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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1 21:16

[생각 돌아보기] 돈과 신경증



                                                           돈과 신경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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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의 동기는 궁극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칼 마르크스가 아니라 프로이트였다고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노동의 가혹한 필요성이 쾌락과 만족에 대한 욕구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즉 현실원리가 끊임없이 쾌락원리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억압은 곧 인간들의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신경증을 앓는 동물’ 이란 말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표현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실원리와 쾌락원리의 억압 정도는 ‘돈’ 에 의해 대체로 정해지는 것 같다. 우리의 교육과 윤리와 종교는 돈에 대해 절제와 봉사나 심지어 악의 근원으로 까지 규정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의 돈의 의미는 사실 절대적이다. 교육보다도 윤리보다도 종교보다도 절대적인 신봉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돈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쾌락원리을 억압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쾌락의 원천인 까닭이다. 물론 돈 이외에 다른 원인들이 있을 수 있다. 복지 국가인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의 높은 자살율이 그것을 입증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복지의 단계가 아니라  아직도 ‘경쟁적 자본주의 사회’ 의 단계이므로 돈에 의한 상대적인 박탈감이 주요한 원인임을 부인할 수 없다. 프로이트 이론을 다시 상기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가진자들이 못가진 자들에 비해 신경증을 덜 앓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쾌락원리가 억압된 채 신경증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목격하게 된다. 소주잔을 기울이며 떠들썩한 대포 집의 샐러리맨들과 시장에서 배추 한 포기, 감자 한 소쿠리를 팔기 위해 고함을 질러대는 중년의 아줌마들과 한끼의 끼니를 위해 공사판에서 몸을 내던지는 아저씨들이 가혹한 노동의 필요성 때문에 신경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를 적용해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의 신경증은 이제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인 차원에서 심각한 증세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의 주식투자와 벤쳐투자와 돈과 관련된 사회범죄는 사회적인 차원의 증세라고 할 수 있다. ‘신종 한탕주의’ 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이겠지만 그 만큼 돈에 대한 욕구가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물론 신경증이 창조적인 욕구로 승화될 수도 있으나 주식투자의 경우는 ‘승화’의 차원이 아니며 벤쳐의 경우도 도태의 두려움이 상시적으로 도사리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 주위의 신경증을 앓고 있는 신음소리들이다. 소수의 가진자들을 제외하고 돈 때문에 신경증을 앓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의 모습들. 이들은 언제쯤 돈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있을까. 신경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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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9 23:19

[꽁트] 몰래 카메라 대소동


 


                                                        몰래 카메라 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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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 반편일. 검은 바탕 위에 무지개 조개 빛이 도는 은색 이름이 새겨진 명패가 큰 마호가니 책상 전면에 반듯하게 놓여있고 그 명패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적으며 앉아있다. 반 사장은 요즘 들어 참 바쁘다. 하루를 일속에 묻혀서 산다. 자연히 귀가도 늦어져 예전의 취침시간이 귀가 시간이 되어버렸다. 반 사장이 이렇게 바빠진 것은 몰래 카메라 덕이다. 반 사장의 사업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몰래카메라 제거업이다. 탐지기를 이용해 몰래 카메라를 제거하거나 탐지기를 직접 판매하는 것이다. 세상에 못 믿고 믿는 사람들이 뭐 그리도 많은지 구석구석 설치된 몰래 카메라 덕에 반 사장은 한 몫을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반 사장이 불신의 세상을 타박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세상 덕에 먹고 살아가는 것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반 사장에게 예상치 못했던 고민거리들도 하나 둘씩 늘어갔는데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에게 가하는 근거 없는 불신의 감정이 그것이었다. 그는 떨쳐버리려 하면 할수록 더 커지는 그런 불신의 감정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아내에게 미안한 감정보다는 아내조차도 저항하기 어려운 불륜의 이 시대 상황을 먼저 떠올렸다. 이 시대의 저항할 수 없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휩쓸려 드는 것을 목격했던가. 더욱이 언제나 바삐 뛰어야 하는 그에게 홀로 남아있는 아내에 대한 불신은 자꾸만 반 사장의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기술개발과 수출선 개척 때문에, 희망 단란주점의 오양 때문에 반 사장은 부득이 이틀이 멀다하고 외박을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가 은근히 측은해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오양과의 바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아내에 대한 불신은 깊어져만 갔으니 남성 일반의 이중적인 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불신은 점차 의처증세로 전이되어 아내의 불륜을 당연시 여기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이즈음에 그가 생각해낸 것이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아내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비 오는 일요일 반 사장은 아내가 목욕을 간 사이에 집안 여기저기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던 것이다.  


진 양주. 반 사장 아내의 이름이다. 진 여사는 남편의 몰래 카메라 제거업 호황으로 통장에 현금이 쌓이기 시작하자 삶에 대한 긴장이 풀리면서 졸부들이 의례 그렇듯이 도덕적 해이에 젖기 시작했다. 더욱이 남편 반 사장의 귀가가 늦어지고 외박이 잦아지면서 남편에 대한 불만과 함께 도덕적 해이는 더욱 커져만 갔다. 자식을 다 키워 외국에 보낸 진 여사는 고독이 밀려오는 밤이면 더욱 쓸쓸하고 외롭고 공허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밤마다 찾아오는 욕망을 억압해야만 했다. 외딴 농촌의 전원주택이어서 마치 옷을 벗고 들판에 서있는 것처럼 쉽게 눈에 띌 것만 같아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밤보다는 낮이 자연스러웠다. 친구들과 함께 온천을 간다는 명목으로, 동창회를 내세워서, 문화 센터 회원총회를 핑계 삼아 마음껏 자신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남편 반 사장이 문제였다. 몰래 카메라 전문가인 남편이 자신을 몰래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 때문이었다.


  “어딘가에 몰래 카메라를 감춰 두었을지도 몰라. 입 조심, 몸조심해야 돼.”


진 여사가 항상 조심스럽게 자신에게 자기 최면처럼 하는 혼잣말이었다. 그녀의 부정(不貞)이 깊어질수록 그런 강박감도 강도를 더해갔다. 그녀는 몰래 카메라를 숨겨 놓았을 만한 곳에서는 더욱 정숙한 척하고 남편을 생각하는 척했다. 앞치마를 두르고 집 청소를 한다, 요리를 한다. 거실에서는 가계부를 적는다, 욕실에서는 정숙하게 샤워를 하고 몸단장을 했다. 진 여사의 이러한 행동은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남편 반 사장은 몰래 녹화한 필름을 그의 사무실에서 보면서 그녀의 그런 모습에 만족해했다.

 

  “그럼 그렇지. 마누라를 의심한 내가 잘못이지. 저렇게 알뜰하고 정숙한 마누라를 의심하다니, 쯧쯧.”

 

몰래 카메라의 역할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애초 반 사장이 생각했던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른 물적 증거 앞에서 반 사장은 너무나도 감격했다. 부인할 수 없는 몰래카메라의 물적 증거는 반 사장의 근심을 잠재웠다. 이제 반 사장은 느긋하게 자신의 사업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번창하는 사업이라 돈은 쌓여갔고 그런 반 사장이 오양에게 뿌리는 돈도 커져만 갔다. 오양의 행복한 모습에 반 사장도 행복했다.


그런데 사단(事端)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양이 반 사장과의 은밀한 행위들을 몰래 카메라에 담아서 협박을 해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협박에 반 사장은 돈을 건네주면서 무마하려고 했으나 자신의 기대는 완전히 벗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필름을 진 여사와 가족, 친척들에게 넘긴다는 협박을 하며 사업 자금으로 수억을 내놓으라는 데는 동의해 줄 수가 없었다. 일은 꼬여만 같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진 사장은 결국 경찰에 신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진 여사에게도 사단이 나고 있었다. 그녀가 불륜 행위의 파트너로 삼았던 일명 ‘찍고 박’ 이 그녀와의 관계를 역시 몰래 카메라에 담았던 것이다. 진 여사는 남편은 의심했지만 ‘찍고 박’이 그 따위 짓을 하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에게 투자한 돈도 섭섭지 않을 정도였고 서비스도 남편인 반 사장보다도 세심하게 신경 썼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모를 몰래 카메라였다. 또한 참으로 몰래 카메라의 위력은 대단했다. ‘찍고 박’이 몰래 찍은 필름은 협박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협박을 견디지 못하던 진 여사는 마침내 경찰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우연하게도 그들 네 사람은 같은 경찰서에서 함께 취조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의 담당 형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기에 그들 또한 나란히 앉아 취조를 받았던 것이다. 그들이 서로 대면하게 되었을 때 참으로 희한한 대화가 오고갔으니 대충 이랬다.

  “야, 박달수 여긴 웬일이냐?”

  “아이고, 반 선배님은 어쩐 일이세요?”

  “여보. 달수를 잘 아는 사이야? 찍고 박 이 새끼......어, 너 오재희. 이제 보니 네 년이”

  “어머, 언니.”


  ‘찍고 박’ 은 한 때 반 사장의 부하 직원이었으며 오양은 진 여사의 고등학교 후배라는 것이 그제야 밝혀지게 된 것이었다. 세상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좁았다. 그리고 경찰서는 일순간에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진 여사가 오양의 머리채를 낚아챘으며 진 사장이 박달수의 턱을 좌우로 날려대고 있었다. 몰래 카메라가 별스러운 것들을 드러내 놓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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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8 22:19

[생각 돌아보기] 나의 정자는 몇 등급



                                           당신의 정자는 몇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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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이 먹는 소고기에 등급을 매기듯이 인간의 정자에도 등급을 매긴다면 소고기의 상품성과 거래만큼이나 정자의 상품성과 거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인간 두뇌의 탁월함이란 한계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윤추구를 위한 상품의 생산으로 ‘정자’ 까지 선택되었으니 말이다. 사실 인간이 상품이 되는 경우는 합법적으로 상업성이란 이름으로 당연한 듯이 이루어져왔으며 불법적으로는 지하 거래로 이루어져 왔다. 미국 흑인 노예나 여성들의 매매춘을 떠올려 보면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위해서라면 인간까지도 자본의 대상으로 삼는다. 자본주의의 물신주의는 사실 한계가 없다. 마치 회춘을 위해 정력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던지 먹어치우는 어느 50대 중년의 사고방식처럼 자본주의 또한 자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던지 먹어치운다. 자본 앞에서는 도덕이고 양심을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오직 더 많은 자본, 자본의 축적만이 있을 뿐이다. 정자는 인간 생명의 씨와 같은 것인데, 자본주의는 그 생명의 씨 마저도 상품화 한 것이다. 물론 더 나은 인종을 위해서 인간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자마저 사고 팔면서 까지 인간의 품종을 개량(?)하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자 수출에도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 정자 수출시장 규모는 약 1억 달러(2000년)로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나 정자에 대한 수요가 급격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고 보면 덤핑이나 관세문제, 불량품으로 인한 클레임 문제도 국가간의 분쟁이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또한 WTO 체제하에서 정자간의 수요 불균형으로 인한 정자 다국적 기업의 독점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덴마크의 정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기부자가 많아 유럽 시장을 거의 석권하고 있으며 세계 25개국으로 수출 판로를 확대해왔다. 이와는 반대로 흑인들의 정자인 경우 수요가 거의 없음으로 해서 인종간의 불화와 대립이 심각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자본’ 이란 말과 ‘민주’ 란 말은 마치 쌍둥이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 두 단어가 잘 어울리는 말인지 때때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것은 자본과 인간의 역학관계에서 ‘인간이 자본의 주인이 된다’ 는 의미에서 자본주의(Capit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는 화해할 수 있으나 ‘자본이 인간조차 앞선다’ 는 의미에서는 납득키 어렵다. 정자까지 경제적인 이윤 추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본이 인간에 앞서는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면 과장일까? 아무튼 인간이 자본 앞에서 더 이상 추악해지지 않기를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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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21:23

