 그렇게 비싼 술(100 year-old Valentine )을 마시자 하는지 도통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가 없다"며 for a long time 꼽씹었다고 한다. The King Salt 님의 과거의 모범적인 습관 탓인지 Blue House's Main Hall 에서 held 되는 banquet에서 almost always 선보이는 alcohol 은 사케 나 빼갈 , 또는 그 둘을 섞은 '사빼'이다. after King's Inauguration  멸치 하나 없이 고추장과 돤장만으로 안주를 삼으며 서민적으로 술을 마신 첫 family function story 도 sensational topic 이었다.


King's Palace 의 Main Buliding의 pillar의 높이는 35m이다. Ceiling이 high해서 한 floor이 nearly 3 floors에 almost equal 하다. 에스컬레이트가 있는데, The King Salt 님은  2층 Office 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exercise를 병행한 것이지만 습관화된 '사진 현상정신'이 more strng reason이라고 한다. In the past, The King's SALT 자신의 office도 stairs를 very often use했다고 한다. However, The King Salt 님에게 관대하고 크게 선심쓰는 게 있다. 바로 소고기 선심이라고 한다.


*신문 기사와 전기, 또는 허구의 차이를 지적으로 보여주는 Juding Daily

시간과 정력(energy) 절약상 기사 전문은 생략



한국에도 유사한 권력자가 있다고 하는데 비슷한 기사를 참조하세요^^

http://news.joins.com/article/3142575.html?ctg=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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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1 19:04

[꽁트] 방구알 회장, 똥 바가지 덮어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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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알 회장, 똥 바가지 덮어쓰다


자네는 이 사실을 알고 있나? 종이는 나무로 만들지만 똥은 동물이 만든다는 사실을 말이야. 종이인 신문은 식물성인 셈이고, 똥은 섭취한 식물에도 불구하고 동물이 배출한다는 면에서 동물성인 셈이지.


그런데 말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신문을 똥 보다 더 더럽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있으니 말이야,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놈이네. 신문을 한갖 똥보다 못한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인간의 문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신문에는 인간이 생산한 모든 문화와 문명이 집적되어 있지 않나 말야. 편집에 이용되는 최첨단 기술은 물론이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들이 소개되고 있지 않나. 이런 의미에서 말야, 신문 한 페이지를 본다는 것은 종잇조각 하나가 아니라 총체적인 인류의 역사를 본다는 것과 별 다르지 않은 셈이지. 자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군.


그런데 신문을 똥 보다 못한 존재에 비유한다는 것은 점잖게 말해서 납득할 수 없는 일이네. 자네가 웃는 걸 보니 점잖지 않게 말한다면 어떤 표현을 사용할까 상상을 하나 본데, 허허, ‘납득‘ 이란 말 정도로는 아주 부족한 정도라네. 하지만 이쯤하세. 내 입이 더러워 질테니 말야, 허허. 품위있게 놀아야 하지 않겠나, 허허. 아니 세상에 어떻게 신문이 똥 보다 더럽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거리 아무 곳에서 나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더라도 똥이 더 냄새나고 더럽다고 말할 걸세, 그렇지 않나? 자네도 고개를 끄덕이는군. 내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인간이 어디에 있겠나. 거리에다가 신문과 똥 둘을 놓아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다고 해보세. 사람들은 똥을 보고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피해가지 않겠나. 그런데 신문은, 오늘자 따듯한 신문이라고 하세, 사람들이 다 주워서 보려고 할 걸세. 이러한 행동에는 예외가 없을 것이네. 그래 이번에는 자네가 고개를 심하게 끄덕이는군. 혹 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 아니, 농담일세. 어떻게 진지한 자네가 내가 말하는 동안 졸기야 하겠나. 무안해 하지 말게, 그냥 농담이었으니. 아무튼 말야, 신문이 똥보다 더 깨끗하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이네. 아니 진리이네. 예외적인 행위나 반응이 없으니 말이네. 신문 보다 똥이 더 더럽다는 말은 진리라는 이 말이네. 만약 똥이 신문 보다 더 깨끗할 수 있다거나, 신문이 똥보다 더 더럽다고 하는 인간이 있다면 진리를 부정하는 미친 인간인 셈이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신문을 읽지 않았군. 자네 오늘자 신문 좀 가져다주게. 조중일보와 중동신문만 가져오게. 그 신문들이 그래도 좀 세련된 신문 축에 들지. 안 그런가?



