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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9 18:09

[꽁트] 러브 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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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레터
 

당신을 떠나온 지가 몇 일이 되었군요. 겨우 몇 일인데 벌써 이렇게 당신이 그립기만 하니 어떻게 한 달이란 기간을 참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는군요. 사랑스런 당신의 얼굴이 그리워 지금 이 펜을 들고있어요. 정말이지 당신이 보고 싶어 한 순간의 호흡도 어려울 지경이오. 공기보다도 더 소중한 당신을, 당신을 떠나온 지금에야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오.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이 사악한 고독과 고통을 떨쳐버리고 싶어요.

지금은 늦은 밤, 모두가 잠이 든 밤이오. 창문 밖으로 잠에 겨워 졸고 있는 별들만이 눈을 깜빡이고 있어요. 잠이 많은 미인, 사랑스러운 당신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겠지만 나는 당신 생각으로 괴로움을 쓸어 내리고 있어요. 이 펜 끝이 얼마나 떨리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이 펜 끝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이 편지지 위를 미끄러지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것이오. 나의 모든 체취와 마음을 이 펜 끝으로 전하고 있음을 당신을 알아야 할 것이오. 그랬기에 그 흔한 컴퓨터의 활자를 빌리지 않고 자필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라오. 자판기를 두드려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마치 큰 죄악을 저지르는 것만 같아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이건 정말이지 진심이오. 당신을 위해 오직 나의 가슴으로 이 편지지 위에 적고 있어요.

지금 당신이 없는 밤, 나는 너무나 고독해 위스키 잔을 홀짝이고 있어요. 당신을 생각하며 당신의 그 아름다운 두 눈과 입술과 불그레한 두 귀와 흰 목덜미를 생각하며 술잔을 들고 있어요. 육감적이라 생각하지 말아주오. 당신을 내 가슴속에 꼭 껴안고 싶은 것은 타락한 육감이 아니라 순수한 바램인 것을......또 당신을 위해 노래를 틀어 놓았어요. 정말이지 당신을 닮은 아름다운 멜로디라오. [에브리딩 아이 두, 아이 두 잇 포유], [하우 딮 이즈 유어 러브] . 난 이 노래들을 들으며 당신을 느끼고 당신을 어루만지고 있다오. 혹 지금 당신이 어떤 이유로 깨어있다면, 잠들지 못하고 있다면 이 노래 소리들 때문일 것이오. 당신을 위해 틀어 놓은 이 노래들 때문일 것이오. 우리 둘은 하나이기에 당신의 귀에 이 노래들과 내 손길이 느껴질지도 모르겠소.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지금, 당신을 볼 수 없다는 그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내가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하고 있다오. 이 편지 속에 나의 사랑이 타고 있음을 느낄 것이오. 당신을 위해 모든 것들을 다할 수 있다오. 당신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면 아마도 그것들이 너무나도 은밀하기 때문일 것이오. 지금 나는 당신을 향한 사랑 보다 더 값진 것을 소유할 수 없어요.

오, 사랑하는 당신, 나의 구세주,  나는 은밀하게 내 사랑을 당신에게 바치고 싶기에 이렇게 깊은 밤, 이 어둠에 숨어 편지를 쓰고 있어요. 지금 눈을 감고 당신을 생각해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을 생각해요. 우리는 언제나 하나여야 하며 하나로 살아갈 것을 서로에게 맹세하지 않았소. 지금 내 곁에 당신은 없지만 분명 당신은 내 가슴속에 있다오. 당신을 내 심장보다 더 사랑하오. 당신 몸은 어때요. 부디 건강해야해요. 출산을 앞두고 말이오. 예쁜 딸아이면 좋겠어요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혁진이는 유치원에 잘 다니고 있는지 궁금하오. 녀석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아요. 혁진이는 내가 떠나는 날 가지 말라고 공항 바닥에서 떼를 쓰고 울었는데 그날 어떻게 녀석을 다독거렸는지 궁금하군요. 녀석 고집 센 것은 나를 닮은 듯 한데 조금씩 나아지리라 믿고 있어요. 어제 혁진이가 체육관에서 청색 띠를 땄다고 전화를 했더군요. 혁진이가 태권도에 재미를 붙이는 게 얼마나 가슴 뿌듯한지 모른다오. 또 당신을 닮아 눈망울이 초롱하고 재기가 번뜩이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른다오. 당신의 노력과 집념 때문일 것이오. 아버지로서 자식 교육에 약간은 소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당신은 무척 지혜롭고 슬기롭게 극복해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오. 내가 출장이나 연수다 해서 해외로 떠돌아다니는 사이에 당신이 혁진이에게 쏟은 사랑은 이루 헤아리기가 어려울 것이오. 당신에게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와 사랑의 키스를 보내오.
 
당신 배속에 있는 둘째 애 출산 예정일은 모레로 알고 있는데 건강하게 출산은 할지, 아니 어쩌면 지금쯤 출산을 했는지 정말이지 궁금해 미치겠어요. 딸애였으면 좋겠는데......하느님의 뜻에 맡길 수 밖예요. 당신도 언제나 딸이기만을 기도했지요. 당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딸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어요. 오늘 당신에게서 연락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출산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내일 당신에게 전화를 하리라. 이 편지를 받게 될 때는 우리 둘째 아이 출산 얘기는 지난 얘기가 되어 있겠군요. 아무튼 내가 당신 떠나 온 동안 출산의 고통을 더해준 것만 같아 죄스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너그러이 용서해 주길 바랄 뿐이오. 혹 딸이 태어나면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딸아이를 사랑해 줄 것이오. 나 없이 당신 홀로 낳은 그 아이를 말이오. 물론 나 없이 산통을 겪었을 당신도 미치도록 사랑하고 있어요.


이제 밤이 너무도 깊어 사람들이 깨어날 시간에 이르렀어요. 내일을 기약하며 나도 잠 속으로 빠져들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펜을 놓기가 아쉽기만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 펜을 잠시 멈추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안녕, 내 사랑!



당신의 사랑하는 남편

프랑스 파리에서



추신: 당신과 태어날 아이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꼭 알려 주시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당신을 부
         르며......내 사랑, 복자!



“혹 당신 아내가 프랑스 파리에 함께 출장 온 여직원과 침대에 누워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진 않을까요.”


“어떻게 눈치채겠어. 여긴 프랑스 파린데. 마음 푹 놓으라구, 아가씨!”


“헌데 김 대리님 사모님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이렇게 멋진 편지를 다 받으시니. 김 대리님의 사랑과 함께 말이에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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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20:57

[생각 돌아보기] 자동차 문화는 선진국의 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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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문화는 선진국의 척도


한국에 자동차 문화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한국의 자동차 문화는 어떠한가? 만약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 요령에 앞서 우선 문화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국어대사전(금성판)에 의하면 문화란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양식 내지 생활양식의 총체‘ 라고 정의되어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자동차 문화는 곧 ‘자동차에 관한’ 사회 구성원이 습득하고 공유하며 전달하는 행동양식 내지 생활양식으로 정의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한 나라의 자동차 문화 수준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것이다. 형편없는 자동차 문화가 존재한다면 차라리 문화가 없다 라고 하는 편이 국가나 개인을 위해서 이익이 될법하다.


따라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국외용과 국내용 답변을 나누어 살펴보자. 우리에게 자동차 문화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자동차 문화는 어떠한가? 의 질문에 먼저 국외용 답변인 경우 자동차 문화가 존재하며 저질이다, 더럽다, 지저분하다, 야만스럽다, 폭력적이다, 이기적이다, 위협적이다, 살인적이다, 불법적이다, 무식하다, 독살스럽다고 하는 것 보다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국가 이익을 위해 좋을 듯싶다. 사실대로 이야기하는 것 보다 때로 악의 없는 거짓말이 편하고 나은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자동차 문화가 없다거나 조금 더 양보해서 형성되고 있는 중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도록 권하고 싶다. 그러나 국내용 답변인 경우 입을 닫고 직접 경험해 보라고 답하던지 가능하면 지하철을 타라고 권했으면 한다. 이 때에는 조금 솔직해 지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왜냐하면 외국인이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가 이익을 위해 참으로 중요한 답변 요령이다.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자동차 문화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문화가 존재치 않는다. 도대체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이라 하기에는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할게 없어 음주운전, 불법운전, 신호위반, 차선위반, 불법주차, 경적, 불친절 등을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하고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우리가 형편없는 것들을 습득하고, 공유하고, 전달하고 있는 꼴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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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7 01:19

[꽁트] 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3)


 


 
 
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3)

메리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캐럴이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형형색색 반짝이는 전구들이 가장 무도회의 화려한 조명등처럼 거리를 수놓고 있다. 세상은 신에 의해 축복받은 듯이 한 없이 아름다워 보이기만 한다.

새벽 2시경 압구정동 고급 레스토랑 나폴리 앞에서 지나가던 모 주점 웨이터 변강쇠(가명)씨에 의해 한 구의 아이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는 10세에서 13세로 추정되나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고 골격이 가늘었다고 한다. 치명적인 외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약물 중독이나, 심장마비, 영양실조 등이 직접적인 사인(死因)으로 추정되었는데 정밀 검시를 위해 아이의 시신은 국립과학 연구소로 옮겨졌다고 한다.