[일본영화] 자토이치



                                         이미지 출처:http://kr.blog.yahoo.com/jesse




자토이치

-복수의 카타르시스


어느 곳이고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또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아주 큰 잘못이 아니라면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서로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러나 때로 그 관계가 크나 큰 상처를 만들어 관계된 상대자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져 원한이 쌓여가기도 한다. 복수가 피할 수 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법의 구속이 약하고 무력이 지배하는 계급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명예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복수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복수는 약한 자들에게는 참 어려운 결단이다. 오히려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한자들의 증오는 대체로 체념이 되기가 싶다. 집단, 특히 사악한 집단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너무나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집단과 집단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원시부족사회, 고대 국가 들간의 정복과 약탈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의 정복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약한자들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특히 여성, 노약자, 사회빈곤층 등의 약자들인 경우는 증오의 감정이 집단적인 힘으로 승화되지 않는 한 복수를 꿈꾼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약자들이 집단화 되었기에  동학혁명이나, 스파르타쿠스의 난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우라면, 복수는 동류나 강한자들에나 가능한 행위에 국한되고 만다. 


바로 여기에서 체념에 빠져버린 복수에 대한 무수한 상상들이 발동하게 된다. 정의로운 대리자가 나타나 주기를 바라고, 자신이 영웅이 되기를 상상한다. 억울하고 비통한 감정을 대리자를 통해 상상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들은 약자들의 한으로 응어리져 수많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복수의 모티브는 영화의 영원한 소재이다. 아니 주제이기도 하다.


다소 벗어나는 이야기이지만, 문학의 경우, 20세기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주인공의 전형은 소외되고 고독한 개인이었다. 그것은 작가들의 예민한 시선이 근대화의 이면에서 고통 받는 소외된 인간들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시를 떠도는 부랑자나 걸인이기도 했고 무기력한 남편이기도 했다. 고뇌하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이 바로 그러한 전형이었다. 그들은 복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무기력한 인간 군상들이었다. 집단화되지 않으면 무기력한 개인으로 남아있어야 할 뿐이었다. 우리의 경우 20세기의 수많은 집단적인 투쟁이나 혁명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설명한다. 참으로 극단적인 시대였다. 집단과 개인이란 아주 이질적인 관계로 존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개인은 아주 강해졌다. 개인과 집단이 극단적이고 이질적인 성격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계가 모호할 정도로 상호작용이 쉬워진 것이다. 인터넷이란 막강한 매체 때문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블로그 또한 마찬가지이다. 권력의 형성이 개인들이 모인 인터넷에 의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미지 출처:www.sung-ho.pe.kr/?p=17679



다소 벗어난 글의 흐름에서 다시 돌아와, 그렇다면 영화는 어떠한가. 개인적인 판단으로, 20세기의 고전적인 권선징악의 스토리는 21세기에도 여전한 것처럼 보인다. 물론 보편화 시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개인의 비극과 파멸을 다룬 영화도 많기 때문이다. <시민 케인>, 심지어 <람보>도 그런 부류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프랑스영화가 두드러진다. 아마도 실존주의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영화가 사회를 반영하는 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폭력과 살인이 난무한다. 이데올로기로 다소나마 제어되던 인간의 잔인한 본성이 출구를 찾았기 때문일까? <양들의 침묵><한니발>이 그렇다. 무슨, 무슨 살인사건이니, 사이코 영화, 새디즘이니, 메조히즘이니 하면서 폭력이 난무한다. 전쟁영화와는 그 폭력의 격이 다르다. 참 잔인하다.


한국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잔인한 폭력과 살인이 빠져버리면 성립하지 못하는 영화가 부지기수이다. 복수라는 용어는 무수하게 나타난다. <복수는 나의 것><올드보이>가 그렇다. 칸느 영화제에서 그렇게도 격찬한 <올드보이>의 폭력신은 도대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복수는 나의 것>의 경우 영화가 복수의 대중화를 선언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엄연히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세상에서 개인적인 복수를 용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용인할 수 없는 행동을 선명한 영상으로 목격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화는 민주주의를 역행하는 것일까? 아니면 법을 조롱하는 것일까? 아마도 법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조차도 인간은 상상적인 복수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소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억울한 약자들을 위해 복수를 해주는 정의로운 개인, 정의의 대리자가 나타나 사악한 집단을 보기 좋게 쓸어버리는 것을 소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 특히 약자들의 본성 속에 내재해 있는 특성이 아닐까 하며, 영화는 이러한 약자들의 소원인 복수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충족시켜준다. 이것은 문학적인 결말이나 여운과는 다소 다른 방향이다. 바로 이러한 방향이 현실에 대한 영화의 발 빠른 반응이며 대중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자토이치는 바로 이 복수의 이야기이며 복수를 위한 대리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복수를 소원하는 자들은 대체로 약자들이다. 여자들이고, 무기력한 남편이고, 사회의 빈곤층이다. 그런데 약자들 중에 약자라고 할 수 있는 맹인 낭인, 자토이치가 정의의 대리자라는 것은 약자들의 복수의 소원을 가장 극화시킬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가장 약한 자가 가장 강한자로서 복수의 칼을 날려준다는 사실은 얼마나 통쾌한 쾌감, 카타르시스를 제공해 주는가. 즉, 복수의 대리자가 장님이라는 사실, 그의 검도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이로운 신비에 가깝다는 데 복수의 대리 만족은 더욱 커지는 것이다.


복수는 자토이치의 것! 그는 우리보다 더 불운한 장님이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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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3 10:41

[꽁트] 왕몬도씨 고자되다(3)




왕몬도씨 고자되다(3)

똥개(?)는 없었다. 제법 잡초가 무성한 곳이라 비아그라 통을 찾는 것은 물론이고 흩어졌을 알약들을 찾는 것은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할 일이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잡초들을 몇 번 뒤적여보았지만 비만한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 찾는 것을 중단해 버렸다. 그의 입에서 짜증 섞인 신음이 새어나왔다.


“개새끼. 비아그라를 혼자 처먹어. 보신탕 감으로는 정말 제격이겠군.”


지독한 구두쇠인 그가 그 비싼 알약들을 찾는 것을 단념한다는 것은 참으로 원통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구두쇠인 그에겐 쓰디쓴 경험이었다. 그는 잡초를 딛고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똥개는 어디에고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파트 베란다를 올려다보았다. 애완견이 머리를 내밀고 주둥이 밖으로 혀를 내밀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빌어먹을 개새끼……’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자신의 아파트 동 앞 주차장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차를 타고 아파트 주위를 뒤져보려고 했다. 그 빌어먹을 놈의 똥개가 아직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사실 개였는지 고양인지도 정확치 않을 뿐더러 설령 개라고 하더라도 종(種)이나 생김새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개’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비아그라를 그에게서 앗아간 저주받아 마땅한 ‘그 개’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지금 당장 잡아 배를 갈라보면 비아그라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동네 여기저기에서 억울한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개들이 생길 가능성을 의미했다. 그는 시동을 켜고 앞 차창을 통해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여름의 폭염 때문인지 사람들의 모습은 드문드문 그의 시선으로 들어왔다. 그의 아파트 앞 동 건물에 같은 간격을 두고 아가리처럼 뚫려있는 입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다. 오른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경비실에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경비원은 더위에 지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경비실 옆의 테니스장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으며 차를 서서히 움직였다. 큰 도로 쪽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 테니스 코트장 앞에서 다시 우회전을 한 뒤 수퍼 앞에서 좌회전을 하면 20미터 앞으로 큰 도로가 나왔다. 그 큰 도로로 나가는 20미터 정도의 길은 골목이라 하기에는 넓고 도로라 하기에는 약간 좁은 길을 지나게 되는데 바로 그 양쪽으로 꽃다방, 빛나 이발소 등 제법 큼지막한 간판들을 내걸고 있는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길을 가로질러 좁은 골목들이 뻗어있었다. 그는 천천히 차를 몰면서 골목골목을 살폈다. 그러나 그 골목들에는 여름의 폭염만이 하품을 하고 있을 뿐 똥개의 그림자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두 번째 골목을 왼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양마담의 가게와 몇몇 식당들을 끝으로 주택가와 이어진 골목이었다. 그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작열하는 태양이 그의 동공을 때려왔다. 어떤 이유에선지 마치 똥개를 찾지 말라는 신호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포기 할 수는 없었다. 이미 그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동시에 짜증이 몰려왔다.


‘그 놈에 개새끼 한 마리 때문에…….’


차를 타고 골목 구석구석을 누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홧김에 차를 몰았지만 큰길보다 더 많은 작은 골목들에는 눈길 한번 던질 수가 없었다. 좁은 골목을 앞에 두고 그는 차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기름 값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잡종 똥개’를 생각하며 분노로 이를 뿌득뿌득 갈았지만 그는 결국 양마담의 가게 맞은편에 차를 세우고 의자 뒤로 목을 젖혔다. 의자에 목을 잠시 젖히고 있는 사이에 수면의 여신이 그의 눈꺼풀에 키스하며 달콤한 오수를 즐기라고 유혹했다. 그 순간 그는 잠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으니 그의 분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꿈속에서 그는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개 두 마리를 보았다. 암놈은 석녀의 애완견이었고 수놈은 그가 어렴풋하게 머리 속에 그리고 있던 잡종 똥개였다. 똥개는 암놈과 사랑을 나누면서 비아그라를 먹어대고 있었다. 안돼, 안돼! 그가 소리 지르며 잠에서 깨었지만 다시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에는 석녀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는 듯 희열에 찬 신음소리를 간간이 내뱉고 있었다. 그 만큼 문도씨는 단순한 인간이었다. 그렇게 단순했기에 비아그라 한 통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소동을 벌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비극적인 일이 신기하게 일어난 것인지 신기한 일이 비극적으로 일어난 것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에게 닥친 비극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허망한 비극이었다. 결국 ‘비아그라’ 라는 정력제 한 통으로 벌어진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자고 있는 승용차를 골목을 지나던 청소차가 덮쳤으니 비아그라 한 통이 일으킨 사건치고는 가히 가공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지나가던 개 한 마리를 피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핸들을 돌리면서 그의 승용차를 덮쳤으니 그의 개에 대한 저주가 개에 의해 응징을 당한 꼴이었다. 만약 그 개가 그가 비아그라를 먹었다고 막연히 추측하며 찾고 있던 바로 그 ‘잡종 똥개새끼’ 였다면 그 사고는 한 마리의 개에게 농락당한 한 인간의 비극으로 설정될 수 있을 것이다. 사고 현장을 목격한 양마담이나 청소차 운전사의 진술에 의하면 그 개의 입에는 약통 같은 흰 프라스틱 통 하나가 물려져 있었다고 하니 비아그라와 문도씨와 그 개의 상관관계를 부인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정력제 한 통을 찾기 위해 나갔던 길이 고자가 되는 길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고로 그는 성기를 절단하게 되었으니 정력의 최전방 기지이면서 가장 핵심적인 전략 기지의 상실이었다. 어떤 전투에서도 패할 수밖에 없는, 아니 전투에 참가할 수조차 없는 극한 상황에 빠져들고 만 것이었다. 정력의 확대를 삶 그 자체의 본질로 생각하던 그에게 성기의 절단은 곧 사형선고 와도 다름이 없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가 고자가 되고 난 뒤에도 석녀는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그에게 아양과 애교를 과장되게 떨어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가 죽지 않은 것을 내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석녀는 더욱 더 구두쇠가 되어가는 문도씨를 포기하고 제비족 스왈로우 박과 떠났으며 석녀의 애완견은 어떤 개와 함께 야반도주를 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문도씨가 분노로 치떨던 ‘그 잡종 똥개새끼’ 인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말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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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2 19:19