*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주식이 50이나 빠졌군. 니미럴, 언제나 똥이 나를 엿멋이는군. 뭐 유기농용으로 쓰이는 똥을 무취, 무균으로 재가공하는 주식회사 <유기농>이 신문 일면에 헤드라인으로 나왔군. 어쭈, 그기다, <유기농>이 전면 광고를 실었군. 똥이 참 잘 나가네. 아니, 아니, 이건 또 뭐야. 조동일보 회장이 똥바가지를 덮어썼다고! 아니 신문사 회장이 똥을 뒤집어쓴 이유가 무언가? 이런 변고가 있나! 자네, 이 기사 한 번 좀 읽어 봐 주게. 갑자기 눈이 침침해 지는데.


“조동일보 방구알 회장이 어제 저녁 7시 30분 경 모 음식점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승용차에 타려는 순간 신원을 알 수 없는 괴한으로부터 오물 세례를 당했다. 현장에서 잡힌 괴한은 67세의 M씨로 밝혀졌다. M씨는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과정에서 방구알 회장의 조동일보가 자신을 똥보다 못한 인간으로 사회적인 매장을 시켰다고 항변했다.”


허허, 참, 방구알 회장 무슨 이유로 똥바가지를 덮어썼는지 궁금하군 그래. 자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군. 정말 궁금해 죽을 지경이네. 그리고 M이라는 작자는 똥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다는데 무슨 일인지 궁금해 미치겠군. 조동일보로부터 똥보다 못한 인간으로 사회적인 매장을 당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다소 문제가 복잡해지겠군. 경찰 조사과정에서 ‘사회적인 매장’ 의 이유가 밝혀지겠군.



*


M씨가 분노한 조동일보 똥 관련 문제의 기사 발췌:

똥을 마셔버린 M씨, 음주 운전 단속 피하기 위해 차에서 똥 누고 바카스와 섞어 마시다. 음주 단속을 하던 경찰관은 M씨의 입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서 추궁한 결과 음주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똥을 마신 사실이 밝혀졌다.


M씨의 항변:

“치아와 목이 좋지 않아 입에서 항상 똥 냄새가 난다. 입에서 똥냄새가 나자 경찰과 기자가 황당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사진과 함께 기사를 실어 결과적으로 본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내게 술이 원수라면 원수이지만, 어떻게 술냄새를 없애기 위해 차 안에서 똥을 누고 음료수에 타서 마실 수 있다는 말인가! 펜으로 정의와 진리, 객관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기자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또한 그런 기사를 쓴 기자말고도 편집 과정상의 기자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조동일보의 방구알 회장의 방관적 자세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묻고 싶었다. 고개를 들고 다니지를 못했고 직장에서도 실직되었다.”


*


허허, 이번엔 신문이 똥 보다 더 더러운 짓을 했구만, 아마도 기자가 술에 만취해 기사를 쓴 모양이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똥을 마셨다는 허황된 기사를 쓸 수가 있겠나 말이야, 허허, 참. 우리나라의 정론지 조동일보가 실수를 했구만 실수를, 쯧쯧. 자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군. 앞으로 조동일보 방구알 회장과 만날 때는 똥을 마셨단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구취 제거제를 하나 구입해야 겠어, 허허. 그렇지 않나? 자네도 필요하면 구입하게나. 아무튼 방구알 회장 똥 때문에 한 동안 똥냄새 제법 풍기겠는 걸, 허허. 

(2008.5.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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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1 18:23

명언과 망언 사이(2008.5.11)



 

명언과 망언사이 (2008.5.8)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말들이 영혼처럼 인간의 주위를 맴돈다. 보이지 않는 그 말들은 윤색되고, 반복되면서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죽되 말들은 살아 인간의  입에서 항문을 거쳐 인간을 전신을 꿰어 버리기도 하고, 마취제처럼 코 속으로 스며들어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삶을 전율하게도 한다.


이러한 말들, 인간의 주위를 감도는 수많은 말들이 나의 영혼을 좀 먹지 않도록, 온전히 나를 지켜 주기를 소망하면서......