변강쇠씨에 의하면 아이의 시신은 여러 장의 신문지로 덮여있었다고 전해진다.

25조원을 스위스의 비밀계좌로 빼돌린 딸락 그룹 김딸락 회장이 그리스 나폴리의 한 호화 별장에서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회사 부실 경영에 대해 책임지기는커녕 호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딸락 그룹의 노동자들에게는 쥐약을 먹인 꼴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조속한 시일 내에 김 회장을 체포해 적절한 사법적 조치를 취하고 은닉해 놓은 25조원의 재산을 환수할 것을 천명하였다. (세계 타임즈)

정부는 재정 자금을 풀어 빚을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실정이다. 이미 1백 40조원을 투입했고 그 부담이 엄청나다. 200X년까지 갚아야할 정부보증채의 이자와 국채, 국내외 차입금이 각각 26조원에 달한다. 또 공적자금 원리금 상환이 본격화하는 200△년과 200♡년에는 그 규모가 39조 5천억과 33조 8천억으로 늘어난다. 여기에 국민기초생활 보장제도의 시행 등으로 돈 쓸 곳이 많은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튼 지금까지 투입한 공적자금이 약발을 받아 순조롭게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고작 몇 마리의 쥐들이나 죽이는 쥐약 꼴이 되지 않도록 온 국민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중앙신보)

최근 쥐약이 품귀현상이라고 한다. 쌀소비가 줄어들고 있는 일반 시민들의 부엌에서 쥐가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오히려 쥐약 소비는 증가하고 있다고 하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정을 알아보니 쥐약을 먹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왜 하필 쥐약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분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국제경제)

두 정치인들의 쥐약논쟁이 화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한민족당의 박동개 의원이 [쥐를 죽이는 데는 쥐약이 최고]라는 주장에 대해 새밀레니엄당의 김쥐동 의원이 [쥐를 죽이는 데는 농약이 최고]라고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의 논쟁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쥐약업계와 농약업계로 쥐똥이 튀지 않을까 걱정된다. (아시아신문)

한 농부가 세상에 쥐들이 너무 판을 친다고 하면서 농약을 먹고 자살하는 끔직한 사건이 있었다. 늘어나는 쥐들이 자신의 농작물을 파손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자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 농부는 정부청사 앞에서 쥐약을 뿌려대며 농성을 하다 경찰이 몰려오자 농약을 마셨고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일요뉴스)

올해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1~2 억을 호가하는 수입차의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다. 지난달 문을 연 S 수입업체의 경우 12월 한 달 동안 120여대의 수입차 판매 실적을 올렸다. 올해 150대 판매를 무난히 넘길 전망이다. (조선만보)

아이의 검시결과가 나왔다. 국립과학 연구소 소장인 나 천재 박사의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사인은 위에서 다량 검출된 쥐약이었다고 한다. 쥐약은 볶음밥과 함께 섞여있었다는데 나폴리 식당 지배인에 따르면 식당 주위에서 틈틈이 식당으로 들어와 설쳐대는 쥐들을 잡기 위해 놓아둔 미끼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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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5 18:12

[꽁트] 잠자는 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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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거북

출발 선상에서 그 둘만이 살아남은 건 아주 큰 행운이었다. 확률 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원인이 곧 밝혀지겠지만 현대의학 쪽에서 보자면 미스터리일 것이며 생존의 법칙으로 보자면 불굴의 의지일지도 몰랐다. 과학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인간의 의지, 이를테면 암을 극복하는 경우나 무너진 건물의 잔해에 깔려 생존하는 경우의 인간 의지 말이다.

달려야만 살 수 있는 생존의 도상에서 그들은 오직 달리는 것에 맹목에 가까우리 만치, 아니 맹목적으로 집착해야 했다. 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생존의 방식이라면 오직 달리는 것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기에 그들 둘 만이 살아 남았음에도 그들은 조금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으며 오로지 뛰고 또 뛰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에겐 트랙경기, 즉 마라톤과 경보경기를 포함하는 육상이 가장 소중한 운동이었고 즐겨 보는 경기였다. 특히 장거리보다는 중단거리에 관심이 많았다. 물론 평소에 장거리 연습으로 지구력을 단련하는 녀석들도 많이 보았지만 대부분이 단거리를 통해 폭발적인 질주를 배웠고 중거리를 통해 지구력과 전술, 그리고 공정한 룰을 배웠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몰래 상대방의 두 눈에 이물질을 뿌리거나 고의적으로 충돌을 하거나 했지만 그것은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더러운 짓이었기에 공정한 룰을 가혹하게 적용했던 것이다. 달리기의 룰은 언제나 공정해야만 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들은 달리지 않으면 살수가 없었기에 달리기에 관계된 많은 정보들을 모으고, 그 정보를 달리기에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들이 존경하는 육상선수(?)로는 토끼와 거북이였다. 그들 둘 중의 하나는 토끼를 가장 존경하는 동물로 생각했고 다른 하나는 거북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솝이 의도했던 현상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토끼와 거북을 단순히 동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들 달리기의 교훈적인 의미로 언제나 되새기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이 토끼와 거북을 존경하는 것이 참으로 공교로운 사실이지만 더욱 공교로운 것은 토끼와 거북에 대한 그들의 상반된 해석이었다. 달리기를 그들 생존의 공통분모로 하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토끼와 거북에 대한 서로 상반된 해석은 다소 의외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달리기를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솝우화의 내용이 어떻든 토끼를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거북을 존경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어떠한 해석의 차이인지는 대충 이러했다.

"내가 토끼를 존경하는 것은 아량과 양보의 정신이다. 잘 뛰는 쪽에서 못 뛰는 쪽에게 보내는 그런 아름다운 마음씨 말야. 정말 토끼가 낮잠을 자다 거북이에게 진 것일까? 사실 토끼는 느리게 걷는 거북이를 위해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려고 했던 것이며 거북이와 함께 삶의 의미를 체험하고자 했던 것일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거북이는 영원히 토끼를 이길 수 없었을 거야."

"나는 거북이가 토끼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거북은 결코 토끼를 이길 수 없도록 운명 지워져 있어. 하지만 난 단지 거북이의 인내와 꾸준한 노력을 높이 산 것이지. 타고난 재능보다는 꾸준하고 성실한 노력이 더욱 값진 것이 아닐까."

그들이 토끼와 거북이에 대한 생각이 다르듯이 달리기에 대한 의견도 서로 상이했다. 이를테면 한쪽이 지름길을 찾아 약간의 모험도 감수한다면, 다른 쪽은 선배들이 이미 뚫어 놓은 기존의 길을 달리는 안정된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달리기가 그들 생존의 유일한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그 둘 만이 남아버린 현실에서 다른 쪽을 짓밟아야 한다는 그 탐욕스럽고 잔인한 현실이 정말 가슴이 아팠다. 비록 그들의 외부적 환경이 생존을 위한 거친 숨을 내쉬게 했지만 그들의 내면은 언제나 사랑과 위안과 이해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외부적 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정말이지 둥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살아가기 위해 서로를 짓밟아야 한다는 현실을 자꾸 뿌리치고만 싶어졌다. 둘은 여전히 얼굴을 마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토끼를 존경하는 쪽이 말했다.

"우리 둘 다 거북이가 되는 것이 어때?"

거북을 숭배하는 쪽이 몸을 약간 흔들며 대답했다.

"넌 토끼를 존경하잖아. 우리 둘 다 거북이가 되는 건 둘 다 불행해 지는 건 아닐까? 가슴 아픈 일이긴 하지만 우리 둘 중에 하나는 승자가 되어야 돼. 경쟁사회의 기본적인 원리가 아닌가 말야. 선의의 경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지. 승자가 없는 경쟁사회가 무슨 의미가 있겠니."

토끼를 존경하는 쪽이 다시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불행한 건 아냐. 둘 다 승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면 말야. 그렇게만 된다면 경쟁에만 의존하는 살벌한 사회에서도 벗어나지 않을까."

거북을 존경하는 쪽이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둘 다 승자가 되는 방법이 뭔데?"
"이미 말했잖아. 둘 다 거북이가 되자고. 둘 다 이 길 위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고 자는 거지. 승부에 집착하지 말고 말야."
"나 참, 잠자는 토끼는 들어봤어도 잠자는 거북이는 영 어색한데."
"좀 어색하긴 하지. 우리의 인식 속에 익숙한 상황이 아니니 말야. 하지만 묵묵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거북이가 휴식을 취하는 것은 결코 어색한 것이 아니라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니니. 이번 기회에 우리가 이러한 인식 범주를 한 번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잠자는 거북이를 말야!"

이제 그 둘은 ― 끝까지 숨기려고 했지만, '잠자는 거북' 의 창조자로서 그들의 이름을 이제 밝혀야만 하겠기에 ― 그 두 마리의 정자는 치열한 경쟁을 포기하고 거북들이 되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자들의 경쟁들은 또 끊임없이 이어지겠기에. 잠 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두 정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건대 난자가 하나 듯이 정자도, 아예 처음부터 건강한 것으로 하나만 만들어 서로를 죽이는 치열한 경쟁을 없애주시기를,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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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21:54

[일본영화] 자토이치(3)



                                         이미지출처: www.sung-ho.pe.kr

 

 

자토이치(3)

-마이너리티 리포트


맹인 자토이치는 로닌(浪人)이다. 로닌은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에 편입되어 정착하지 못한 사무라이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로닌은 소속된 조직이 없는 소속 외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바람처럼 이곳저곳을 떠도는 사무라이라고 하면 된다.