[생각 돌아보기] 휴대폰 저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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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http://kr.news.yahoo.com/servi



휴대폰 저 너머


하나의 발명품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혜택은 발명품 자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휴대폰을 예로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편리한 통신 기능 외에도 시간의 절약에서부터 편안함 등 많은  부수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휴대폰의 의미를 한마디로 축약한다면 편리에 있다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니지 싶다. 업그레이드라는 발상 자체가 성능의 향상과 사용의 편리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성능의 향상과 사용의 편리성이라는 것이 결국 사용자의 편리를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진화가 가져 온 것처럼 인간은 얼마나 편해질 수가 있을까? 그 편리함의 끝은 어디일까? 인터넷이나 휴대폰의 진화를 보면 우리는 지금 인간이 궁극적으로 편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과학적인 편리는 궁극(窮極)적인 종교의 평온함 또는 경건함과 통할 것 같이 여겨질 정도다. 과학과 종교가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신이나 교의에 대한 과학적인 논증이 아니라, 종교적인 정적 묵상의 평온함이 과학이 만드는 편리와 상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끊임없는 업그레이드와 기능의 향상이 정신과 육체의 편안함을 제공해 준다면 그것이 곧 종교적인 평온과 다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팽배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과학이 추구하는 세상은 진정 파라다이스가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육체적으로 가장 편해지는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아마도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세상일 것이다. 휴대폰이 없었던 세상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과학이 발달한 지금이 더욱 편해진 세상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과거에는 생명을 앗아간 아주 심각했던 질병들이 의학의 발달로 사라져 버린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푸닥거리로 질병을 고치려고 했던 무당의 권위를  의학이 대체하고 신화속의 신들의 자리를 과학적 이론이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편안함의 성격이고, 그  끝이 있을까의 문제이고 그 끝이 종교적의 궁극과 상통할까의 문제인 것이다.


과학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이 세상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음에 반해 종교적으로는 천당이나 극락과 같은 궁극적인 내세를 제시하고 있다. 만약 과학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편안함이라면 천당과 극락 이 과학적인 현세로 제시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차이라면 내세와 현세라는 차이가 될까?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와 과학은 상통한다고 말해도 될까? 물론 이러한 생각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지만 천당과 극락이 어떤 긴장이 완화된 상태로써 과학의 궁극적인 편리와 편안과 연결 된다는 약간은 과장된 추론의 일부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글의 서두에서 <과학적인 편리의 궁극(窮極)은 종교와 통할 것>이라고 하는 발언의 의미는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획일화되고 기계적인 과학에 대한 회의로 인한 종교로의 도약이나 내세의 천당이나 천국이라는 종교적 가치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에 불과하다. 즉, 과학에 대한 회의가 종교로의 도약을 가져다 줄 것이란 측면에서 종교와 과학의 접점을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육체의 편리와 더불어 정신의 편안함을 함께 제공해 주지는 못하리라는 우려 때문이다. 오히려 과학이 인간의 정신을 황폐시킬 것은 물론이고, 자연의 균형을 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엘리뇨 현상, 온실효과, 산림 파괴 등 자연의 황폐화가 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과학적인 인간의 편리함이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세의 디스토피아나 지옥처럼 궁극적으로 지구의 멸망을 앞당길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의 편리함의 끝에 정신적인 불편이 존재하게 되고 그 정신적인 불편이 종교를 요구할 것이라는 가능성 있는 추측에서 과학과 종교의 접점을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인 편리가 불편이 되고 자연의 황폐함 앞에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절박함에 처할 때 종교는 더욱 가치를 발산하게 될 것이다.


과학은 계속해서 발달에 발달을 거듭할 것이다. 휴대폰은 계속해서 만들어 질 것이고 더 새롭고 편리한 것이 이전 것을 대체할 것이다. 신이 역사의 태엽을 감아놓은 이상 인간의 역사는 계속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한숨 한 번 돌리고 잠깐 쉬어가자고 한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것 같은가? 인간은 이미 브레이크 페달을 상실한 상태이다. 카지노에 빠져 돈을 탕진하듯이 편리함의 가치에 빠져 결국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저 그 엄청난 현실로서의 과학의 도덕성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는 막막한 생각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종교의 가치를 음미했으면 좋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인 묵상의 미덕을 인간의 편안함으로 여겨보자는 것이다. 온갖 유행들과 버전들과 업그레이드로 정신없이, 빠르게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이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편안함이라면 ‘정적인 묵상’ 이 지극한 편안함임을 깨닫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추구하는 것이 빠름이지만 결국 그 빠름은 인간의 편안함, 즉 인간 삶의 평안함, 쾌적함이라는 것, 그리고 그 평안함과 쾌적함이라는 것은 곧 여유 있고 느린 삶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결국 느림을 위한 빠름이란 것을 명심했으면 한다. 과학이 이토록 빠르게 발전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과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끊임없는 발전의 추구에만 있다면 도대체 인간은 왜 살아가는 것이며 과학은 왜 발전해야 하는 것인지 한 번 쯤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도 해야 하리라고 본다. 빠름 속에서 느림을 찾아보는 것, 느림 속에서 빠름을 되돌아보는 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 중요한 화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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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1 15:29

[꽁트] 왕몬도씨 고자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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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kr.fun.yahoo.com/NBBS/n




 왕몬도씨 고자되다(2)


중복의 더위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비만인 그에게 여름의 폭염은 가시방석보다도 더 싫었다. 젊은 아내 석녀는 외출중이었다. 고등학교 동창들 계모임으로 아침 일찍 집을 비웠다. 그는 새파란 석녀가 요염하게 꾸미고 외출을 하는 것이 사실 두려웠다. 그의 그런 두려움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석양이 그의 귀에 대고 콧소리로 속삭였었다.


“자기, 나 당신밖에 없다는 것 알죠--응. 당신 두려워한다는 것 나 잘 알고 있다구요. 새파란 계집이니 그럴만도 하겠죠. 하지만 난 당신밖에 없다구요, 알겠죠, 응. 오늘밤에...응. 그럼 다녀올게요.”


그의 머리는 여전히 의심으로 가득 찼지만 석녀를 믿기로 했다. 그런 믿음은 사실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요염하게 차려 입은 그녀의 외출을 의심하고 흥신소 직원을 미행케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의심할 만한 일은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젊다는 것을 이해해주어야 했을 뿐이었다. 늙은 영감과 사는 것이 때론 고독을 몰아다주지 않겠는가? 미행한 흥신소 직원으로부터 그녀가 친구들과 어울려 오락실과 카페를 전전하고 쇼핑을 즐긴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그가 자신에게 한 질문이었다.


‘그래 그 정도라면 이해할 수 있다. 세대는 그 세대에 알맞은 놀이 문화가 있는 것이다.’


그때 그는 제법 아량 있는 표정으로 아량 있는 마음으로 아량 있는 말로 혼자 중얼거리며 자신의 아량에 흐뭇해했었다. 그는 그런 아량을 가지고 그날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15층의 아파트로 들어와 뚫려있는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다 열어 젖혔다. 열려진 창문들을 통해 제법 서늘한 바람이 그의 땀에 젖은 몸뚱이에 와 닿긴 했지만 땀은 여전히 비오 듯이 퍼부었다. 현모양처인 석녀가 데리고 온 애완용 개가 낑낑대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었다. 그는 점심때 먹었던 보신탕을 생각했다. 하지만 석녀가 그가 사준 보석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끔찍이도 좋아하는 애완견이고 보면 그의 개에 대한 영향력은 보잘 것이 없었다. 물론 보잘 것 없는 크기가 보신탕 감으로도 부족했다. 시계의 시침이 3이란 숫자를 살짝 넘어 있었다. 그는 낮에 구입한 비아그라 병을 들고 알약 두 개를 끄집어내어 단숨에 삼켰다. 흐흐흐. 그리고 그는 선풍기 앞에 벌렁 드러누워 약의 효능이 효과적으로 몸으로 퍼지기를 바랬다. 그런데 불행한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방심한 탓이었을까. 믿기지 않는 사건이었다. 그 병아리만한 애완용 개가 비아그라 통을 입에 물고 베란다 쪽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재빨리 달려가 약통을 낚아채려 했지만 이미 늦어있었다. 비아그라 통은 개의 밉살 맛은 주둥이를 벗어나 중력의 노예가 되어 낙하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악. 아까운 비아그라. 거금이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그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땐 이미 가속도가 붙어 엄청난 속력으로 떨어져 흙바닥이긴 하지만 살인적인 마찰력으로 인해 박살이 난 듯 비아그라 통은 흔적조차 없었고 사방에 흩어져 있을 알약들의 흔적도 알 길이 없었다. 사람도 병아리 만하게 보이는 판에 알약이야 오죽하겠는가. 15층이란 물리적인 거리는 그것을 구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약과 약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듯 했지만 그것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확인시켜주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였다. 약통이 떨어졌을 법한 자리에 개 한 마리가 열심히 무언가를 핥고 있었다. 그것은 비아그라가 분명했다.


“오오, 저놈에 개새끼가!”


비아그라를 핥아먹고 있는 똥개(?). 그는 석녀의 그 밉살맞은 애완견을 노려보았다. 고의가 아닌 듯 능청을 떨고 있었지만 그건 고의가 분명하단 생각이 들었다. 내연의 똥개(?)를 위해 비아그라를 선사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황으로 보아 그렇게 의심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지만 [개 같은 일]이란 관용어를 상기해보면 이런 개 같은 일이 일어날 법도 하지 않는가.


‘이런 개 같은 일이’


그는 석녀의 애완견을 창 밖으로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순간 그의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생각에 그 지독한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다. 아니 훗날을 위해 억제해야만 했다.