술 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고기이다. 고기하면 또 술이 필요한 경우가 많다. 술을 마실 경우에는 안주 삼아 소고기, 돼지고기등을 먹는 경우가 많으며, 고기를 먹을 경우는 고기자체를 연하게 하거나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술을 곁들이거나, 소화를 돕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소맥(소주 맥주 혼합주)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니 잘 알려졌다기 보다 여러 번의 언론 보도가 있었다. 청와대에서 열린 18대 총선 당사자와 만찬에서 요란한 소맥주 파티가 벌어졌다고 한다. 언론의 파급효과가 크기에 아마도 다수의 국민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청와대에서 이렇게 술을 흥건하게 마신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이 떠오른다.


『상산록(象山錄)』에 이르기를, 술을 좋아하는 것은 다 객기(客氣)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맑은 취미로 잘못 생각하는데, 술마시는 버릇이 오래 가면 게걸스러운 미치광이가 되어 끊어려 해도 되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마시면 주정부리는 자가 있고, 마시면 말 많은 자가 있으며, 마시면 잠자는 자도 있는데, 주정만 부리지 않으면 폐단이 없는 줄로 여긴다.……수령이 된 자는 술을  끊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다산연구회 역 p.52)


“청와대 상춘재에서 진행된 만찬 회동은 ‘소맥’(소주와 맥주) 폭탄주가 돌아가는 가운데 적지 않은 농담과 웃음이 터져나오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2시간가량 진행됐다.”(서울신문, 2008.4.26.5면)


기사전문: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42600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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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 보니 술에 대해 쓰고 있는지, 소에 대해 쓰고 있는지 미안할 정도이다. 소에 대한 글이고 광우병을 보는 소의 관점에 대한 글이다.


작금의 광우병 사태는 근본적으로 건강과 관계된 음식물(소고기) 자체에 대한 문제이지만,  정부의 정직성과 국민의 자존심이란 음식 외적인 측면에서 동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예민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일단은 감정을 자제하면서, 좀 더 다른 각도, 즉 소의 시선으로 광우병과 관련된 명언과 망언을 살펴보기로 하자.


소들은 정말 비참하다. 그들은 인간들에 의해 육식을 강요당하면서 그 결과로 발생한 억울한 질병에 대해 Mad Cow 라는 모욕을 당하고 있다. 소들은 결코 미치지 않았다. 인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래놓고선 잔인하게 도축되어 갈갈이 찢겨 버려진다. 이러한 행위는 소들에 의해 진정 용서받을 수 있는 일일까?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이란 미명하에 생태계의 선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면서 소들을 대량으로 사육하고 도축하고 있다. 소들의 사육을 위해 목초지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소들의 도축에도 포드 시스템인지 뭔지 하는 생산 시스템이 사용되고 있다. 대량으로 도축해야 하기에 효율적인 도축 기술(technology)이 개발되었다. 기술이란 꼭 발전되어야 만 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기술이란 소들에겐 잔인한 대규모의 살상 도구가 된다. 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이다.



버시바우 미대사가 “미국에는 광우병 환자 제로”(2008.5.8. 고려대 특강) 라고 했다. 이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들이 가장 대량으로 아주 잔인하게 도축되고 동물성 사료가 유통되는 나라의 대사가 이런 말을 하는 태도이다. 소들을 대량으로 효율적으로 도축하기 위해 최첨단 기술이 계발된 미국을 소들의 관점에서는 어떻게 여겨질 것인가? 


만약 어떤 외계의 존재가 식량 부족으로 강압적인 힘으로 인간을 소처럼 사육하고 죽인다고 생각해 보라? 외계인은 인간이 항거조차 할 수 없는 억압적이고 잔인한 존재라고 하자. 인간이 소들처럼 살육당한다고 상상해 보자.


아니 이러한 상상은 필요 없다. 인간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무수한 동족의 살육을 목격할 수 있다. 서로를 직접적으로 식용하기 위해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저들만이 살기 위해 동족을 비참하게 죽여 온 유일한 존재들이 인간이다.