자토이치는 외관상 어떠한 조직에 소속되기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아주 현대적인 외관을 하고 있다. 머리는 노란 염색에 가깝고, 의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머리모양과 의복만을 놓고 보면 자토이치는 21세기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정도다. 그만큼 자토이치의 외관은 격식을 파괴하고 있다.   


약간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자토이치를 만나 자토이치를 통해 대리 복수를 하는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하나같이 사회의 비주류들이다. 우선 가족을 죽인 살인자들을 복수하려는 남매는 부모를 잃고 정처 없이 살인자를 찾아 헤맨다. 그런데 그 남매에게는 자토이치 이상의 이질적인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내인 남동생이 여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전도된 현상은 어린 시절의 충격(어른에 의한 아동 동성애, 경제적인 궁핍을 모면하기 위한 동성매매)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 동성애자들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여장하고 춤을 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호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는 하층민이다. 집단화된 도적 패에게 언제나 폭력을 당하는 경제적, 계층적인 약자이다. 자토이치가 신세지고 있는 집의 여주인과 거리의 상인들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집단화된 도덕 패들에 의해 자릿세를 뜯기고 폭행을 당하면서 하루하루를 영위해 가는 존재들로 삶이 핍박하고 고달프다. 이들은 소수라는 측면보다는 약자라는 측면에 더 강조점이 두어져야 하지만 절대적인 빈곤층이란 의미에서 마이너리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칼을 쓰지 못한다는 면에서 자토이치와 다를 뿐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이방인으로 도박과 술과 여자에 빠져 죽은 둥 사는 둥 살아가는 중독자들이다. 이들은 자의적으로 사회를 일탈한 존재로서 마이너리티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등도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사회로부터 냉대를 받는다는 의미에서)로서 동일한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들은 주로 자기 파괴적인 행위를 하지만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냉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격리는 범죄자에 대한 동일한 인식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범죄자가 감옥에 격리되듯이 병원 따위에 수용이 되는 것이다.


넷째는, 셋째의 부류와 다소 동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부류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바로 미친자들이다. 미친자는 자의적이지도, 어떤 지향성(술, 마약, 여자)도 갖지 않는 존재라는 면에서 중독자들과는 다르다. 자토이치가 머물고 있는 집 주위를 함성을 지르며 도는 이웃집 아들이 바로 미친자이다. 영화 <자토이치>에서 왜 이 미친자가 등장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만들어 낸 캐릭터는 결코 아니라고 본다. 하층민들 사이에서 떠도는 이들의 존재는 웃음만을 자아내기에는 서글픈 존재가 아닐 수 없으며 운명적으로 사회적인 냉대와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는 슬픈 존재이다.


이러한 사회적인 약자와 대척점에 있는 존재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이다. 이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를 현재적인 시간에서 그 대응 집단들을 살펴본다거나 변화된 모습을 살펴본다거나 도적이란 본질을 위장하기 위한 여러 장치들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알레고리로 자리잡는 것이다. 자토이치의 시대 상황이 과거이지만 해석은 지금, 여기에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영화는 언제나 현재에서 만들어지듯이 현재의 시점에서 하는 해석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대척적인 존재들(사회적인 약자 vs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 사이에 놓여있는 자가 자토이치라고 하면 어떨까? 이 자토이치가 도박을 즐기고, 여자를 즐기고, 관습을 무시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다면 자토이치는 마이너리티에 관용적인 자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 자신이 육체적으로 맹인인 약자라면 어떠한가? 판단은 영화를 보는 개인 각자의 몫이지만, 분명한 것은 자토이치의 몰골은 그 당시의 시점에서는 결코 보편적이거나 관용적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이다. 자토이치가 칼을 휘두른 것은 집단화된 도적 패거리지만 어쩌면 그것은 사회적인 약자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질성을 말살하려는 관습의 편견인지도 모른다. 분명 자토이치는 이질적인 것, 사회적인 역자들의 편에 서있다.


영화가 끝나면 사회적인 약자들집단화 된 도적 패거리가 함께 모여 춤판을 벌린다. 이 춤판은 두 가지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영화내내 자행되는 칼질에 대한 살풀이의 마당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더욱 중요한 것으로써 사회적인 약자들의 신명이다. 거창하게 말하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염원이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어 불탄 집을 다시 세우는 그 축제의 한마당은 바로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2008.4.20.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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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20 13:05

[꽁트] 사랑은 아프다




                                       사진출처: www.flickr.com/photos/micti2007


사랑은 아프다


아름다웠다, 그 노래는. 박자나 음정 따위 가식적 장식에 불과할 뿐, 투박하고 거친 그 음악은 정녕 아름다웠다. 귀로 듣는 노래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노래, 그랬다. 그랬기에 그 노래는 정녕 아름다웠다. 그 노래를 그토록 애잔하게 부른 그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잔인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날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났고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막 비행기를 탔다고 휴대폰에 메일을 남겼다. 퇴근 후 나는 그녀에게 나오라고 한 카페의 화장실에서 똥을 누면서 그녀가 남긴 메일을 읽고 말았으니, 운치 없고 분위기를 모르는 휴대폰이었다. 남녀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결말의 한 방식일 뿐이었지만 나는 가슴속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몇 방울의 눈물을 더 떨어뜨려야만 했다. 나는 치질이 심했고 그 통증은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치질의 쓰라림. 그녀와 나란히 앉아 어렵게 영화를 보던 시간들, 나의 속사정도 모르고 똥 침을 놓던 그녀의 천진난만함, 공원 벤치에서 그녀가 내 허벅지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세며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기나긴 시간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날이면 몰래 화장실에서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만 했던 기억들...... 이렇게 그녀는 깊은 고통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던 것이다. 변기 속을 내려다보니 붉은 핏물이 포도주처럼 진하디 진했다. 악화 일로를 걷는 치질! 나는 물 내림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꾹 눌렀다. 


내가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나는 카페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하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비극적 사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사랑하는 그녀는 떠났고 나는 밤새 술이라도 들이키며 슬픔을 달래는 작별의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설득했다. 치질 따위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일 업무관련 보고가 있으면 어때......하면서도 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나는 힘없이 아파트 입구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입구 왼쪽에 있는 경비실 창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초로의 경비원 김씨 아저씨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연배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그들을 지나치면서 그들에게 서려있는 이상한 슬픔의 기운을 감지했다. 김씨 아저씨도 치질일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0층 버튼을 부드럽게 눌렀다. 버튼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는 신경질을 꾹 참았다.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카펫 위에 대자로 엎드렸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밀려왔다. 잊으려 잊으려해도, 후끈거리는 치질 덩어리가 느껴졌다. 아침에 차고는 시간이 없어 갈지 못한 축축해진 생리대가 불결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아, 이런 상태 위에 더해진 처절한 사랑의 비극이라니! 이런 고통 위에 그녀와의 작별의 슬픔이라니! 그녀는 이런 착잡한 나의 심정을 알기라도 할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얼마나 건조했던가, 철없었던가!


“나를 치질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그냥 니 머리속에서 지워버려. 아니, 잘라버려. 나 보다 좋은 여자 만나.”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고통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거실 벽면에 부착된 인터폰으로 혀가 꼬부라진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실수로 인터폰의 전원이 켜진 것 같았다. 김씨 아저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끝내 당신은 떠나는구나! 나이 들어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더니...... 자식들 다 컸겠다, 임자도 이제 자유를 누려야지, 암. 나 같은 사람 만나 고생만 실컷 하고는......젊어선 술에 절여 사는 남편한테, 늙어선 애먹이는 자식들 때문에 호의호식 한 번 못해보고......딱(탁자 위에 병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 카~~. 아이구, 처량하구만. 그래, 뭐 혼자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엣사아공~~]


나는 아저씨의 노랫가락이 정말 좋았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은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김씨 아저씨의 황당한 행동에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상상력을 발동해 보고 싶지만 치질의 고통이 워낙 깊어 그만두련다.) 사람들은 이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는 아저씨의 모습, 그 모습을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이 후로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첨언: 나는 그날로부터 3일 뒤에 있었던 반상회에서 아저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비난과 질책과 황당함과 짜증과 욕설과 매도가 반응의 전부였다.(*)
* 이전 글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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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8 21:30

[꽁트] 두더지 모텔 403호, 고호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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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의 <밤의 카페 테라스>

 

 

두더지 모텔 403호, 고호의 그림


그녀가 다가와 “진한 커피 한잔해요.”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것 봐라, 하고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진한 커피 한잔해요.’ 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촌스러운 표현이긴 하지만 여자를 꼬실 때 언제나 ‘진한 커피 한잔해요.’를 낚시 바늘의 지렁이 미끼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진한 커피 한잔해요.’ 의 의미는 미끼가 아니라 아주 순진하고 애교있는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진한 커피 한잔해요.’ 가 아니라 다른 표현으로 다가왔더라면 그는 그녀의 제의를 거절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부모만큼이나 애지중지 사용하는 ‘진한 커피 한잔해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와의 예사롭지 않는 관계를 상상했다. 헤어졌던 쌍둥이가 다시 만난 것 같은 감정이었다고 할까. 갑자기 그녀가 낯설지 않아졌었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카푸치노를 주문했을 때, 그는 요것 봐라, 하고 더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언제나 카푸치노를 주문했고, 상대에게 카푸치노는 알 파치노가 즐겨 마시는 커피죠, 라고 늘  말했었다. 그러면 상대는, 알 파치노를 좋아하는가 보죠, 하고 물었고 그는 카푸치노를 들이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은은한 시선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대단한 연기죠. 대단한 카리스마죠.”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의 그런 대단한 연기와 카리스마는 아니지만 마스크에 넘어갔다. 그렇게 사용해온 카푸치노를 그녀가 주문했던 것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그에게 알 파치노와 대단한 연기의 여지는 남겨 놓았다. 그녀는 카푸치노를 좋아한다고 했다.