‘내연(內緣)의 그 똥개(?)를 은밀하게 만나겠지……’


미행이란 말이 떠오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고 동시에 복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밉살맞은 현양의 애완견을 미행한다면 분명 단서가 잡힐 것이다. 그는 일단 일보 전진을 위해 한 걸음을 후퇴하기로 마음을 다져먹고 애완견을 노려보았다. 애완견은 꼬리를 내린 채 석녀가 밥통을 놓아주는 부엌과 거실의 경계를 구분하고 있는 듯이 놓여있는 식탁 아래로 숨어 들어갔다. 그는 다시 애완견을 째려보았다. 그리고 옷을 주워입고 밖으로 나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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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6 15:15

[꽁트] 왕몬도씨 고자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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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kr.fun.yahoo.com/NBBS/n

 


왕몬도씨 고자되다
(1)


정말이지 지독한 구두쇠가 있었다. 그는 무엇이던지 아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었으니 색(色)이 그것이었다. 그는 색을 무척이나 밝혔다. 특히 50대 접어들면서 회춘(回春)을 위해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투자를 했으니 구두쇠이면서도 투자가인 셈이었다. 하지만 사실은 정력 향상에 대한 투자는 결국 자신에 대한 투자였으니 따지고 보면 구두쇠이상의 인색함이었다. 그는 정력제는 물론이고 강정식품이나 건강보조식품등을 상시적, 일용식으로 복용하면서 ‘몬도가네’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정력 향상에 전력했다. 그의 친구들과 이웃의 또래들은 그의 이름인 문도를 몬도로 바꾸고 김씨 성을 왕씨로 턱 바꾸어 부르길 좋아했으니 ‘왕 몬도’가 그의 별칭이 되었다. 만약 그의 엄청난 투자에 비해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면 그의 투자도 일찌감치 끝장이 났을 것이다. 본처인 고씨 부인에게 만족하면서 인색을 불변의 가훈으로 삼으면서 그렇게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투자에 대한 산출의 효과는 엄청났고 정력은 끝 모르게 향상되었다. 인색이 아니라 호색을 가훈으로 바꾼 것도 그런 자신감이 만만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정력의 실험 대상들은 사거리 꽃다방의 종업원인 20대 초반의 오양과 빛나 이발소의 30대 초반의 임양이었다. 실험대상이 된 오양과 임양은 그의 정력에 초죽음이 되어 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런 그가 50이 넘어 본처와 이혼을 하고 20대 후반의 요염한 여자를 안방 주인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정력에 대한 이러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시들거리는 본처에게는 자신과 함께 균형있는 투자를 않음으로서 정력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심화되어 종국에는 본처를 패대기 쳐버린 것이었다. 최근에 등장한 '비아그라'라는 정력제는 세인들의 초미의 관심거리였는데 구두쇠이면서 동시에 정력에는 대투자가인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바이그라가 이 지독한 구두쇠를 한 불행한 사건으로 몰고 가는 계기가 되었으니 색은 불행한 종말을 낳는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비아그라를 구입한 바로 그날은 중복(中伏)이었다. 보신탕으로 점심을 때운 그는 아파트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다녔다. 중복(中伏)의 도시 거리는 이글거렸지만 아파트 빌딩의 그림자가 그런 그의 어슬렁거림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는 비아그라를 사기 위해 미제 물건들을 취급하는 ‘옥이 엄마’라는 상호를 달고있는 양품점으로 향했다. 옥이 엄마는 50대 중반의 육중한 여자로 근처 사람들에게는 ‘양공주’ 가 아닌 ‘양마담’으로 통했다. 옥이는 그녀의 딸로 흑인 병사와의 사이에서 난 혼혈아였다. 전형적인 흑인의 모습을 닮아있어 그녀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가히 어렵지 않았다. 옥이는 외모와는 달리 마음이 여리고 순진했다. 양마담의 자식이라고 하기에는 유전적인 요인의 관련성이 너무나도 희박해 보였고 오직 환경적인 요인이거나 흑인 아버지의 성격을 빼 닮았을 것이라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이런것들 외에는 양마담 그녀의 이력에 대해서는 이웃들의 입을 통해 몇 가지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만 무성했을 뿐 그녀의 이력은 대충 추측의 수준에 머물러야만 했다. ‘양마담’ 옥이 엄마는 그에게 제법 유용한 소식통의 역할을 했다. 암암리에 그는 옥이 엄마를 통해 미국의 유명한 영어 잡지인 ‘플레이 보이’지나 ‘펜터 하우스’지, 그리고 ‘뜨거운 비디오’를 구입할 수 있었고 미제 정력제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특히 미제 정력제를 선호하는 이유는 비아그라의 효험 때문이었다. 그에게 삶은 정력의 확대였으며 정력의 확대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숙청해버렸다. 아들 다섯에 딸 둘을 두고도 본처와 이혼을 마다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정력을 만족하기 위해서, 아니 과시하기 위해서 얻은 20대 중반의 현 석녀는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았다. 그녀와 살기 위해선 지속적인 정력의 강화와 연습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고씨와의 이혼 후 얻은 20대의 자칭 ‘현모양처’인 새 아내 석녀는 그에게 있어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호색녀였기도 했다. 그가 정력의 날을 예리하게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심 그의 재산을 탐내고 있던 석녀 또한 자신의 정력을 갈고 닦고 있었던 것이다. 색(色)으로 왕 몬도의 영혼을 앗아갈 작정을 했기에 석녀의 눈초리에는 살기가 색을 발하고 있었다. 실제로 꽃 다방의 오양과 빛나 이발소의 임양과는 그 격이 달랐다. 그의 정력에 맥없이 떨어진 다방과 이발소의 두 핏기 없는 아가씨들과는 파괴력이 완연하게 달랐던 것이다. 석녀의 내심이 어떻든 그는 자신의 정력을 새로운 단계로 이끌어준 그녀의 고급하고 현란한 색(色)에 고마움을 표했으며 자신을 긴장과 도전 의식으로 깨어있게 하는 그녀가 좋았다. 그가 설정한 뜨거운 삶의 목표가 언제나 그의 삶에 대한 의욕을 충전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인 의미에서의 회춘만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회춘이기도 했다. 정력의 확대 이콜 삶이란 진리. 색기에 살기가 넘치는 이런 20대 후반의 아내 ‘석녀’를 위해서 그는 양마담의 최신 정보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권투로 치자면 양마담은 그에게 코치 같은 존재였다. 물론 양마담의 정보가 다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제의 의미는 그에겐 아직도 고급이었으므로 우선해야할 정보의 가치로 충분했다. 비아그라의 효능에 대해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양마담의 후한 선심 때문이었다. 비아그라라는 약이 언론을 통해 소개되고 관심이 고조되었지만 그 효능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았었다. 물론 체질에 따라서 약효가 제각기 다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의혹이 먹구름처럼 그의 머리에 잔뜩 끼어있을 때 양마담의 제안은 그의 귀를 제법 쫑긋하게 했던 것이다.


“자, 이거 먹고 오늘 한 번 시험해 봐요. 체질에 맞는지.”


그는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그녀가 주는 알약을 주워 삼켰던 것이다. 그 즈음 현모양처를 라벨처럼 달고있던 본심 색모색처 석녀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던 그는 그날 밤은 그 비아그라의 약효 때문인지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대 접전을 벌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비아그라가 대단히 효과적임을 확인시켜 주었고 드디어 그것을 구입하고자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현모양처’ 석녀의 헌신적인 사랑을 위해서라면 거금의 투자(?)는 전혀 아깝지가 않았던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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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4 22:05

[꽁트] 어떤 이별식



 

어떤 이별식


슬프군. 그래도 내 곁에 제일 오래 머물러 준 존재인데. 언제나 이별은 있기 마련이지. 말 좀 해봐. 언제나 대화가 이렇게 일방적이니 쉬 입을 열기도 거북스러워, 알겠니. 하지만 오늘은 다르기도 해. 네가 입을 여는 건 더욱 힘들 테니. 넌 내게 너무나도 충실했어. 넌 언제나 나를 허락해 주었고 내 지친 육체와 영혼을 쉬게 했지. 그건 말야, 정말이지 쉬운 노릇이 아닌데 말야. 넌 언제나 성급하고 무지막지한 나의 삽입에도 고통의 신음소리 한번 내지르지 않았고, 너를 발악적으로 짓밟을 때조차도 언제나 순종적이었어. 뭐냐 말야! 되돌아보니 난 너의 그런 모습에서 사디즘을 느끼고 있었어. 왜 나를 그토록 가학적으로 만들었니. 왜 그토록 나를 잔인하게 만들었니. 너의 자학적인 쾌감 때문이었니. 그런 순종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라도 하려는 거니. 젠장. 다른 여자들과의 정사(情事)의 장면을 목격했을 때조차도 넌 그 흔한 질투 한 번 보이지 않았어. 세상에 널려있는 그 불평 한 마디조차도 내뱉지 않았어. 왜 그랬어.


― 미친 놈, 지랄하는 군.


봐, 지금 우리 곁을 지나가는 저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저런 병신 같은 자식이 지 부랄 만지듯이 끼어드는 것 봐. 옆에 끼고 있는 계집애가 불쌍하군......세상은 이런 곳이란 말야. 저 따위 인간도 저토록 쉽게 욕설을 내뱉는데 하물며 내게 그토록 시달려온 넌 원망은커녕 불평 한마디 없으니 어쩌면 저 병신 같은 놈이 한 욕설은 너를 향한 욕설인지도 몰라. 세상은 순수 하나로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이 아냐, 알겠니. ’순수‘ 는 ’지랄‘ 이란 말처럼이나 관념적일 뿐이야. ’지랄 같은 놈’ 은 존재할 수 있지만 ‘지랄’ 이란 말은 그저 관념적인 용어일 뿐이지. 마찬가지로 순수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없단 말야. 그런데 순수 그 자체로 존재하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는 거니. 존재할 수 없는 것을 붙들려는 거냐. 그런 너야말로 미친년이야. 알겠니. 제기럴. 지금이 조선시대인줄 아니. 나도 한때 아주 복종적이기만 한 여자를 찾아 헤맬 때도 있었지만 그건 시대 착오였어. 


― 지랄. 철학자군, 철학자. 뭘 잘못 처먹었나.

 

그래 얼마든지 비웃어라. 개자식들아......난 네 몸매처럼이나 네 마음이 조금은 교활하고 음탕할 줄 알았지. 섹시한 네 몸매만큼이나 섹시하길 바랬지. 헌데, 그게 아니었어. 네 몸매와 마음은 따로 놀았어. 처음엔 아주 획기적인 유물을 발견한 고고학자처럼이나 흥분 속에 휩싸이며 끝없는 오르가즘에 빠지기도 했고 그런 네 몸매를 내 뜻대로 맡겨버리는 그 완전한 순종에서 백치미의 매력을 느끼기도 했었지.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백치미가 아니었고 따라서 매력도 아니었어. 약간은 멍청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그런 백치미가 아니었던 거야. 사실 넌 너무나도 완벽했고 정확하기만 했어. 그저 백치처럼 눈감아 주었을 뿐이었지. 무수한 내 오입질과 너에 대한 가학을 넌 마치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어. 그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그렇게 다가왔기에 신기함을 느꼈을 뿐 더 이상의 도발적이고 육욕적(肉慾的)인 쾌감을 느낄 수는 없었어.