인간들은 식량 부족을 외쳐대지만 사실은 식량 상업주의를 통한 자본의 축적에 혈안이 되어있다. 아프리카 등 후진국들과 선진국의 빈곤층은 굶어 죽고 있는 반면에 먹고 살만한 인간들은 과도한 육류 섭취(주된 원인이 아닐까 한다)로 비만에 걸려 다이어트다, 웰빙 식단이다 , 심지어는 지방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하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번 광우병 사태에 직면하여, 육류를 좀 줄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미국부터 솔선수범을 했으면 좋겠다. 햄버거는 실용적인 음식이지만 참 잔인한 음식이다. 실용적이란 말은  육류에 관한한 대량도축과 잔인함을 의미한다. (2008.5.9  K모씨)



***


“미국에는 광우병 환자가 제로다. 거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 미국의 광우병은 캐나다로부터 수입된 소에서 발병한 것이었다. 그나마 97년 동물성 사료를 금지하는 국제수역사무국(OIF) 규정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전혀 없었다.”


한국이 쇠고기를 수입하면 우리는 반도체 ․ LCD등을 수입한다. 이것은 공정한 협상이다.(2008.5.8. 고려대 특강)

"광우병 걸린 소일지라도 그래서 등심스테이크도 해 먹을 수 있고, 우족탕, 꼬리뼈 곰탕 모두 안전하다는 것."(심재철, 2008.5.7)


방송전문: http://news.kbs.co.kr/article/politics/200805/20080507/1556826.html



*가치 판단유보


“어느 나라가 자기 국민을 해치는 고기를 사다가 먹이겠느냐. 쇠고기가 국민에게 해가 되면 당연히 수입을 안 하는 거다.”(2008.5.8. 이명박 대통령, 기자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이왕이면 32개월짜리 몬태나산 쇠고기로 하자”(이명박 대통령, 부시와의 만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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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8 23:36

[꽁트] 낙원으로 가는 길




낙원으로 가는 길



소풍날의 아침 하늘은 참 깨끗합니다.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눈을 부시게 합니다. 날씨 탓인지 아이들이나 아이들을 따라나선 부모님들의 발걸음도 가벼운 듯 합니다.


소풍의 목적지는 유치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공원입니다. 작고 아늑한 공원으로 지상 위의 천국이란 뜻인 '지상낙원'이란 푯말이 정문에 걸려있습니다. 아이들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공원입니다.


하지만 아쉬움이라면 아이들이 걸어야 할 그 20분 거리의 길이 약간은 번화한 곳이란 것입니다. 도시의 한 모퉁이 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지상낙원’으로 가는 길의 이미지와는 약간 걸맞지 않다고나 할까요.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입니다. 공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이고 보면 질주하는 차들은 위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주하는 자동차들을 보고 상어 같다고 한 찬현이의 말이 떠오르는군요. 오늘 아침 차들을 보니 찬현이의 비유가 실감이 납니다. 아마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의식 같은 것 때문이겠지요.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부모님들이 함께 따라 나선 길이니 크게 걱정은 안됩니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참석했지만 항상 예외는 있기 마련이죠. 부모님과 함께 참석하지 못한 아이들이 2명 있는데 엄마가 없는 희천이와 주말에도 맞벌이를 하는 영미가 그들입니다. 저는 부모를 대신해 그들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다들 부모들의 손을 잡거나 곁에 있으니 질투도 하지 않으니까요. ‘지상낙원’으로 가는 아침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볍습니다.


유치원 정문을 나와 도로가로 들어설 무렵 게시판에 붙은 영화 포스터를 보고 희천이가 물었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원색적 본능>이었고 제목 밑에는 <도발적인 섹스>란 선전용 문구가 적혀있었습니다.


"선생님, 섹스라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현명한 대답을 준비해 놓지 못하고 있던 터라 약간 당황했지만 대답을 해주어야 했습니다.


"희천아, 영어로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알지? 그 식스의 사투리란다. 알겠니?"


여섯 살 난 아이에게 이런 터무니없는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말은 러브란 말이었지만 괜히 말꼬리만 잡힐 것 같아 그만두었죠. 일단은 위기의 모면이 중요했으니까요. 내일 다시 설명해 주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유치원에서만 생활하던 우리들에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 셈이지요.


"선생님, 영어에도 사투리가 있어요? 영어는 다 영어잖아요?"

"사투리가 있지. 희천이 네가 쓰는 사투리도 다 한국말이지 않니."


희천이는 잘 알았다는 표정으로[섹스에 대해선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이번엔 그림이 이상했나 봅니다. 남녀가 벌거벗고 함께 끌어안고 있는 그림이었으니까요.