“아마 인생에 거품이 없다면 재미없을 거예요. 난 거품을 사랑해요.”


이어 그의 알 파치노와 대단한 연기가 이어졌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시들시들했다. 그녀가 자아내는 더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우연이겠지만 또 어떻게 우연이 이어질까, 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도대체 우연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


그녀가 드라이브 어때요, 하고 말했을 때, 이번에는 그에게 강한 호기심과 함께 약간의 경계심이 싹텄다. 우연의 우연한 이어짐이었겠지만 그래도 마음 구석에는 빨갛게 충혈 된 경계의 눈초리가 번뜩였던 것이다. 그는 태연한 척 했지만 가슴이 요동쳤다. 드라이브는 그야말로 그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단어 중의 하나였다. 드라이브는 미지의 땅으로의 유혹, 헤어 나올 수 없는 공간으로의 밀침이었다. 그 드라이브란 단어가 그녀의 도발적인 빨간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요-것 봐-라.’

      

하지만 여전히 그는 커피→ 카푸치노→드라이브로 이어지는 단어들의 일치가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가 애지중지하는 단어이긴 했지만 연애계(戀愛界)에서는 아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들일 뿐이었다. 그러니 우연이란 신비적인 표현을 사용하기에는 개연성이 아주 높은 경우였다. 그가 그렇게 했듯이 그녀가 그럴 수 있음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란 걸 그는 인정해야만 했다. 그의 경우에 커피→ 카푸치노→드라이브의 순서가 아니라 드라이브 → 커피 → 카푸치노로 순서가 바뀌는 경우나 식사→ 된장찌개 → 산책 등으로 내용이 바뀌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지만 상대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커피→ 카푸치노→드라이브의 순서나 내용이 그의 전유물만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괜한 반응이라고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녀가 차를 한적한 근교의 모텔에 세웠을 때 그는 아, 하고 속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설마, 설마 하며 지금껏 위로하여 잠재워 놓았던 감정들이 소름처럼 다시 일어났다. 돼지코 아내를 가진 딸기코 남자 주인이 언제나 졸고 있는 그의 단골 모텔. 그가 이 모텔을 단골로 삼은 것은 바로 그 주인 부부의 멍청함과 누에 같은 몰골 때문이었다.


‘정말 우연일까. 그녀와의 취향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일까.’


눈을 감고도 구석구석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자주 찾았던 그 모텔, 두더지 모텔. 이름도 매력적인 두더지 모텔. 그 두더지 모델을 두더지처럼 파고들었고 과감하게 땅으로 파고드는 두더지처럼 저돌적이고 정열적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두더지 모텔. 그녀도 그런 두더지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그에게 어떤 음모론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부터였다.


‘음모일 수 있다. 유혹해서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 어쩌면 이 모텔 곳곳에 내가 등쳐먹었던 수많은 여자들이 잠복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꺼번에 몰려와 나를 짓밟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자 그녀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그녀를 곁눈질로 살펴보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본적이 없는 여자는 분명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모르는 사람을 시켜 그를 이곳까지 유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이제 빠져 나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선 느낌이었다. 하지만 또 그런 걱정이 기우라는 생각이 든 것은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그녀가 두더지 모텔의 주차장으로 들어서던 차를 획 돌려 나온 것이었다.


“두더지 모텔은 주인 꼴 보기가 싫어요. 생동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죠.”


은근한 협박, 즉 그와 관련해서 어떤 행위의 인과(因果)가 게재되어 있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그녀의 행동은 좋은 조짐이었다. 만약 그가 즐겨 찾던 룸의 번호까지 일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말이다. 그것을 그녀가 피해 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즐겨 찾던 방에 함께 들어 함께 목욕 비누를 사용하고 같은 침대를 사용하게 되었다면 그건 우연이 아닌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에서 갈라져 있었던 정신이랄까 육체랄까, 뭐 그런 것의 합체였을 것이었고, 그렇다면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을 것이었다. 운명. 그가 남녀 관계에서 가장 멀리하는 단어가 있다면 바로 그 운명이라는 올가미였다.


‘운명이라 믿지 말라. 거짓이다. 운명이라는 것은 없다.’

강을 따라 차를 빠른 속력으로 운전하면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두더지 모텔은 제게 의미있는 장소죠. 5년쯤 전이죠. 제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여행 중에 갑작스럽게 눈이 내렸고 우린 어쩔 수 없이 두더지 모텔을 찾아들었죠. 하지만 뭐, 이상하게 생각지는 말아주세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정말이지 우린 순수했거든요. 아직도 기억이 나요. 403호. 그 곳 창문에서 바라보면 강과 하늘과 멀리 산들이 보였어요. 헌데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이 왜 하필 불륜이나 타락의 구렁으로 인식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죠. 모텔에 대한 인식 말이에요. 아, 사랑하는 남자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룸의 벽에는 아직도 고호의 그림이 걸려있는지......당신과 함께 그곳에서 다시 아련한 추억을 더듬고 싶었는데......하지만 난 너무 이기적이었어요.”


그에겐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직 403호와 고호의 그림이란 말만이 그의 두 귀에 메아리쳤다.


‘두더지 모텔 403호, 고호의 그림‘


도대체 이걸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용을 빼버린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담고 있던 어떤 용기(容器)같은 그 단어들이 정말 우연일수 있는가. 어떻게 우연일 수 있는가. 이제 그는 누가 어떻게 생각하던 그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연의 끝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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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6 23:35

[꽁트] 우아한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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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http://www.slrclup.net/Common/

 


우아한 인생


지하철을 타러 간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택시나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자주 걷지만 신고 있는 구두 때문에 걸을 수가 없다. 굽이 떨어진 건 오늘 오후다. 오늘 오후에는 커피를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쁘다. 커피가 무척이나 마시고 싶다. 좋다는 원두커피는 마다하고 커피믹서를 즐겨 마신다. 고객들이 몰려온다. 고객들이 뒤섞인다. 그런 혼란에도 일정한 질서는 있다. 번호표를 한 장씩 들고 있다. 번호표는 무언의 약속이다. 소파에 앉아도 있다. 고객들은 돈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돈을 인출한다. 돈을 예금한다. 돈을 이체한다. 통장을 보며 투덜거린다. 통장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현금지급기에도 고객들이 줄서있다. 카드를 현금지급기의 투입구에 넣고 입출금의 액수 버튼을 누른다. 비밀번호를 누른다. 단단히 닫혀있던 지급기의 뚜껑이 열리고 현금이 보인다. 돈을 센다. 돈의 형상이 망막에 와 맺힌다.


“바쁘다는 것은 그다지 나쁠 것은 없지. 아직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지.”


번호판의 붉은색 숫자가 245다. 신발 사이즈다. 고개를 숙인다. 작은 발을 내려다 본다. 고개를 든다. 그녀가 서있다. 그녀는 인상적인 붉은 스카프를 하고 있다. 진한 붉은색 입술이다.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적금 통장을 내민다. 통장 사이에는 십 만원 수표 5장이 끼워져 있다.


“이서 좀 해 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좀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지.”


그녀가 수표 뒷면에 이서를 한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이다. 전화번호는 1234-432*. 아름다운 숫자다. 숫자에도 지저분한 숫자가 있다. 그녀의 전화 번호는 아름답다. 손이 바쁜 시간에 눈으로 쉽게 외어지는 숫자이기에 그렇다. 그녀는 못생긴 것도 잘 생긴 것도 아니다. 그녀의 전화번호처럼 쿨하지도 않아 보인다.


“그녀의 입술과 스카프만큼이나 전화번호가 인상적이었지. 전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하루 종일 돈만 만지고 있으면 잔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건성으로 돈을 세거나 서류를 처리하면서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을 한다. 전날 밤의 분위기와는 다른 직장의 오전 시간 동안 그런 생각에 쉬 빠져든다.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리. 돈을 세고 앉아있는 허깨비 같은 존재. 지나친 감정이긴 하다. 나의 존재감을 더욱 강렬하게 확인해 주는 존재는 K이다. K는 선배이자 상사이다. K가 점심을 먹고 나를 부르고 역정을 낸다. 무엇이 잘못 된 듯하다. 아침의 지각 탓이기도 하다. 서류 뭉치를 집어 던진다. 바로 이런 일이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준다. 가슴의 꿈틀거림이다.  