― 사랑은 쓰고도 쓴 법이지. 알만해. 쯧쯧.


자식, 꼴값을 떠는 군. 사랑을 종류별로 다 해봤다는 말투 군. 하긴 사랑이 쓸 때도 있지......말 좀 해봐. 솔직히 난 너의 그 몸매를 원했어. 너의 몸매만 봐도 난 오르가즘을 느낄 지경이었지. 그 나이트 앞에서 널 처음 보았을 때 난 널 정복하고 싶었어. 네 시선으로 스쳐 가는 너의 몸매, 그 몸매 때문이었지. 솔직히 뭇 사내들의 하룻밤의 ‘등정’ 과 ‘정상 정복’ 스토리와 다름이 없었지만 말야. 난 숱하게 많은 여자애들과 사귀고 있었고 그저 너의 그 몸매가 시선으로 들어왔을 뿐이긴 했지. 처음처럼이나 네 몸매 때문이긴 했나봐. 길어봐야 3개월을 넘지 않은 여자애들과의 관계를 본다면 1년이나 넘게 지속된 너와의 관계는 정말이지 너의 그 몸매 때문이었던가 봐. 괜한 칭찬이군.


― 여자 몸매, 왝--. 그거 참 좋은 거지 좋은 거, 왝왝---. 태액시---따따불---.


많이도 취했군. 몸매란 말은 들리는가 본데 집으로 곧장 가셔......하지만 널 만나고 너의 속마음이라고 할까, 성격이라고 할까, 아무튼 널 깊이 알면서부터 네 그 위선이 너무나도 싫어졌어. 네 몸에 올라타 짓밟을 때도 넌 지아비 마냥 정성을 들이기만 했고 어떤 반대 급부도 원하지를 않았어. 다른 계집들은 어떤지 알잖아. 언제나 흥정이지. 흥정 말야. 사랑이란 말을 지껄일 때조차도 흥정일 뿐이었지. 돈으로 처발라주어야 사랑이란 말을 반대급부로 내뱉어 주었지. 원래 그런 게 사랑의 공식 같은 것이었어. 그런데 넌 그게 아니었단 말야. 알겠어. 그저 주기만 하고 베풀기만 했지. 순종하기만 했어.


― 야,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냐. 네 차와 이별식이라도 치르고 있는 거냐? 오, 이제 몸매가 끝내주는 네 차 드디어 내게 넘어오는 구나. 흐흐흐. 1년이면 폐차 아니냐. 


녀석이 30분 빨리 도착했군. 녀석의 모터 싸이클과 널 맞바꾸기로 했어. 이젠 제발 녀석에게 위선을 떨지마, 제발. 알겠니. 오늘 마지막 너와의 이별을 위해 이별식처럼이나 긴 대화를 나누었군. 그럼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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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3 00:50

[꽁트] 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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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아주 가끔 똥보다 더러운 이유

자넨 신문을 다 보고 나면 그 신문을 어디에 가장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하나? 질문이 좀 요상하긴 하지만 재미로 하는 질문이라 생각하게. 난 이게 참 궁금해. 신문에는 수많은 정보가 있거든. 정보는 대체로 정리를 해 놓아야 하는 것이고 말야. 신문 공급자의 입장에서 보면 많은 애를 써서 만든 것인데 소중하게 다루어지길 바랄 거야. 하지만 쓰레기인데 어쩌겠어.


신문은 쓰레기로, 포장지로, 휴지로 주위에 널려 있거든. 그렇다면 정보가 정보답지 않다는 것이겠지. 심지어 똥을 닦기도 하고 말야.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내 생각으로는 현실과 정보간의 괴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데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난 정말 신문을 보면 신문이 너무 유치해 죽을 지경이야. 이 세상에 신문만큼 유치한 것도 없을 거야.


제일 처음으로 신문 정보와 현실과의 괴리에 대한 설명을 위해 신문의 해외여행 정보나 광고를 예로 인용하고 싶네. 미주나 유럽 경우 10일 정도 기준으로 1인당 2~3백만원 하는 저질 싸구려 관광의 경우인데 어찌 이런 여행을 고상하다는 신문 광고에 버젓이 내놓을 수가 있냐 말야. 이럴 때 느끼는 신문 정보와 현실의 괴리감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어. 꼭 신문 정보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야. 적어도 호화 유람선 세계 일주나 1인당 1억 정도 호가하는 여행 상품 정도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야 뭘 보았다, 뭘 좀 먹어 봤다, 뭘 좀 구입했다 할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 이런 싸구려 신문 조각으로 똥이나 닦을 수밖에.


그 다음은 말야, 한심하게도 부부생활에 대한 의학 정보들의 경우인데 정보와 현실의 괴리감을 참 많이 느끼게 해주지. 황당하고 기가 찰 노릇이네. 사실 이러한 정보들은 부부 생활의 위기와 권태를 반영한다느니 하며 시술이나 치료약을 팔아먹기 위한 얄팍한 상술 같기도 한데 참 의사들도 할 일이 없나 보지. 도대체 왜 이러한 기사를 의학의 권위를 빌려 신문 지면을 어지럽히는지 이해가 안가네. 자네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군. 돈이면 해결 안 될 것이 있다고 보나? 돈 이꼬르 에브리딩 아니겠나. 섹스리스니 불감증이니 부부생활의 위기라느니 하는데 자네도 그런가? 그건 다 돈 때문이 아니겠어. 경제력의 문제라는 걸세. 요즘 보면 의사들도 제법 머리를 굴린단 말야, 그렇지 않나? 그런데도 능청스럽게 부부생활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거든. 코메디야 코메디! 참 현실과 너무 괴리감을 느끼는 정보가 아닐 수 없네.


연예인들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야. 좀 잘 나간다는 연예인들의 오만한 체 하는 얼굴 사진이나 뭔 자랑할게 있다고 지랄을 뜨는 꼴을 보면 많이 까분다는 더러운 기분을 느껴. 방송의 조명을 받고 언론에 이름깨나 오르내리니 지들 잘난 맛에 까불고 노는 모양인데 눈꼴사나워, 그렇지 않나? 신분이 비천한 광대에 불과한 주제에 돈 좀 번다 이거지. 내 비즈니스가 언론과 권력으로 그쪽 방면으로 좀 깔아 놓은 부분이 있으니 이용해 먹고 있긴 하지만 말야, 그래도 연예인들 면상은 지긋지긋해 그렇지 않아?


마지막으로 이건 가장 중요한 것인데......최근에 실린 내 신문 기사 정보와 현실과의 괴리가 단연 압권이더군, 허허. 그 말이야......자네가 쓰고 있는......나의 입지전적인 인간 드라마 시리즈 말이야. 어쩜 그렇게도 내 인생을......감동적이고......교훈적이고 숭고하게 만들 수 있는지 너무도 궁금하네. 자네 그 재능은......일품이야, 일품, 허허! 내 전과의 흔적과, 거짓과 위선의 흔적을 감쪽같이 장점으로 만들어 버린 자네의 그 글과 이미지를 이용한 분장술은 정말이지 무릎을 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 마누라를 천사로 만든 건 신의 경지로 칭송받아야 할 걸세!


이건 내가 지금껏 본 것 중에 신문 정보와 현실과의 가장 큰 괴리이지만 자네의 재능으로 봐서 신문 유감의 예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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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10 02:22

오늘 문득......

문득, 내 삶의 흔적들을 담아 놓고 싶을 때가 있다(아래 사진들은 2월의 사진들이다.) 2월말쯤으로 기억된다.  나는 먹는 욕심이 별로 없다. 아니 먹는 욕심이 참 많다. 나의 상상 속에는 음식이 많이 자리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럴듯한 식당에서 그럴듯하게 식사를 즐기려는 욕망이 반영된 상상이 아닐까.

내게 올 해 2월은 참 잔인한 달이었다. 1, 2월 내내 꽁트만을 썼기 때문이다. 사실 꽁트라고 해봤자, 알아주는 독자들도 없거니와 평해주는 평자들도 없는 꽁트 축에도 들지 못하는 잡글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꽁트라는 쟝르를 계속 붙잡고 싶다. 그리고 또한 누군가 읽어주고 평해주었으면 하는 것도 솔직한 바램이다. 변변찮은 외출, 외식,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아마 시티 투어 버스를 타고 별 의미없는 도시 관광을 한 것외에는.....

아침 늦게 일어나니 밥이 없었다. 냉장고를 열어 반찬꺼내 먹어라는 아내의 말을 이행하기도 전에, 밥상(밥상인지 책상인지 아니면 테이블인지 구별이 안되지만) 위에 전날 아이가 먹다 남은 정체불명의 밥을 발견하고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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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나물 밥인지, 김치 복음밥인지 구별이 안되는 퓨전 요리



요상한 요리에 그래도 참기름은 많이 부은 탓인지 고소하기는 했다. 나는 참기름을 참 좋아한다. 이유는 알수 없지만 고소한 맛이 참 좋다. 그래도 기름은 기름인지라 또 커피를 타서 마셨다. 언제나 똑같은 버릇이지만 커피가 빠질 수가 없다. 아이들이 사용하는 잔에 탄 일회용 커피인데 허연 프림기름(?)이 둥둥 떠있다. 커피는 참 좋다. 이 순간이 하루 중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항상 그랬다. 그러다 시계 바늘이 돌고 돌아 4~5시쯤이 되면 갑자기 우울해 지면서  센티멘탈 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콕족의 비극적인 운명(?)을 닮은 저녁무렵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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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퓨전음식을 먹은 후 배에 낀 기름기를 씻어내어야 한다.


기억이 좀 흐릿하다. 아래의 식단이 아내가 차려준 것인지 내가 차려먹은 것인지. 몇일 밖에 지나지 않은 사진인데도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 조명조차 단서가 되질 않는다. 넙치 조림에 비친 조명이 사진을 찍기 위해 켜 놓은 것인지 아니면 저녁이라서 켜 넣은 것인지 불분명하다. 아무튼 그건 별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넘어가기로 하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넙치 위를 무우로 가린 이유는 분명히 기억을 한다. 밥을 두어 숫가락을 떠 먹고 넙치도 살을 발라 먹고 나서 갑자기 사진을 찍고 싶어 넙치의 드러난 맨살을 무우로 덮었던 것이다. 좀 이상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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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조림과 국물에 비친 형광등 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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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와 콩나물을 담고 있는 그릇은 모 인터넷 사이트 쇼핑물에서 물건을 구입하고 사은품으로 얼마전에 받은 것이다. 식기들이 각각 다로 놀고 있다. 밥그릇, 반탄통들이 제각각들이다. 사은품 접시들이 빛을 잃은 모습이다.