"왜, 사람들이 벌거벗고 있어요?"

"응, 그건 말야. 좋아하기 때문이지."


순간 희천이가 잡고 있던 손을 뿌리치고 옷을 벗으려고 했습니다.


"선생님도 옷 벗으세요. 절 좋아하잖아요?"


희천이의 행동은 장난이었지만 희천이의 모방이 아주 창의적(?)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포스터를 보고 바로 응용을 하는 희천이가 어찌 창의적이지 않겠습니까? 나는 녀석의 윗도리를 입혀주며 생각했습니다.


‘이 녀석아! 아직 지상낙원은 멀었단 말야! 벗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곳 말이야, 요 녀석아!’


"선생님은 부끄러운 거죠?"


그렇게 말하고 히히덕거리는 녀석이 왠지 천진난만함을 잃고 있는 듯 했습니다. 저의 마음을 모두 다 읽고 있다는 듯한 음흉한 목소리 같았으니까요. 사소한 것을 크게 보는 제 성격 탓이겠지만 벽에 붙어있는 영화 포스터 하나가 아이들을 많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엔 영미의 차례였습니다. 참으로 예상하지 못한 질문의 공세였던 겁니다. 영미가 더듬더듬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기 러...브...호...텔이 뭐예요?"


현실 도피적인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빨리 아이들을 ‘지상낙원’에서 뛰놀게 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섹스 보다는 쉬운 질문이었지만 그래도 만만찮은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쉬는 곳이라 간단하게 대답하려 했지만 너무 두리뭉실한 듯해 사람들을 여행객들로 바꾸어 놓았죠.


"응, 여행객들이 쉬었다 가는 곳이란다."

"선생님 그럼 저기 알...프...스...모...텔...이 뭐예요?"


당황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질문 같았습니다. 조금 전 대답에 여행객으로 바꾼 것이 자기 함정을 파고만 꼴이 되었습니다. 약간의 시간을 끌기 위해 영미를 보고 웃으며 대답해주었습니다.


"응 그건, 여행객들이 쉬는 곳인데 말야 피곤한 차들도 함께 쉬는 곳이란다."

영미가 고개를 꺄우뚱거리며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럼 선생님, 러...브...호...텔...에는 차들이 쉴 수는 없어요?"


영미가 예리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음 그건 말야......"


다행히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던 건 희천이의 도움 때문이었습니다.


"계집애, 그것 두 몰라? 알프스는 멀리 있잖아, 멀리! 그래서 차들도 쉬어야 하는 거야, 이 바보야."


또 위기가 찾아들었습니다. 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잠깐만요."


뒤돌아보니 이번에는 뒤 따라 오던 방귀 대장 방규 녀석이었습니다. 방규 녀석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있었습니다. 작은 카드 같았습니다.


‘방규 이 녀석아, 또 카드냐.’


방규 녀석은 카드 만들기에 소질이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카드를 방귀를 뿌리듯이 온 동네에 뿌리고 다니는 녀석입니다. 참 순박한 녀석입니다. 헌데 이번에 건네 준 것은 카드가 아니라 명함 만한 크기의 광고물이었습니다.


<책임출장. 아가씨들 항시 대기. 맛사지로 싱그러운 하루를......>


낯이 뜨거운 광고물이었습니다. 여자들의 사진과 함께 전화번호가 큼직하게 적혀있었습니다. 길에 뿌려진 광고물을 주워 온 것입니다.


‘녀석, 엄마에게 가진 않고......’


선생님이란 존재를 신뢰했기에 옆에 있는 엄마를 제쳐두고 방규 녀석이 달려왔겠지만 기쁨보다는 원망이 앞섰습니다.


‘녀석아 엄마가 옆에 있잖아. 엄마가 때론 더 훌륭한 선생님이시란다.’


이렇게 한탄을 하며 퍼부을 질문에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평소에 이것저것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 후회되기도 했죠. 역시 방규의 입에서는 은밀한 방귀와는 달리 날카로운 질문이 흘러나왔던 겁니다.


"선생님, 맛사지가 뭐예요."


정말이지 거리에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상야릇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방규의 뺨을 두 손으로 가볍게 문지르며 말했습니다.