“점심을 얻어먹은 것으로 만족해. 그렇게 식사비를 아껴 바에서 술이라도 마시는 게 아냐? 분노나 벌레 같다는 것, 그건 감정이라는 허상일 뿐이지.”


속이 쓰려온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이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변기에 목을 길게 빼고 구토를 한다. 침대 위에서 바로 잠에 빠져 든다. 아침 6시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뜬다. 두통이 심하다. 아침을 먹지 않는다. 습관처럼 인과로 연결되는 단어들이다. 술, 구토, 잠, 아침, 두통, 속 쓰림.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한다. 하얀 와이셔츠와 양복바지를 입는다. 넥타이를 매고 윗도리를 입는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는다. 거울 속에 사내가 서있다. 뒷모습을 내보이기 싫어하는 사내가 서있다. 구두를 바꿔 신으려고 한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른 구두는 수선을 위해 구두 수선점에 맡겼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거울을 뒤로 하고 빠르게 등을 돌린다. 룸을 나와 문을 잠근다. 벌레의 각질 같은 철제문을 잠근다.


지하철을 타러 간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려면 택시나 버스를 타야하고 버스를 타지 않으려면 걸어야 한다. 늦으면 뛰기도 한다. 오늘은 아무래도 뛰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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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4 18:12

[일본영화] 자토이치(2)





자토이치(2)


서부 영화에서 맹인 총잡이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상상이라고 하면 건방진 표현처럼 들린다. 아니 무지한 표현처럼 들린다. 세상에 불가능한 상상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거나, 이성적인 합리성을 신봉하는 서양의 인식에서 맹인이 총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식의 상상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상의 한계라기 보다는 문화의 한계에 속한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맹인 검객을 상상한다는 것은 가능하다. 상상의 무한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성격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을 가능하게 하는 일본적인 문화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우선 <무사의 체통>이란 일본 영화에서 맹인이 된 미무라의 정신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맹인 검객의 탄생과 관련하여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미무라가 맹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던가? 바로 정신이었다.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한 생즉사의 정신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다. 미무라가 스승의 도장을 찾아가 들은 이 말속에는 죽음을 무릎 쓴 결의 이상을 읽을 수는 없다. 이러한 결의가 실상 맹인 검객의 미묘한 신기를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즉 미무라에서 자토이치로 이어지는 미묘한 신기를 생즉사라는 정신력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또는 복수심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정신을 고취시킨다고 해도 맹인이 정상적인 검객을 당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분노가 정신을 혼란시키고 흐트러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기가 더 쉽다. 


그렇다면 맹인 검객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의 긴장의 문화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일본 문화를 축소지향적인 문화라고 말을 하지만 이 축소의 지향은 긴장감을 동반한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도 확대는 이완을 축소는 긴장을 가져온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공간에서 긴장을, 넓은 공간에서 이완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경우가 아니겠는가?


일본 특유의 긴장문화를 만들어 낸 모체로 이어령씨는 이치고이치에(一期一會)의 사상과 세이자(일본특유의 정좌법으로 무릎을 꿇고 않는 좌세)를 들고 있다. 이어령씨는 “시간의 축소지향인 이치고이치에의 문화와 공간의 축소지향인 세이자이 문화가 일상적인 생활어에 나타난 것인 ‘잇쇼켄메이’ 라는 말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p.215) 라고 했다.


[잇쇼켄메이(一生懸命)는 한 곳을 생명을 걸고 지킨다는 뜻으로 일본인의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정신이다. 좋은 의미로는 자신의 맡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이지만, 일본의 침략주의와 맞닿아있는 정신이기도 하다.]


정신의 축소지향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이어령씨는 ‘다도’ 와 ‘죽음’ 의 예로 간결하게 설명하고 있다; “다도 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넓은 공간을 축소해 다다미 4조 반의 좁은 공간으로 만든 ‘다실’ 은 두말할  것 없이 ‘공간적 축소지향’ 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 대응하는 ‘시간적 축소지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다도에서 말하는 ’이치고 이치에(一期一會)‘ 라는 정신이다. 시간을 축소하면 일순이 된다.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 다도란 그 일순의 빛 속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만남이요, 그 마음이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 210).


이치고이치에의 사상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 이어령씨의 글을 좀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다회의 만남이 일생에 단 한 번의 만남이라는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곧 다실에 끌어들인다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이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단절의 벼랑이며, 다시는 재현이 불가능한 일순간의 섬광이므로 그것을 느끼며 만나는 사, 람들은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다.“(축소지향의 일본인, p.212)


이러한 긴 인용은 다도와 마찬가지로 검도, 즉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해 보기 위한 것이다. 물론 이치고이치에의 정신만으로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본다. 또한 검도 지식 외적인 것으로 검도를 논하는 우스운 꼴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어령씨의 글에서 받은 어떤 통찰이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를 일부분 해석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또한 일본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유용하다는 판단이다.   


자토이치의 검의 신기는 일본적인 긴장감 또는 비장감, 즉 이어령씨가 언급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과 맞닿아 놓는다는 것은 그다지 어색하지 않다고 본다. 다도(茶道)와 마찬가지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검도(劍道)의 세계에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더욱 더 정합성을 띈다고 할 수도 있다. <무사의 체통>에서 미무라의 생즉사의 정신이란 이치고이치에의 긴장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고이치에의 정신은 자토이치에서는 더욱 세련되게(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검을 휘두르는 행위가 차를 마시는 행위처럼 이치고이치에의 정신 속에서 일순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축소된 시간, 즉 일순, “단 한 번 밖에 없는 시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의 창백한 번갯불‘을 응시하거나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검으로 ’베어내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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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3 17:43

[꽁트] 어떤 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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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탈옥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은 무엇일까? 이렇게 이야기하자면 [장미]가 아닌가 하고 피식 비웃음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장미는 장미로만 불려야 할까. 그렇다면 장미의 이름은 장미 외엔 여지가 없는 것일까. ‘장미의 이름은 장미’ 라는 말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첫째는, [장미]라고 불리는 나무의 나무격의 무시가 그것이며 둘째는, 언어란 인간 중심적이며 따라서 세계는 인간 중심적 해석의 산물이며 언어는 사물의 본질을 기만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장미는 불쾌할지도 모를 것이다. 왜 자신이 장미로 불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자신의 존재가 언어에 묶여 규정 당하는 것에 저항하고자 할 것이다. 인간은 언어라는 그물로 대상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세계를 인식할 수 없으며 언어가 존재하기에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나도 터무니가 없다. 세계는 인간의 언어 이전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인위적인 언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세계가 인간의 언어를 존재케 했고 언어가 인간의 인식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언어가 매개라는 것에는 어느 정도 일치할 수 있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것이다.“


녀석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이런 황당한 내용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언어란 지극히 인간 중심주의의 산물이며 이기적인 속성이 그대로 반영된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녀석은 언제나 언어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고 언어가 사라진 세상에서 황제를 꿈꾸었다. 황제라는 단어가 등장할라 치면 그의 말투까지도 달라졌다. 


“나는 행복한 게야. 왜냐, 나는 황제이기 때문이지. 나는 이 세계를 그저 바라본다. 나는 이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계를 해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황제의 의미는 정치와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아니라 이 새롭게 바라보기의 우월함의 상징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황제는 그저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해석하고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언어를 세계에 덧붙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대체를 통한 대체역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언어를 버리고 말이다.”


이런 식이었다. 


“포레스트 검프가 왜 위대한가. 그저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는 멍청이처럼 보이지만 결코 멍청이가 아니다. 그는 세계를 그저 보기 위해 달렸지만 사람들은 그의 뜀박질을 해석하고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진정 누가 더 멍청한가.”


정말이지 아전인수라도 이런 아전인수는 없다. 그저 ‘바라보는 행위’를 모든 행위들의 상석에 놓았으니 말이다. 물론 비주얼한 것이 가장 실제적일 수는 있지만 모든 감각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모든 감각들은 그것들 자체로 진실을 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황제를 위하여 신하들처럼 녀석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려 주었다. 머릿속에 꽉 차있을 녀석의 허황된 생각들을 조용히 덮어두기 위한 전략인 것이었다. 반박이나 질책이라도 해댈라치면 녀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머릿속의 허황된 생각들을 언어로 가공하여 쉴 새 없이 내 뱉었기 때문이었다. 불필요하고 불완전한 언어를 그토록 버리기를 갈망하는 녀석이 거품을 물며 언어를 쉴 새 없이 내뱉는 것을 볼 때면 과연 인간들로부터 언어가 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녀석이 우리 곁을 떠났다. 그저 바라보기 위해 떠난다고 했지만 도대체 그 말뜻을 신하인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언어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사물을 그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바라보기만 한다는 감각 속에 언어가 끼어든다면 더 이상 순수한 바라봄이 아닌 것이다. 언어가 부수어질 때, 때 묻지 않은 인간들의 순수함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언어로 현실을 전도하고 대체한다는 것은 진정한 혁명이 아니며 또 다른 불순함일 뿐이다.”