그릇 모양이 달라 이상해 사진의 이름(날짜로 되어있다)을 보니  날짜가 다르다. 제일 빠른 사진이 2월 21일 늦은 사진이 2월 29일이다. 하루에 다 찍은 사진이라 생각했는데 기억이 영 사실을 벗어났다. (위 커피 사진이 2월 29일 찍은 사진이니, 식후 마신 커피라는 것은 거짓말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용서해주시고, 그때의 커피는 아니나 커피를 마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아래 넙치 조림 사진이 2월 26일로 되어있고 위의 넙치 조림 사진이 2월 21일이라 같은 넙치 조림인지 확인 할 수 없다. 만약 같은 넙치 조림이라면 냉장고의 성능이 참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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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넙치 조림과 같은 넙치 조림인지 참 궁금하다.



상추인지를 버무려 내놓았는데 그런대로 먹을 만 하다(계속 빌어 먹을려면 이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다.) 솔직한 말이지만 아내의 음식 솜씨는 좀 떨어진다. 그러나 질은 높다. 건강을 생각하는 채식, 상추와 콩나물, 그리고 무우가 더 많은 넙치 조림을 부면 건강에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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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에서 버무린 상추조림


음식 사진들이 참 그럴 듯하단 생각이 든다. 사진 찍는다고 식탁을 닦고 가리고 치우고 위장을 하니 그럴 듯하게 보인나 보다. 이렇게 속여서는 안되는데, 뭐 음식을 위한 코디라고 생각하니 별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는다.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먹고 사라진 음식인데 무슨 탄로(?)가 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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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먹은 멸치 조림이다. 태워서 좀 쌉살한 맛이 나긴 했지만 지나간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멸치였다. 사진으로 보니 뜨거운 불에 사정없이 볶였을 멸치들이 왠지 애처로워진다. 말라 비틀어진 멸치의 모습에서 인고의 흔적, 뜨고 있는 작은 눈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집단 학살된 멸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밤이다. 멸치의 비극이 인간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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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기는 저녁의 간식으로 해 준 것이 분명하다. 날짜를 보니 2월 29일이다. 무슨 일로 떡볶이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가끔씩 떡볶이를 하는데 맛은 그런대로다. 싱겁게 하는 이유는 건간상의 이유이다. 색깔이 그렇게 곱지는 않지만 간식거리로는 괜찮다. 나 떡보다는 어묵을 좋아한다. 아내와 딸은 떠을 더 좋아하고 아들 녀석은 나처럼 어묵을 더 좋아한다. 찍은 사진이 좀 그렇다. 먹음직스럽게 확대를 해놓을 걸 후회스럽다. 떡이 대부분인걸 보니 어묵을 다 먹고 나서 찍은 것 같다. 음식이란 음식 자체보다 주변의 꾸밈새가 음식을 더 먹음직스럽게 보이게 하는 것 같다. 숫가락은 좀 빼고나 찍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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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에 담긴 떡볶기도 멸치의 모습처럼 애처로워 보인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의 마음이 여유가 없고 활기가 없고 의기소침해 있었던것 같다. 정말 떡볶기가 주인을 잘못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너무했다. 떡볶기에게 용서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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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빵과 커피 사진의 날짜를 보니 2월 24일이다. 이건 분명 기억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날 친구를 만나고 사가지고 온 빵이다. 뒷 날의 저녁인지 낫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간식으로 먹은 것 같다. 커피는 딸내미가 타 준것이다. 아내나 나나 커피잔에 물만 부어 수저로 대추대충 젓어 마시기 때문이다. 커피 잔도 사용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이렇게 한다. 하루는 자기가 꼭 커피를 타보고 싶다기에 그래라고 했더니 요렇게 정성스럽게 탔다. 이렇게 탈 줄은 생각도 못했다. 커피 맛도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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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사 온 빵이다. 맛이 있었다. 내가 모르는 말레이지아의 빵가게에서 산 것이라고 하는데 빵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이 빵을 파는 가게가 이 빵 하나만을 판다는 것이다. 아무튼, 씹을 때 기름이 짜르르 빠져나오면서 입속에서 감돌았다. 맛이 좋았다. 빵모양을 보면서 이제부터는 먹기 전에 사진을 찍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 꼭 먹고 나서 사진 찍을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식탐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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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케익을 찍은 날짜는  2월 21일이다. 아들 녀석의 초등학교 졸업식날이 맞을 것 같다. 밤이다. 이 케익도 초를 다 끄고 나서 찍은 사진이다. 예쁜 모양이라고는 없다. 데크레이션이 거의 폭격을 맞은 상태이다. 올리기도 민망하지만 흔적이란 느낌에는 이미지가 맞는 것 같다. 다음에는 꼭 예쁜 케익을 예쁘게 찍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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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지나간 시간들의, 음식들에 깃든 삶의 흔적들을 남겨놓고 나니 부끄러움이 반을 차지한다. 그래도 이것은 삶의 기록으로 계속되어야 할 작업이 아닐까 한다.

댓글도 좀 남겨주시고 트랙백도 좀 해주시고 그러면 멋없는 주인 대신에 악조건에서 모델이 되어 준 음식들에게 커나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읽어 주시고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2008.3.1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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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23:50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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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트를 보낸곳              이미지 출처:http://kr.image.yahoo.com/GALL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크고, 작음이란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다. 절대적인 큼과 작음이 없다는 말이다. 크기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수준 또한 마찬가지이다. 더 잘났다, 더 우수하다 등도 상대적인 비교의 부산물이며 절대적인 기준이나 근거가 없다. 항상 비교의 대상이나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 개미는 인간 보다 작다거나, 인간은 사고를 하는 유일한 동물이다라고 하는 상대적인 비교대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경우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물체들을 비교대상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지 않거나 비교를 하는 경우에 자신을 중심에 놓는 좋지 않는 버릇이 있다. 아니, 좋지 않은 버릇이라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버릇이다. 그 비교는 항상 ‘우등비교’ 이거나 ‘절대적인 우위’, 또는 유일성 등으로 표현된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라거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정의가 바로 그런 경우들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인간이 이성적인 동물이라는데 절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정의에 동의할 수 있는가? 이렇게 ‘인간은 …… 이다’ 라는 식의 정의는 아주 인간중심적인이며 절대적인 사고이다. 이러한 잘못된 정의 자체가 인간이 이성적이지 않으며 만물의 영장도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전혀 이성적이지 않은 정의들을 남발하는 인간이 어떻게 이성적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들어 온 역사임을 인간은 깊이 있게 성찰해야 한다. 만물의 영장이기에 독단적인 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해 온 것이다. 이것은 아리안 족이 우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의 생각과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인간의 우월한 문명을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자연을 학살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이 살아남아 학살 원흉들을 단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은 인간에게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단죄의 형벌을 내릴지도 모른다. 이러한 징조가 지구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고 과학자들이 경고하고 있다. 지구 멸망의 영화가 유난히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이야 말로 인간다운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점유하고 있으며 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2008년으로 정의하는 현재의 시간과 인간이 건설한 도시들이 우주의 중심적인 공간이라는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습관이 너무나도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인간이 정의한 인간 중심적인 잘못된 인간에 대한 정의 때문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2008년이란 시간은 존재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지구라는 공간은 거의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도 초라하고 작은 인간이 그 스스로를 너무나도 과대하게 과장되어 버린 것이다. 작은 좁쌀이 확대된 뻥튀기에 불과한 것이다.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면서 인간 자신이 이 우주라는 유기체속의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비상식적인 왜곡을 중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한다. 이것은 당장 실행해야 할 인간의 과제이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너무나도 오만에 갇혀버려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식의 정의를 반복하고 있고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러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위기의식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제 인간은 자신 스스로가 정의하는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라는 식의 정의를 폐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입장에서 보는 ‘인간에 대한 정의’ 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인간 은 미생물이다.‘ 라는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는 광활한 우주 속의 작은 행성에 불과하며 인간은 작은 미생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인간이라는 미생물은 지구상의 다른 미생물들과는 달리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정의 할 수 있는 미생물’ 인 것이다. 이 정의는 우주적인 관점으로써 인간의 왜소함과 동시에 겸손을 드러내는 참으로 인간적인 정의가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인간중심적인사고나 지구중심적인 사고를 버리고 우주 중심적인 사고로 자신을 정의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우주 중심적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겸허한 생물이길 바란다.


이렇게 인간에 대한 정의를 다시 선언하고 싶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인간이 유기체의 균형을 파괴하는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우주는 자신의 균형을 파괴하는 인간이란 미생물을 박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겸허한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우주라는 유기체의 균형을 깬다면 이러한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솔직히 인간들은 우주라는 전체 유기체의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고 잘못된 짓을 너무나도 많이 하고 있다. 지나친 상업주의가 낳는 자원 고갈과 쓰레기 배출을 통한 환경파괴가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문명의 이기들이 인간의 편리만을 추구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문명으로 변이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 각종오염 등…… 인간이 지구에 미치고 있는 영향이 어쩌면 태양계, 더 나아가 우주 전체의 질서와 조화를 깨고 있다면 미생물인 인간은 박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주가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지겹게 반복하는 소리이지만 인간은 과학의 성과물에 얼마나 기고만장해 있는가. 마치 이 우주의 주인처럼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 우주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거만하고 기고만장한 태도는 가장 비인간적인 태도이다.


인간은 더 이상 만물의 영장이 아니다. 혁명적인 정의로 과거의 모든 잘못된 정의를 대체해야만 한다. 그리고 새로운 정의를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인간은 미생물이다(Homo microorganism).’ 그러나 인간이란 미생물이 우주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불리어 지기를 바라자.


이것이 인간을 정의하는 새로운 혁명적인 정의의 완결판이다: ‘인간은 미생물(Homo microorganism)이다. 스스로를 미생물이라 정의할 수 있는 미생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우주에 존재하는 아주 유익한 미생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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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8 12:33

[꽁트] 1더하기 1이 4가 되는 이유

 

1 더하기 1이 4가 될 수 있는 이유


K와 S는 연인 사이라고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알짜배기 연인 사이랄 순 없다. 여기서 알짜배기 연인 사이라 함은 흔히들 진실한 사랑, 즉 사랑의 힘을 삶의 중심에 놓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연인 사이를 말한다 할 수 있는데, 그들 사이가 알짜배기 연인 사이가 아니라 함은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연인 사이가 아니다란 말이 되겠다. 겉보기의 화려함과는 달리 그들의 속마음에는 진실한 사랑보다는 온갖 술수가 얼룩져 있으니 서로의 속마음을 모르는(모르는 체 하는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서로 속이고 속고 있는 셈이다.




명문대를 나와 동 대학원의 조교로 있는 K가 교수 자리와 함께 만만찮은 재력을 소유하기 위해 모교 원로교수이자 대학원장인 S교수의 둘째 딸이며 다른 명문대 출신으로 벤처 사업에 뛰어들어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은 여성 재력가인 S를 야심의 타깃으로 삼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교수라는 명예와 재력을 목표로 하고 있는 K에게 S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의 목표물이었던 것이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S의 외모와 몸매였는데, 깨놓고 말하자면 토할 것 같은 얼굴에 아줌마 수준의 몸매가 흠이라면 흠이었다. 