“음, 그건 말야. 뭉쳐있는 몸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거지. 요렇게 말야.”


정말이지 모두들 세계화에 걸맞은 질문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들 영어지 않습니까. 러브 호텔, 알프스 모텔, 맛사지. 또 어떤 녀석이 어떤 질문을 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영어임이 분명하리라 생각했죠. 비록 질문은 아니었지만 영어라는 추측은 적중했습니다. 영미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파라다이스예요, 파라다이스."


영미는 ‘지상낙원’을 파라다이스로 영역(英譯)했던 것입니다. 뭐 어떻습니까. ‘지상낙원’을 파라다이스라고 한 게 말입니다. 아이가 그렇게 말했다면 얼마나 재치있고 애교있는 행동입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비록 한자이긴 하지만 지상낙원이란 표현을 양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 그렇구나. 지상낙원이로구나. 너희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곳이니, 자, 어서 달려가 마음껏 뛰어 놀아라, 애들아!"


이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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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22:44

[꽁트] 신문이 아주 가끔 똥 보다 더러운 이유(4)





 
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4)

나는 신문으로 똥을 닦는다. 신문으로 똥을 닦는 이유는 실용과 분노의 해소이다.

나는 가난하다. 그러나 휴지를 살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솔직히 휴지를 사느니 다른 생필품을 하나라도 더 사는 것이 실용적이다. 휴지를 사느니 라면이나 노란 무를 사는 것이 더 실용적이란 말이다. 내 처지에 실용적으로 놀아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똥 닦고, 코푸는데 휴지 따위 구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이렇게 투덜거렸다.

“어휴, 이젠 당신도 좀 휴지로 똥 닦아요.”

이게 아내의 유언처럼 되어버렸다. 그래도 지금 나는 휴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실 아내의 말은 과장이었기 때문이다. 내 궁색함에 대한, 아니 고집에 대한 원망이었던 거다. 나는 사실 가끔씩 휴지로 똥을 닦았다. 누워있던 아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신문으로만 똥을 닦는다. 나는 몸 져 누워 있던 아내를 위해 휴지를 대량으로 구입해 놓았었다. 아내가 죽자 나는 휴지를 어떻게 처리 할지 고민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내가 쓰지 않는다면 주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휴지를 공중 화장실 여기저기에 놓아두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휴지를 사회에 헌납한 셈이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 휴지가 돈이라면, 내게 아무 쓸모도 없는 휴지가 돈이라면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에게는 얼마나 도움이 될까하고 말이다.

휴지로 똥을 닦을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솔직히 널려있는 게 휴지다. 종이를 수입하는 나라지만 널려 있는 것이 종이라는 사실은 좀 괴상하다. 심지어 부드러운 휴지조차도 식당의 화장실이나 은행의 로비에 널려있다. 이런 휴지 좀 빼다가 똥을 닦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신문으로 똥을 닦는다. 두 손으로 신문을 비벼서 부드럽게 만든 뒤 똥을 닦는다. 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나 사진이 있으면 두 손으로 더욱 힘껏 비벼서 닦는다. 신문을 비벼서 똥을 닦으면 그렇게 마음이 시원 할 수가 없다. 특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특정한 신문들을 좍좍 찢어서 비벼서 똥을 닦으면 더 좋다. 변기에 앉아 비벼댄 신문지 조각을 펴서 가끔씩 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는 상상하곤 한다.

‘수백억 재력가가 실용 운운하며 니미럴 뒷구멍에서는 술값으로 수백만원을 뿌려댄다면, 수백억 정치가가 니미럴 뒷구멍에서는 자신의 홍보로 수억, 수십원을 뿌려댄다면 그 뒷구멍은 뭐로 닦는가? 가난하고 불행한 자들을 위해 헌신해야할 종교인들이 입으로는 예수의 희생과 사랑을 전도하지만 뒷구멍으로는 호의호식 한다면 그 뒷구멍은 금박지를 입힌 뒷구멍인가? 입으로는 내세우는 게 우리같은 서민이지만 뒷구멍으로는 서민이 안중에도 없는 짓거리라면 그 뒷구멍은 도대체 뭐로 닦아야 하나.’