그저 알쏭달쏭 하기만 했고 한편으론 정신 나간 헛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이고자 한다. 나무는 그저 말없이 서서 바라보기만 하지 않는가. 나는 한 그루의 나무보다도 나을 게 없다. 인간은 나무처럼 살아야 한다. 나는 한 그루의 나무이고자 한다.”


우리는 그가 숲 속으로 들어갔으리라 추측해 보았다. 나무 때문이었다. 그러다 혹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리라 예상하기도 했고, 아니면 숲 속에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 알쏭달쏭한 말을 솟아낼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추측과 예상과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녀석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단지 세상의 바람에 실려 풍문으로 그와 관련한 한 짧은 소문만이 전해져왔을 뿐이다.


영하의 어느 산중(山中) 앙상한 가지의 나무처럼 벌거벗고 두 손을 벌린 체 서서...... 나무가 되고자한 한 인간으로......얼어 죽었다는 가슴 찡한 풍문이......


언어는 인간이 탈출할 수 없는 감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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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0 22:28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



 

부빙에 갖힌 인듀어러스호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


“1915년 11월 21일 P.M. 4:50: 인듀어런스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문명세계와의 마지막 끈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P.102) 


인간은 어느 정도까지 강인해 질 수 있을까? 자연이 가하는 위협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의연할 수 있을까? 이 의문에 인듀어런스호와 새클턴을 비록한 27명의 선원들이 답을 해준다. 2년에 가까운 극지에서의 잔인한 ‘전투‘에서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기적을 새클턴과 인듀런스호의 승무원들은 이루었던 것이다. 그들의 고투의 나날들은 그야말로 죽음과 맞닿은 잔인하고 살벌한 시간들이었다. 창고 책임자 오들리의 말처럼, 그들은 영락없이 “얼어버렸다, 초콜릿 바속에 박힌 아몬드처럼.”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지만 또 참으로 낙천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 낙천성이 그들에게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 주었을까? 어찌 초코렛이나 아몬드에 비유할 수 있을까? 죽음이요, 고통이 아니었겠는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숭고함의 실체는 아주 평범하고 소탈한 것이었다.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이었다. 신의 모습도 아니었고 영웅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바로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나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비극 앞에서 당당히 선 인듀어런스호의 선장인 새클턴과 그의 대원들의 인간애가 아닌가 한다. 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서로를 격려해주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미쳐버릴 듯한 극한 상황에서 고통에 맞섰다. 지극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비극에 맞섰던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인 욕설로 고통에 맞섰다. 그들은 저주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저주했다. 바, 배, 물보라, 추위, 바람 그리고 가끔씩은 서로를. 그들의 욕설에는 간절한 말투가 담겨있었다. 마치 이 축축하고 추운 고난에서 해방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것처럼” 


비록 동상에 걸려 몸은 썩어 팔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과 허기에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했지만 그들은 그들의 희망만은 꺾지 않았다. 그린스트리트 대원의 말처럼, ......썩어가며 하루를 보낸다. 빌어먹을! 썩은 하루가 또 지나갔지만, 끝내 그들의 운명은 ‘법칙이 틀렸음을 입증해주었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을 그들은 어떻게 이겨낼 수 수 있었을까?  비슷한 시기에 북극에서 조난당한 칼 럭호 승무원들이 몇 개월 만에 모두 숨진 것과 비교해 본다면 분명 인듀어런스호 대원들의 생존은 인간이 구현한 숭고한 모습이 숨어있음이 분명하다.  


1916년 4월 엘리펀트 섬의 부빙에 갇혀있던 인듀어런스호와 남은 대원들을 뒤로하고 선발대로 새클턴과 몇 명의 대원들은 800 마일 쯤 떨어진 스트롬니스 기지(Stromness station)가 있는 사우스 조지아섬(the island of South Georgia)를 향해 출발하는데 조악한 항해도구에 의지한 17일간의 사투의 항해였다. 그들의 사우스조지아 섬으로의 항해 중 그들의 희망을 솟구치게 해 준 존재는 가마우지 한 마리였다. 가마우지는 보통 육지에서 20-30km 이상을 날지 않는 새였기 때문이었다. 5월 10일 그들은 사우스 조지아 섬에 발을 내딛지만 여전히 장애는 도사리고 있었다. 약 10일쯤 뒤인 5월 19일 그들은 빈약한 장비에 고통스런 몸을 이끌고 22마일 떨어진  스트롬니스 기지를 향해 36시간의 강행군을 해 그곳에 도착했다. 이후 4번의 실패를 겪으며 8월 30일 칠레 정부로부터 빌린 쇄빙선으로 인듀어런스호가 있는 엘리펀드 섬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하고 대원들을 구조하게 되었다.


상상하기에도 힘든 이 극한 상황을 이겨낸 새클턴과 인듀런스호의 대원들에게 경의 표한다. (*)     



(참고 서적: 살아있는 한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랜싱, 유혜경 옮김)

(참고 사이트:  http://www.amnh.org/exhibitions/shackleton/home.html)




* Expedition Members

Sir Ernest Shackleton Sir Ernest Shackleton
leader

Frank Wild
second-in-command

Frank Worsley
captain

Lionel Greenstreet
first officer


Hubert T. Hudson
navigator

Thomas Crean
second officer

Alfred Cheetham
third officer

Louis Rickinson
first engineer

A. J. Kerr
second engineer

Dr. Alexander H. Macklin
surgeon

Dr. James A. McIlroy
surgeon

James M. Wordie
geologist

Leonard D. A. Hussey
meteorologist

Reginald W. James
physicist

 

 

            *인듀어런스호의 조난 일지도













 

   






Robert S. Clark
biologist

James Francis Hurley
official photographer

George E. Marston
official artist

Thomas Orde-Lees
motor expert and storekeeper

Henry McNish
carpenter

Charles J. Green
cook

Walter E. How
able seaman

William Bakewell
able seaman

Timothy McCarthy
able seaman

Thomas McLeod
able seaman

John Vincent
able seaman

Ernest Holness
fireman

William Stevenson
fireman

Perce Blackborow
stowaway (later ste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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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9 01:18

[공트] 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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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2)


자넨 오늘자 모 월간지에 ‘신문, 더 높아진 신뢰지수’ 라는 기사를 읽어 보았나. 바로 여기 이 책일세. 한 번 읽어 보게나. 신문의 날을 맞아 신문 독자들을 상대로 한 설문 조사 결과를 가지고 신문의 신뢰 지수가 높아졌다고 대서특필을 하고 있네. 이제야 알 것 같군, 자네도 짐작이 가지 않나? 내가 이토록 지금의 종교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바로 이 빌어먹을 신뢰지수란 것 때문이었네. 맞아, 바로 이 높아진 신뢰 지수 때문일세.  신문에 대한 신뢰지수가 너무 높아진 결과 때문이란 말일세. 신뢰 지수가 높아져 나에 대한 평가가 계속 왜곡되어 왔던 것이네. 내가 신문에 쏟아 부은 돈이 얼마인데. 자네도 알지, 중앙지, 일간지 통 털어 전면, 반면 광고로 뿌린 돈이 얼마인가 말이야. 내가 이토록 나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굳어지기를 원치 않았다나는 건 자네도 잘 알걸세. 적당하게 선량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적당하게 애국자인 척 하면서 정치인의 입지를 굳히려고 했던 것 아닌가 말야! 그런데 지금 도대체 내가 어떤 인간이 되어 버렸냐 말일세! 


도대체 내가 예수야? 부처야? 살아있는 신이야? 내가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기 위해 사회와 민족을 위한답시고 약자들에게 베푼 위선적이고 계산적인 일들이 오히려 내게 멍에가 되고 있으니 말야. 이 죽일 놈들의 기자 새끼들이 얼마나 나를 진실하고 거룩한 인간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해놓아버려 이제 이 이미지를 벗어날 수조차 없으니 말야. 진실하다, 양심적이다, 선량하다, 움직이는 법전이다 어쩌니 마구 구라를 치는 바람에 도대체 정치계에 입문조차 할 수가 없어져 버렸으니 말야. 도대체 나를 예수에 비유한 기자 놈은 또 뭐냐 말야! 부패 정치 정화를 위해 삭발 단식을 했을 때 나를 성철 스님에 비유한 기자 놈은 또 뭐냐 말야. 그런 건 정치쑈나 이벤트로 적당하게 보아 넘겨줄 수 있는 것 아닌가 말야. 내가 이렇게 고귀하고 숭고한 인간이 되어버린 건 바로 쥐새끼들 같은 기자놈들 때문이야, 기자놈들! 내가 정치 쪽에 목이라도 내밀라 치면 ‘이 인간 이거 정치 말아먹을 인간일세’ 하는 의혹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닳고 닳은 정치인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단 말야. 나도 댁들과 같은 인간이야, 하고 농담삼아 큰소리를 내질러도 보고 진지하게 음흉한 시선과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여도 보곤 하지만 당최 나를 믿어야 말이지. 넌 정치를 너무 깨끗하게 할 놈이야! 뭐 이런 눈으로 보거든.


‘넌 예수 같은 존재야. 넌 너무 진실해. 넌 너무 양심적이야.’