한편 S도 자신이 끝내지 못한 학업에 대한 욕구와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외모가 받쳐주는 장래의 남편을 통해 성취하고자 했다. S의 사정권에 들어 온 사내는 자신의 아버지인 S 교수를 통해 알게 된 학문적으로 촉망받고 외모가 수려한 K였다. K는 자신이 평소 이상형으로 생각해 오던 한 탤런트와 닮아 마음속에 점찍어 둔 인물이었다. 그런 차에 은근히 그녀에게 접근해 오는 K를 놓칠 수는 없었다. S는 교수직과 재력 만이라면 어떤 사내라도 휘어잡을 수 있는 자신이 있었다. 여자의 외모보다도 재력과 명예를 더 중요시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솔직히 얼굴이야 좀 뜯어고치면 되잖은가.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외모도 어느 정도 받쳐주고 실력도 있지만 재력과 집안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K라면 얼마든지 떡 주무르듯이 주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난하고 뼈대 없는 집안 콤플렉스는 재력과 명예가 약이지 않겠는가.


그들의 표면적 이해관계는 이렇게 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하지만 속마음은 너무나도 달라  대화는 언제나 표면 말과 심층 말로 나뉘어졌다. 다시 말해 표면 말이란 그들의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말로 그들의 표면적 의도에 충실한 감언(甘言)을 의미하며 심층 말이란 혀끝에서 말이 만들어 질 때마다 동시에 반발적으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말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이 만나면 두 사람이 아주 정적(靜的)으로, 아주 정상적으로, 아주 사랑하는 연인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아 보였지만 실상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면 아주 역동적으로 마치 네 사람이 앉아 대화, 아니 극단적인 인신공격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그들이 만남에 만남을 거듭하고 결국엔 결혼 약속을 하게 되는데 참 가관인 그들의 한 대화를 소개하면 1 더하기 1이 4가 되는 이유를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대화는 도심에 있는 인테리어가 최고급인 화려한 카페의 가장 전망 좋은 공간의 최고급 좌석에 앉아 칵테일을 주고받으며 나눈  것으로 S가 턱을 갸름하게 성형하고 만나 처음 나눈 대화이기도 했다.


S가 30분을 먼저와 앉아 있었고 K가 헐떡거리며 뒤늦게 자리에 앉았다. K가 숨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로 알려진 고대 이집트의 기록. 이곳에 세계 최초의 성형 수술 기록이 남아 있다.



“많이 기다렸지 차가 막혀서 말이야.”

[차는 무슨 차, 네 얼굴 보기 참 지겹다 지겨워. 꼴에 턱은 깎는다고......]


“쬐끔, 고작 30분.”

[뭐, 차가 막혀. 놀고 자빠졌네.]


“아니, 테이블에 웬 프렌치 키스. 오늘 분위기 좀 잡을려구?”

[꼴깝을 떠는 군. 우욱, 프렌치 키스! 생긴 대로 놀아라, 놀아.]


“내가 먼저 주문했어. 프렌치 키스, 전에도 마셨잖아. 바로 여기서 말야”

[너 참 많이 컸다. 프렌치 키스도 다 알고. 하기야 꼴에 교수지.]


“장인어른이 이번에 신경을 너무 많이 써셨어. 교수 사위 보려구 말야”

[교수자리는 기본 혼수 품목 중에 하나일 뿐이지. 희생정신으로 결혼해주는데 교수 자리는 기본이지, 기본. 암~~]


웨이터를 불러 프렌치 키스 한잔을 더 주문하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동안 두 사람의 심층 말들이 불을 뿜었다.


[교수가 된다고 뼈대 없는 가문에 뼈대가 생기냐? 쯧쯧, 좋아하긴.]

[저 얼굴만 보면 나의 희생정신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 턱을 깎아도 길긴 마찬가지군.]

[반반한 얼굴 때문에 용서해 준다. 하지만 너무 까불진 마!]

[헌데 저 비위 느글느글한 속을 알 수 없단 말야. 어떻게 저런 얼굴로 나를 넘볼 수 있을까. 하기야 내가 먼저 껄떡거리는 척을 했으니......낄낄. 일단은 명예와 재력이 문제지. 그 다음엔 권력......흐흐. 널리고 널린 게 여자고 말야. 사랑 타령은 당분간 중지.]

[개 뼈도 없는 게 주먹만한 야심은 있어 가지고. 네 속을 다 안다 알어. 돈과 명예가 아니더냐.]

[널린 게 여잔데 뭐]


다시 대화가 이어졌다.


“턱 수술이 잘 되었네. 몰라 보겠는 걸. 당신이 어떻게 하던 당신 모든 걸 사랑해.”

[턱 뼈 깎는 기계가 한심하다 한심해. 깎을게 없어서 뭐 저런 걸 다깎냐.]


“고마워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이해해 주시니 정말 고마워요.”

[너 보기 좋아라고 깎은 거 아니다. 오해하지 마라. 성형한 걸 모르는 인간들하고 재미를 봐야지 안 그래? 결혼이 내 삶의 무덤이 아니야.]


내가 타고난 재능인지 신기(神技)인지 인간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때론 슬프고 가슴 아프다. 그들의 대화를 여기에서 끊은 것은 부분의 소개에 있을 뿐 전부의 서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밀한 구석은 그냥 내버려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더하기 1이 4가 될 수 있는 이유를 이 정도만으로 짐작하기만 하면 되잖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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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사이트;http://blog.daum.net/psy10379/ (성형수술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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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5 19:33

[꽁트] 콘돔 논쟁



 

콘돔 논쟁


이 이야기를 하면 나 자신이 먼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놀이방 교사인 내가 아이들의 그 지루한 논쟁을 재미있게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하지만 너무나 진지한 아이들의 모습이라 교육적인 차원에서의 배려였다고 하면 지나친 나 자신에 대한 변명일까.


방의 한 쪽 구석에서, 명구 녀석이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내어,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은, 일상적인 아이들의 행동과는 다를 게 없었다. 헌데 녀석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좀 색다른 것이었다. 바로 콘돔이었던 것이다. 명구가 풍선처럼 입으로 불어댈 때 현경이가 끼어들었다.


“애두, 그건 풍선이 아니란 말야. 주사 모양으로 생겼잖아.”


명구가 부는 걸 그만두고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먼데 가시내야.”


현경이의 옆에 있던 지영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명구를 보았다.


“주사 모양이잖아. 그러니 주사 장갑이지 뭐긴 뭐야”


그리곤 지영이는 어떤 반박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숫제 결론을 내렸다.


“우리 아빠가 그러던데 주사는 깨끗해야 되기 때문에 장갑을 끼는 그래, 알겠니 이 바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한솔이가 맞받아 쳤다.


“바보는 바로 너야. 장갑은 사람 손가락에만 끼는 거야. 주사는 손가락이 아니잖아. 손가락에 끼는 장갑이야, 바보 멍청이”


지영이가 화난 표정이 되어 달려들었다.


“헌데, 손가락은 다섯 개 잖아.”


한솔이가 여유 있게 대답했다.


“가운데 손가락 있잖아. 제일 긴 손가락 말야. 그 손가락에 끼고 콧구멍을 팔 때 사용하는 거야, 멍청이.”


평소 관찰력이 뛰어난 한국계 미국인 2세인 캔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서툰 한국말로 끼어들었다.


“그건 고--추에 끼--우는 거야. 화--장--실 같은 데 가봐. 고--추가 그려져 있는 자--판--기를 보면 그게 그려져 있--단 말--야. 그러니 고--추에 끼--우--는 거야, 빨--간 고추에.”


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실용적인 가치에 마음이 쏠려있는 아이들에게 고추를 끼운다는 말은 허무맹랑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고추를 왜 쓸데없이 끼운단 말인가. 평소 캔디의 관찰력에 어느 정도 동조를 해주던 아이들조차도 고추라는 말은 영 터무니없었다. 그러니 아무도 캔디의 말에 동의해 주지 않았다. 아이들이 잠시 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평소 기발한 말을 자주 하는 명발이의 입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손가락에 끼우는 게 맞긴 맞아. 헌데 콧구멍이 아니라 다른 구멍에 사용하는 거야.”


명발이의 [다른 구멍론]은 녀석의 자신 있는 태도에 제법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서서히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듯이 명발이가 말을 이어갔다.


“이것 봐, 끝이 우리 엄마 젖을 닮았잖아. 젖이 아플 때나 갑자기 아기가 울 때  엄마가 가운데 손가락에 끼우고 젖처럼 아기 입 속에 넣는 거야. 틀림없어.”

   

명발이가 자신이 결론을 내린 듯 으쓱해하고 있을 때 지영이가 다시 반박을 했다.


“손가락에 끼우는 게 아니야. 봐, 이건 손가락 보다 더 크잖아.”


현경이가 지영이를 거들고 나섰다. 성대결의 양상을 띠는 듯 했다.


“그래, 손가락보다 크잖아. 손가락으로는 너무 헐렁할 거란 말야. 다른 걸 끼우는 게 분명해. 고추는 아니고......”


고추라고 하던 캔디가 지영이의 말을 거들었다.


“고추가......아니라면......아......마 쏘시지......일지......몰라. 먹다......남은 쏘시지......를 끼워......두는 건지......몰라.”


지영이의 말을 정점으로 아이들은 성대결의 양상을 띠면서 양쪽의 주장 중 어느 하나가 정답이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사내아이들은 손가락, 콧구멍, 젖, 입 같은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주장을 폈고 여자 아이들은 주사, 고추, 쏘시지 따위의 단어들을 주장의 밑받침으로 사용했다. 손가락, 콧구멍, 젖, 입 VS 주사, 고추, 쏘시지의 대결은 끝이 없이 펼쳐졌고 한쪽을 위해 다른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수그러들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그럴 경우 제 3자의 중재를 위한 개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적당한 타이밍이라고 할까, 내가 끼여들려고 할 때 돌발적인 사건이 터졌다. 오준이의 행패(?)가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끼여들 여지가 없는 논쟁에 괜한 질투의 심보가 발동한 것이리라. 자세히 말하자면 오준이는 오줌을 더러워 한다는 타인의 심리를 이용해서 자신이 싫어하는 일로 기분이 상할 때 옷을 훌렁 벗고 오줌을 쏘겠다는 협박이 아주 효과적이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있었다. 녀석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지만 오준이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자주 했다.      