‘기자들 개**들도 마찬가지야. 신문 기자들은 죄다 홍보 요원들이야. 빌어먹을 타락하고 저속한 인간들을 고귀한 인간들로 만들다니. 궤변론자들이지. 뒷구멍을 혀로 핥는 자들이지.  똥고물을 핥는 거지. 너희들도 뒷구멍은 부드러운 휴지로 닦겠지.’

이러다 너무 감정에 빠져든 자신을 추스리라는 은은한 소리가 들려온다.

‘어이, 자네 뭐 그리 흥분하나. 세상사 다 그런 것 아닌가? 재력, 권력이 아무에게나 오는 건가? 하늘을 타고난 것이 아닌가? 그들이 그렇기 소니 뭐 그리 흥분 할 것이 있나! 감정 풀라구! 세상 적당하게 타락하고, 저속하게 살다 가는 거야. 권력자들이란 위선적이어야 한다구. 요사이 세상 발칵 뒤집고 있는 광우병을 보라구. 광우병 걸리는 것은 그저 재수가 없을 뿐이라네. 세상 다 그런거네. 소고기 싸게 공급해 준다는데 무슨 불만이 있나. 숭례문 불 났을 때도 책임진 놈 누구 있었나. 아무도 없지. 세상 그런거라구. 광우병으로 누가 죽더라고 자네가 걱정할 일은 아닐세.  ’그냥 재수가 없어 죽는 거라구. 또 책임질 놈도 없고 말야. 뭐 세상을 그렇게 어렵게 사냐구. 배고픈 소크라테스 그건 옛말이라구. 배푸른 돼지가 훨씬 세상에 부합하는 존재라네. 또 실용적인 존재라네. 실용적으로 살자구.‘

이런 상상을 하다가 간혹 밖에서 노크 소리라도 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대체로 이러한 상상의 뒤끝은 좋지가 않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한 나 자신을 한 없이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분노가 치솟아 주체 할 수 없는 심정으로 십중팔구 술집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을 닦을 때는 상상을 자극하는 정치기사들이나 가식적인 연예기사들은 피하는 편이다.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진이나 기사를 똥구멍에다 대고 똥칠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감정이 다소 누그러진다. 그러나 이내 슬픔이 몰려온다. 고작 이러한 짓거리나 해야 분노가 풀리는 무능한 늙은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똥이나 닦으며 분노를 삭여야 하는 누구에게 말하기조차 거북스런 더러운 방식에 자신이 슬프지는 거다.

그러나 더욱 슬픈 건 내 똥구멍에도 그 더러운(?) 잉크 냄새, 먹물 냄새가 베여드는 것이다.  그래서 신문으로는 똥도 닦기가 조금씩 불편해 지는 것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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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7 00:03

명언과 망언 사이(2008.5.5)




명언과 망언 사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말들이 영혼처럼 인간의 주위를 맴돈다. 보이지 않는 그 말들은 윤색되고, 반복되면서 인간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죽되 말들은 살아 인간의  입에서 항문을 거쳐 인간을 전신을 꿰어 버리기도 하고, 마취제처럼 코 속으로 스며들어 인간의 정신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삶을 전율하게도 한다.


이러한 말들, 인간의 주위를 감도는 수많은 말들이 나의 영혼을 좀 먹지 않도록, 온전히 나를 지켜 주기를 소망하면서......  2008.5.6


“정말 평화롭게 가셨다. 평화롭고 정말 예쁜 모습으로…”

(2008년 5월 5일 박경리 선생님 타계. 임종을 지켜 본 현대문학 주간 양숙진. 중앙일보 5월 6일 10면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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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선생 생전 모습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어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고 박경리 선생님의 유작시 ‘옛날의 그 집’ 중)


“정부가 협상 과정에서 예방적 차원의 문제들을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희생시키고 광우병의 위험을 국민의 선택 문제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하다”(브릭 토론방[아이디:endo], 중앙일보 5.6. 2면 재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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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http://kr.news.yahoo.com/servi 美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사법처리 방침 규탄 기자회견


“오늘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집회 정치집회 변질 땐 관련자 사법처리”

(한진희 서울 경찰청장, 중앙일보 5.6. 3면 인용)


“촛불집회 뭔가 정치적 의도 있지 않나? 놀이문화 부족해 중고생들이 많이 참석”

(정부 핵심 관계자, 한겨레 신문 5.5 인터넷판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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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http://kr.news.yahoo.com/servi