자네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더러운 놈이란 것을 말야, 껄껄. 암 더러운 놈이지. 난 더러운 정치를 위해 태어났거든. 종교를 위해 태어난 놈이 아니거든. 그런데 이 빌어먹을 기자 새끼들이 나를 너무 깨끗한 영혼으로 만들어 버렸단 말이야, 개새끼들! 도대체 그 닳고 닳은 정치인들에게 조차 나에 대한 이미지를 굳히게 한 건 바로 빌어먹을 기자 새끼들, 그 새끼들이 써대는 신문기사들 때문이지. 아무리 기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기자 새끼들이라도 도대체 나를 예수로, 부처로, 살아있는 신으로 만들어 버린 건 너무 한 것 아냐,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하게 말해보게? 이제 더 이상 신문에 대한  신뢰지수가 높아지면 안되네. 그렇지 않은가? 나처럼 선량한 피해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네. 나처럼 타락하고 더럽고 추악한 인간이 어떻게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살아있는 신이 될 수가 있단 말인가 말야. 이건 신문의 죄악이네, 진실의 왜곡이고 폭력이네. 난 정말 정치인이 되고 싶단 말이네! 정치에 몸담아 보려고 위선적인 자선을 베푼 것이 부활한 예수니 자비로운 부처의 환생이니 하는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으니 말이야, 쳇! 나같이 ‘깨끗한 인간’ 이 정치를 하면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 이러한 상황에서 난 살아가기가 버겁네. 신문이 만들어 버린 예수, 부처, 살아있는 신의 이미지 때문에 난 그렇게 가식적이고 위선적으로 선한 척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버리고 말았네. 도대체 이런 비극이 어디에 있나 말인가. 이건 정말 악의적인 피해일세. 기자 새끼들에게 똥이라도 퍼붓고 싶은 심정이네. 뭐라고,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정치에 미련을 버리고 종교계로 나가보라고? 나 원 참 자네도……(2008.4.9.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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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8 00:20

[꽁트] 어떤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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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www.rangefinderforum.com/photo



어떤 일출


실업자가 된 요즈음 나는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고 있다. 아내가 집을 비우는 낮 동안 나는 대충 집안일을 정리하고 잠에 빠져들기가 일쑤이다. 아내와 시간이 겹치는 서너 시간을 제외하고 대체로 밤 12시 이후는 잠들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 급기야는 밤낮이 뒤바뀐 생활에 익숙해진 것이다.


밤 시간 동안 나는 혼자 술을 즐겨 마신다. 아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술이나 마셔대는 나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직장을 잃고 난 후 한 동안 실의에 빠지긴 했으나 다시 의욕적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자 했고 아내도 내게 힘을 보태주었다. 하지만 의욕과는 달리 시간만 흘렀고 새로운 일은 계획의 단계에서 포기하기가 태반이었다. 아내도 더 이상 참아 주지 않았다.


아내가 직장을 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뜻하지 않게 전업주부의 신세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내 유일한 낙은 영화를 보거나 되지도 않는 꽁트를 쓰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밤새 술을 마시며 영화를 보거나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리는 것은 어쩌면 못난 자신에 대한 자학적인 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다면 가끔 새벽에 해장국집을 찾는 것이다. 아파트에서 걸어서 10분쯤 걸리는 일출이라는 해장국집이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엘리베이터에 탈 때 마다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관한 기억, 혼자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던 기억이다.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상상이고 뻔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내게는 그런 상상이 현실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15층에서 탄 엘리베이터가 11층에 접어들 때였다. 갑자기 전원이 꺼지면서 멈추어 선 것이다. 잠시 뒤 전원은 들어왔지만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가 몰려왔다. 추락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날 것 만 같았다. 밀폐된 엘리베이터의 공간 속에서 혼자 추락해 끝장나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무사히 내릴 수 있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지금 다시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내가 아파트의 정문을 나서자 말자 처음 목격한 것은 개 한 쌍이다. 암, 수 두 마리면 좋을 것 같다. 녀석들이 암, 수인지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흐릿한 형체로 판단해 보더라도 그들은 내게 낯익은 개들은 분명하다. 유난히 떠돌이 개들이 많았고 그 개들은 대부분 엇비슷한 생김새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개들에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고, 개들도 내게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이나 개들에게 습관화된 모습인지도 모른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그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 나는 도로변에 쭈그리고 앉아 개들을 바라본다. 그들도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깨어지기 어려운 습관 같다.


아파트 앞으로 나있는 텅 빈 도로는 적막에 눌려있다. 가는 빗물에 촉촉이 젖은 도로가 외로워 보인다. 가로등이 적막감에 익숙한 모습으로 서있다. 도로를 따라 조금 나아가자 가로등에 기대어 오줌 줄기를 내뿜고 있는 한 사내가 시선으로 들어온다. 술에 취한 듯 몸을 기우뚱거리며 뿜어대는 오줌 줄기가 갈 지 자로 흔들린다. 나는 그 사내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곱슬머리에 안경을 쓰고 늘 같은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상처(喪妻)한 9층 K다. 나는 그를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지나쳐 걷는다. 뒤돌아보니 그는 불안하기는 하나 귀소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다. 비틀거리며 아파트 정문을 왼쪽으로 끼고 돌아 들어가고 있다. K와 나는 같은 동 같은 라인이다. 나는 그보다 6층이 높은 15층이다. 나는 상가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주차장에서, 거리에서, 가끔은 카페 수에서 그를 보았지만 단지 가벼운 목례만 나누곤 했다. 그런 어색한 관계는 나의 탓인지 그의 탓인지 아니면 모두의 탓인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처를 했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도 나는 그저 지나쳐가는, 스쳐가는 K의 얼굴만이 파편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그를 지나치면서 쳐진 그의 어깨가 또 다른 파편처럼 다가온다.  


CAFE 수. 직장을 다닐 때는 귀가 길에 언제나 들르곤 하던 카페다. 직장을 그만 둔 뒤로 발길을 끊었다. 직장과 집 사이에서 삶에 다시금 들뜨게 하고 흥얼거리게 해주었던가. 얼음 같은 현실을 잊고 뜨거운 꿈과 이상의 열정으로 위안해 주었던가. 나이를 잊던 곳이었다. 시간을 멈추어 주던 곳이었다. 차가운 현실로 인해 얼어붙은 가슴을 녹여주던 곳이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던 곳. 내 눈물마저 닦아주던 곳, 내 상처마저 감싸주던 곳, 그런 곳 카페 수의 네온도 꺼져있다. 문득 웃음이 나온다. 인간은 심각할 정도로 감정적인 동물이란 생각에. 카페 주인은 얼음을 뽀드득 뽀드득 씹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얼음을 씹어대면서 내게, 손님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너무 열정적이거나 감상적인 것도 좋진 않지요. 카페의 얼음은 바로 그래서 필요한 것이지요. 그럴싸한 말 같았지만, 그가 손님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터득한 눈치의 소산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듯한 위로가 되곤 했다. 그래서 카페 수는 그 명칭과는 달리 주인의 수준이 다소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는 여전할 것이다.


카페 수를 나와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작고 아담한 벽돌 건물이 보인다. 초등학교 건물이다. 가끔씩 들러 그네를 타거나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던 곳이다. 그러나 이제 발걸음을 끊은 지도 오래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과 달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던 곳이다. 가끔씩 떠오르던 나의 어린 시절에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하던 곳이기도 하다. 벤치에 앉아있으면 수많은 느낌들이 별들이 되어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긴 시간을 건너온 느낌이었다. 내가 얼렁뚱땅 갑자기 커지기만 한 느낌이었다. 도대체 나의 머릿속이 무엇으로 채워져 왔는지 싸늘한 느낌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고만 있는지도 모르는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풀어 헤쳐 놓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막연한 느낌이었다. 하늘의 별과 달을 바라보며 들뜬 열기와 취기에 해본 어리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해장국집 일출의 붉은 네온이 반짝이고 있다. 식당으로는 근처에서 유일하게 꺼지지 않은 네온이다. 반갑다. 해장국과 일출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이상하게도 주인은 일출의 사진들에 집착했다. 나는 언제나 좋은 뜻이려니 생각해왔다. 식당 안 벽면에도 대형 해돋이 사진이 걸려있고 카운터 뒤 벽에도 일출 사진의 액자가 결려있다. 대머리 주인이 일어서면 뒤쪽의 떠오르는 태양이 후광처럼 보인다. 나는 해장국집으로 들어가 카운터에 앉아 목을 돌리며 잠을 깨우고 있는 주인에게 인사를 한다. 주인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항상 앉는 자리에 다른 손님이 먼저와 앉아있다. 나는 주방이 정면으로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해장국을 주문한다. 창문 밖으로 옅은 어둠이 걷혀 가고 있다. 해장국이 금방 나온다. 나는 해장국을 먹기 시작한다. 큰 깍두기를 입으로 밀어 넣고 아작거리며 씹는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간다.  해장국이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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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6 18:58

[꽁트] 이혼 날의 연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미지 출처:www.thehorrorblog.com/2006/09/



 

이혼 날의 연가


정 만찬과 한 마리. 그들은 이혼 도장을 찍기 위해 법원을 찾았다. 서로 남남이 되기 위해 함께 마지막 외출을 한 것이다. 그들의 외출은 거의 10년 만이었다. 만찬 씨의 직업이 밤낮이 뒤바뀐 밤무대의 가수이고 마리 씨가 낮에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으니 둘이 함께 하는 외출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겐 자식이 없었으니 더더욱 의기투합되기가 어려웠다. 이혼 도장을 찍는 날이 10년만의 외출이 되어버렸으니 남남이 되려는 순간이었지만 서로의 감회가 남달랐다. 만찬 씨는 만찬 씨 대로 약간의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며 마리 씨는 마리 씨 대로 밤낮이 뒤바뀐 남편에게 동정이 갔던 것이다. 사실 그들의 이혼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터져 되돌릴 수 없는 지경까지 왔지만 서로의 자존심이 서로에게 고개 숙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10년의 결혼 생활 동안 묵묵히 서로를 잘 참아와 준 부부이고 보면 이번의 이혼 사건은 납득키 어려운 구석이 너무나도 많았다. 아마도 그것은 10년이라는 변화 없이 지나간 시간들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삶의 권태와 연관이 되었음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법원 건물을 마주보고 섰을 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10년만의 외출이며 마지막 외출을 위해 식사나 함께 하자는 말이 동시에 튀어 나왔다. 그 말의 내용도 똑같았다.

  “식사......”

  그들은 굳이 반대를 하지 않았다.

  “저기 저 뷔페가 어때?”

  “그러죠 뭐.”

  그들이 향한 곳은 법원 근처의 뷔페였다. 그들이 뷔페를 선택한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 그대로 대식가였으니 말이다. 만찬(晩餐)씨는 신들린 듯이 음식을 먹어 치웠으며 마리 씨는 통닭이던 돼지던 거의 한 마리 단위로 상대를 했다. 그리니 뷔페가 그들의 취향에 맞을 수밖에 없었다.


뷔페에 도착한 그들은 접시에 음식을 가득하게 담아 네다섯 번을 날랐다. 옆 좌석에 앉아있던 자잘한 위를 가진듯한 작은 사람들은 곁눈질을 해가며 혀를 껄껄껄 차기만 했다. 도대체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만찬 씨와 마리 씨는 그런 사소한 일에 의기소침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입 속으로 음식들을 밀어 넣었다. 사실 그들은 이혼을 앞두고 긴장을 한 탓인지 전 날 저녁부터 식사를 거의 걸렀다. 그랬기에 그들의 식욕은 상승해 있었다. 식욕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이혼을 앞둔 부부가 아니었다. 식사를 하면서 만찬 씨는 마리 씨에게 갈비 먹어봐, 라며 음식을 마리 씨의 접시에 옮겨 놓기도 했고 마리 씨 또한 이에 질세라 곰장어에요, 하고 만찬 씨의 접시에 들어 놓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챙겨주는 것은 보기가 너무 좋아 느끼할 지경이었다. 이런 모습은 영락없이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상기시켰다. 옆 좌석의 사람이 세 번쯤 바뀌었을 때 그들의 배도 충만해졌지만 그러고도 디저트는 있는 대로 챙겨먹었다. 몇 번의 트림 뒤에 그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지만 여전히 그들에겐 어떤 여운(餘運)의 기운이 서려있었다. 이혼 도장을 찍어야했기에 언제까지 다정하게 앉아서 히히거릴 수만도 없었다.


그들이 뷔페를 나오자 약간 구름이 끼어있던 하늘이 갑자기 시꺼멓게 변하면서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폭우였다. 바로 왼쪽으로 법원 건물이 보였지만 비를 맞으며 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뷔페에서 다정하게 식사를 했지만 밖에서까지 함께 붙어있기는 싫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서로 약속 시간을 정해 놓고 법원에서 만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 마지막인데 굳이 그렇게 까지야.’

  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뷔페의 입구에 서있었다. 곧 지나갈 비라고 생각하면서 함께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비는 퍼붓듯이 내렸고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자 약간 초초해졌다. 만찬 씨는 법원으로 달려가고 싶었고 마리 씨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런데 갑작스런 사건이 벌어졌다. 골목을 지나가던 트럭이 더러운 진흙탕 물을 만찬 씨와 마리 씨에게 퍼붓고 말았던 것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돌발적인 사태였다. 그들은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실 눈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포장이 되지 않은 골목이라 흙탕물 세례를 심하게 받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여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는 바로 옆 건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이혼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마리 씨의 임신 때문이었다. 그날 마리 씨는 임신을 했고 얼마 뒤 만찬 씨는 ‘성빈’ 이란 애명으로 밤무대를 떠나 방송국의 전속 가수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10년만의 외출, 그리고 그 이혼의 날이 그들에게 황금 알을 낳았던 것이다. 그들의 식욕과 성욕, 그 본능은 또 어떠했는가? 그들의 무의식 속에 도도하게 흐르던 본능에 대한  갈망. 이미 그들은 도장 찍기를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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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2 20:39

[생각 돌아보기] 영어 몰입교육과 'Korea State'


                         


                                        영어 몰입교육과 Korea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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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교육 완성 프로젝트 로드맵


요즘 영어 몰입식 교육이니 공용어니 하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고 있다. 그 와중에 대통령까지 뛰어들어 몰입식 영어교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자기주장을 피력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왜 이러한 주장을 피력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제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튼 영어교육 전문가도 아닌 대통령까지 몰입식 영어교육 운운하는 것을 보면 영어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문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 대통령의 이러한 언급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 아마도 아프리카의 어느 빈곤국 국가가 한국어 몰입식 교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을 때 한국민이 느끼는 실망감과 가히 다르지 않는 감정을 느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실상은 영어에 대한 의식은 ‘몰입식 영어교육‘ 이전에 이미 보다 더 강력하게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보이지 않는 유령으로 존재해온 터라 미국인들은 그다지 섭섭하다거나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끼어들어 다소 복잡(?)해 지긴 했으나 몰입식 영어교육이고, 공용어이고 간에 이러한 문제에 관한 찬, 반의 주장들이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서로 맞서 있는 형국이다. 대체로 지식인들이 내놓는 논의, 주장이고 보면 정말이지 일관된 논리를 견지하고 있다. 이런 사이에서 일반 서민들은 어느 하나의 주장을 선택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통령까지 끼어들었으니 더욱 그리하리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더욱 어리둥절한 것은 대통령이 언급한 ‘현실적’ 이란 말의 의미이다. 몰입식 영어교육이 가능해 지는 ‘현실‘ 은 어떤 모습일까?  


일반 서민의 한사람으로서 이러한 판단의 어려움을 느끼고 있으며 몰입식 영어교육이 가능한 ‘현실‘ 이 도대체 어떠한 현실인지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몰입식 영어가 가능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 


첫째, 영어 몰입식 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필요성을 절실하게 주장한다. 글로벌 시대의 경제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좀더 솔직히 경제적인 이익을 가장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이 영어라는 판단이다. 단언하건대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틀렸다. 경제적인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몰입식 영어교육이나 영어 공용어화는 겨우 차선이거나 실패작일 수 있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동시에 교체해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다. 즉, 소프트웨어로서의 ‘영어’ 뿐만 아니라 하드웨어로서 대한민국이란 ‘국가’ 자체를 미국의 주(state)로 편입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란 생각이다. 미국화 된 푸에르토리코의 경우가 바로 그 그 좋은 예이다. 차라리 미국의 주(州)인 Korean State의 탄생이 영어 몰입식 교육의 가장 현실적인 조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 글로벌 시대에는 경직되고 폐쇄적인 민족주의는 글로벌 시대의 경제 전쟁에 적합치 않다고 주장한다. 민족주의의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글로벌 시대의 혜택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일민족을 포기하고 백인과 흑인을한국민과 더불어 제2의 민족이나 ‘공용인화’ 해야 한다고 본다. 백인이 내 민족이요, 흑인이 내 민족이 되는 혼합민족 구성이 몰입식 영어 교육의 가장 최고의 현실적인 조건이라고 상상해 본다. 


셋째, 영, 미인들이 전혀 사용하지 않는 한국어는 글로벌 시대에 의사소통 수단으로 무의미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한국어는 필요 없는 지엽적인 언어에 불과하다. 몰입식 영어교육과 영어 공용어를 찬성하는 지식인들은 직접적으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글로벌 시대에 올바른 영어 구사에 장애가 되는 한국어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도록, 아니면 부분적으로 금지하는 법령을 실시하는 것이 몰입식 영어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조건이 아닐까 판단된다.


차선책을 주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일류선진 국가, 실용주의 국가, 경제적인 이익의 극대화를 위한 국가라면 굳이 한국이란 국가로 남아있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미국의 주로 편입하여 영어문제 뿐만이 아니라 사교육 문제까지도 완전히 해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최고의 실용이 아니겠는가?


대통령이 언급한 현실이 너무나도 궁금하다. 대한민국을 미국의 연방에 편입하고, 단일민족을 포기하고, 다인종국가를 주장하며 효과적인 실용영어의 구사를 위해 영어 알파벳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이어서 영어습득을 저해하는 한국어를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사용 제한하는 현실일까?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실상은 이것이 가장 실용적이고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현실임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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