* 가치 판단 유보

“요즘 나쁜 어른들이 있어서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아요. 대통령 할아버지가 나쁜 어른들로부터 여러분들을 책임지고 지켜줄 거예요.”  (중앙일보, 2008년 5월 6일 11면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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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01 23:20

[꽁트] Break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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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lin, somewhere in Pankow 이미지출처:www.flickr.com/photos/ok6/2723

 



Breakthrough


실천이란 측면에서 보면 나는 비난받아 마땅한 인간이다. 대학 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온갖 이론으로 지적 유희를 누리고만 있을 뿐 인류가 직면해 있는 문제들에 대해 사실 나는 실천적인 해결을 도모한 적이 없다.

물론 대학 교수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대학 교수들은 이론과 지식의 현실적인 적용과 실천을 위해 투신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는 교수라는 타이틀을 직업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사명감’ 이나 ‘봉사’ 또는 ‘희생‘ 이란 단어와는 거리가 멀다.

내게 교수란 단어와 한 짝을 이루고 있는 단어가 있다면 ’안정‘ 이란 단어가 가장 적절하지 싶다. 내가 인류의 평화를 위해 무엇을 실천했던가? 없다. 내가 인류의 굶주림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던가? 없다. 내가 인류 삶의 터전이며 보고인 자연의 파괴를 온 몸으로 저지하였던가? 아니다. 좀 더 범위를 좁히더라도 나는 별 할 말이 없다. 내 주위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했는가?


내가 갑작스럽게 이런 생각에 빠져 내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고 있던 것은, 읽고 있는 뉴스위크 영문판의 ‘전쟁’ 에 대한 짤막한 칼럼 속의 한 단어 때문이었다.

Breakthrough. 왜 이상하게 생겨먹은 영어 단어 하나가 갑자기 나의 온 존재를 이토록 사로잡는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기에 그럴까? 예전에도 가끔씩 나에게 이런 따위의 일이 일어나곤 했다. 단어와는 성격이 다른 것들이지만 죽어있는 벌레나 벽지의 무늬나 변기로 떨어지는 소변 줄기 같은 것들이 갑자기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말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것이라 자위하면서도 나를 갑자기 사로잡는 그 대상에 대한 반응에 감상적이라거나 심미적인 이름을 달아주기에는 너무 편집적이고 병적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뿌리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영화의 한 장면이나 노래 가사나 낙엽 따위의 대상에 강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자연스러운 일인가? 예술가에게 있어 그러한 현상은 현현이라는 이름으로 가치를 발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의 이런 현상은 병적인 편집증에 불과할 뿐이었다. 아니, Breakthrough 같은 쓸데없는 단어에 대학교수가 어떠니, 실천과 이론이 어떠니, 사명감과 희생이 어떠니 하고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병적인 편집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대학교수로서 나의 존재가 어때서? 나는 나름대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 나는 저항을 해보지만 별 소용이 없다. 편집과 우울이 다시 나를 지배해 버린다. 그러니 나는 그렇게 피곤한 존재로 운명 지워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까지 하게도 된다.

아무튼 Breakthrough, 이 단어의 뜻은 봉착된 문제나 난관 등의 돌파를 뜻한다. ‘돌파’ 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가 괜한 생각과 감정의 비약을 불러일으키면서 자신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적 동기는 의식으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돌파, 돌파, 하고 힘주어 중얼거리면서 눈을 지긋이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뭐해요! 화장실 전세 내었어요! 빨리 나와요.”

“알았다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뭐, 그리도 급해!”


나는 아내에게 몇 마디를 더 투덜거리고는 꽉 막혀있는 항문을 뚫어보려고 힘을 주었다. 염소 똥 같은 작고 딱딱한 똥 덩어리들 몇 개가 변기 속으로 떨어졌다. 아, 이 지긋지긋한 변비! 왜 이렇게 꽉 막혀서 나를 괴롭히냐 말야.

생각건대  Breakthrough 라는 단어는 지긋지긋한 내 변비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의식을 상징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나는 영어 단어 ‘Breakthrough’ 를 변비라는 생리적인 문제에 아주 섬세하고 실용적으로 적용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일 수는 없을까? 지식은 쓰이기 위해 존재하고, 나는 그것을 내 삶의 한 가운데서 소박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자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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