“애들아, 뭐 그런 시시한 시합을 하니. 멀리 멀리 오줌을 쏘자”


아이들은 혼비백산해서 오준이를 피해 물러났고 그런 와중에 우연하게도 명구가 들고 있던 콘돔이 오준이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오준이가 그걸 들고 장난스럽게 자신의 고추에 씌우면서 말했다. 아이들의 모든 논의를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오줌 막을 라고 꼬치에 끼우는 건 아닐까. 여자 아이는 귀저기, 남자 아이는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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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4 00:06

[꽁트] 우주를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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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http://blog.daum.net/kkjw2010/13138414 



우주를 살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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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kkjw2010/13138414

신종 암은 100% 정복이 가능한가? 초기 신종 암의 경우 100% 치유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미 초기의 증세를 넘어서 버렸다. 현재로선 확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어렵다. 신종 암을 치유할 수 있는 물질이 어디엔가 존재는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는 못하고 있다. 분명 신은 신종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항체의 존재를 마련해 놓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종 암의 저항도 만만찮은 상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면역력을 높이고 있다. 신종 암은 고도로 지능화 되어서 파괴적인 속성을 숨기기 위해 아름다운 위장물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독버섯이 독성을 숨기기 위해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는 것과 같다. 온갖 고상함과 화려함으로 위장을 하고 있지만 신종 암의 결정적인 속성은 파괴임은 분명하다. 원래 아름다운 것과 독성을 감춘 아름다움은 분명 구별이 되어야 한다.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신종 암이 발생 반경을 넓히고 있다는 것이다. 신종 암의 발생 영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물체의 생존이 그 만큼 위협받을 가능성이 커다는 것이다. 신종 암은 새로운 영역을 발견하면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그곳의 원주민이 학살되고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은 것처럼 신종 암은 새로운 영역을 황폐시키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지금 효과적인 치유의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주의 균형은 깨어질 것이다. 미세한 피부층이기는 하나 그 곳의 여러 세포들에 신종 암이 지속적으로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세 가지 방법이 연구되고 있는데 1) 신종 암을 외부에서 붕괴시키거나, 2) 신종 암의 내부를 혼란시켜서 자멸케 하거나, 3) 신종 암의 발병 영역을 제한하고 격리시키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초-레이저 치유법(Ultra-Laser Therapy)이며 두 번째 방법은 신종 암세포 균형체계 교란술(Cancer Cell System Destruction: CCD)이다. 마지막으로 신종 암의 영역을 격리시키는 격리법(Isolation Method)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신종 암을 격리시키는 방법은 어려운 실정이다. 이미 전이와 발병의 케이스가 새로운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 레이저 치유법과 암세포 체계 교란술을 상황에 맞게 유효적절하게 사용해 근본적인 신종 암의 퇴치를 기대하는 것뿐이다.


특히 현재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치유방법은 신종 암 내부의 균형을 교란하여 신종 암을 자멸시키는 방법인데 이 방법은 실제로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다. 신종 암도 일종의 유기체로 생명을 유지하는 기관들(organs)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기관들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교란하여 파괴하는 것이다. 이것은 큐피드의 화살(Cupid's Arrow)로 명명되는 신종 암세포 균형체계 교란술(CCD)이다. 이 방법은 신종 암세포의 중추에 해당하는 백유기세포(White Organic Cell:WOC) 와 흑유기세포(Black Organic Cell:BOC) 간에 적대적 파괴 관계를 형성하고 미세하게 조정되어있는 줄기형(Branch-typed) 축 내부의 알파 황소립자(Alpha Yellow Subtle Particle:AYSP) 을 파괴하므로써 유기적 세포(Oraganic Cell)간에 균형을 깨어 궁극적으로 신종 암을 제거하는 최신의 치유법이다. 양 유기세포 간에 균형을 깨는 방식은 백유기세포(WOC)에 증오유발 호르몬(hatred-led hormone)을 주입하고 흑유기세포(BOC) 에 적대 유발호르몬(hostility-led hormone)을 투입해 증오와 적대를 유발하여 상호 파괴(mutual destruction)을 유도하는 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러한 상호 파괴의 정도를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 균형 축으로 작용하고 있는 알파 황소립자(AYSP)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재 호르몬 투입 이후 이 우주의 신종 암, 즉 인간에게는 증오와 적대감으로 상당한 교란이 일어나 자멸직전에 있다. 우려되는 것은 그 부작용에 의해 연쇄적으로 자연이 황페하게 되고 생태계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이다. 반드시 암적 존재인 인간을 지구로부터 도려내고 아름다운 지구는 살려야 한다. 지구가 죽으면 우주의 균형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생로병사에 의한 자연적인 소멸이 아닌 인간에 의한 지구의 멸망은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 우주의 유기체 속에서 암적 존재인 인간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 글은 본인의 글이 아님을 밝힌다. 인간의 우주를 향한 침략계획(일명 우주 탐사 계획)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우주 종합병원(Universe General Hospital)의 원장인 하머니 박사(Dr. Harmony)로부터 기고 받은 글을 전재한 것이다. 따라서 전문 의학용어, 기술용어에 대한 무단 도용이나 모방을 절대 금하며 그러한 행위에 따른 피해에 대해서는 일체 책임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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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3 19:50

인간, 그 슬픈 삐에로

 

인간, 그 슬픈 삐에로




찰리 체플린, 가장 삐에로 같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은 인간

히틀러, 삐에로 같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인간

노틀담의 꼽추,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은 인간


배용준,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외모로 가장 삐에로 같지 않은 인간

블로거, 가장 삐에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인간

by 컴속의 나



                                         사진출처:컴속의 나


인간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지구의 공전 궤도가 조금만 삐거덕해도 공멸(共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지구라는 둥근 공위에서 궤도의 줄을 타고 있는 슬픈 삐에로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삐에로 같은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인위적으로 지구의 공전을 줄타기에 비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상 인간은 삐에로와 같은 희․비극적 모습을 삶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삶 속에 죽음, 젊음 속에 늙음이 깃들어 있는 모순적인 사실, 삶의 조건인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여러 아이러니한 사실, 개인과 집단과의 끊임없는 삐걱거림, 현세와 내세에 대한 분열적인 고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의 극단적인 감정의 변주, 풍요와 빈곤이라는 현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줄타기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의 줄타기는 너무나도 오래 지속되고 있어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고 있다는 인식을 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나약하고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모습에 대해 언제나 겸손해야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리혀 오히려 위치를 망각하고 증오와 분노로 조화와 균형을 깨드리고 과신의 오만함에 빠져있다. 삐에로가 삐에로의 위치를 상실하고 전지전능한 초월자로 줄 아래를 향해 경멸적인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한 가엾은 삐에로. 신이 되어 버린 삐에로. 신을 죽여버린 삐에로.


삐에로가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삐에로라는 사실을 자꾸 잊어가는 현실을 인간은 자랑스럽게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곳곳에서 삐에로임을 주지시키는 경종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울려대기도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 예술, 문화의 영역에서 마초적인 삐에로의 심성을 부드러운 여성적 삐에로의 심성으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을 피눈물 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길 La Strada>의 길 위의 그 슬픈 삐에로의 모습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숭례문의 전소를 삐에로의 슬픈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삐에로가 삐에로의 처지를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대견스러운 일이지만 삐에로의 매력은 사실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는 그 애틋한 모습에 있다.



 아돌프 히틀러:스스로 신이 된 인간


그러나 인간들은 어렵게 줄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삐에로의 그 슬픔과 연민을 자아내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속마음 사이의 깊이 있는 역설을 잊고 있다. 서로의 비극을 헤아려주는 연민이나 동정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빠져 나와 이제는 그 마음속에 삐에로를 잊은 우주 만물의 영장이라는 위엄과 허세가 들어차 있다.


니체는 삐에로를 너무 오만하게 만든 상징적인 인간은 아닐까?

찰리 채플린은 삐에로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상징적인 인간은 아닐까?


인간이 비극적 존재이니 희극적 존재이니 하는 따위는 물론 인간 스스로의 주관적인 해석이겠지만 이 막막한 우주에서 그야말로 작디 작게 존재하는 지구라는 땅위에서 근원적인 고독을 되씹으며 버겁게 살아간다는 것이 그저 희극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더 크다. 그런데 작디 작은 존재이며 근원적으로 고독한 인간들이 얼마나 오만하고 잔인한지를 보라, 인간들이 숱하게 저질러온 전쟁들을 보라. 이 세계화의 시대, 이 실용주의의 시대에 아프리카 대륙의 구석에서 굶주림에 죽어 가는 아이들의 모습들을. 하찮은 인간들이 얼마나 다른 인간들을 멸시하고 하찮게 여겨왔는지를, 얼마나 비극에 비극을 더해 왔는지를. 삐에로의 위치를 망각한 인간들이 저지른 잔인한 행위들이다.


인간 스스로 삐에로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이 광활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전쟁과 기아에서 그 숱한 비극을 싹트게 하고 무관심해 왔겠는가. 인간이 스스로 초인으로 행세하고 스스로를 구원하는 메시아로 자처하곤 했고 종교의 힘을 빌려 오기도 했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의 고독과 비극성 때문이다. 줄 타는 슬픈 삐에로의 모습처럼 말이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면서 동시에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외친다는 것, 이 얼마나 용서받지 못할 인간의 부끄러움인가? 


인간의 본질적이고 실존적인 모습을 보고 싶다. 벌거벗은 삐에로의 모습을 보고 싶다. 오만하고 과시적인 삶의 방식을 초월해 있는 진정 삐에로, 그 슬픈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다. 이 광활한 우주를 인식하고 있는 인간만이 역설적으로 스스로의 초라함을 깨닫을 수 있기에 기댈 수 있는 곳은 오직 인간들 스스로라는 분명한 사실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간, 줄을 타고 있는 그 슬픈 삐에로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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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01 16:56

[꽁트] 변소 기행


 

변소기행(便所奇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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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한데 모여 있어야 돌아가는 이 세상에는 그와는 반대로 남자와 여자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하는 공간들이 있습니다. 바로 공중목욕탕과 화장실이 그러한 공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는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대체로 우리와 마찬가지라 봅니다. 이렇게 남녀를 구분하는 이유가 사회적인 금기로 관습화된 것은 나라마다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원천적으로 이성을 허용하지 않는 목욕탕과는 달리 사실 화장실은 목욕탕처럼 남녀 구분이 엄격하지는 않습니다. 너무 급한 경우에 여자가 남자 화장실로, 남자가 여자 화장실로 뛰어 들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남자가 여탕으로 뛰어들었다고 하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또한 화장실이 이성에 관한한 목욕탕에 비해 아주 너그럽다고 해도 상습적으로 남자가 여자 화장실을 들락거린다면 그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내가 있었습니다. 들락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 사내는 여자 화장실에 상주하면서 인기척이 끊어지는 새벽이나 늦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살짝 빠져나와 화장실 주위를 어슬렁거리고는 다시 여자 화장실로 살며시 들어갔습니다. 사내는 끼니도 대변기 위해서 소리 없이 해결했습니다. 끼니라고 해봤자 미숫가루 한 숟가락을 입으로 털어 넣고는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이 다였지만 말입니다. 화장실의 내벽은 온갖 음란한 낙서들과 그림들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습니다. 배설물의 냄새도 고약했습니다. 사내는 하루 종일 조용히 앉아 화장실의 벽면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움직임을 극도로 자제하고 정물처럼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간혹 몰려오는 낮잠을 깨우느라 대변기에 앉아 심호흡을 크게 하거나 사지를 뻗는 정도가 움직임의 전부였습니다. 밀폐된 공간을 좋아하는 인간 같았습니다. 어떻게 밀폐된 공간이 그 사내에겐 아주 평온하고 아늑한 공간이 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내의 생활공간이 마치 여자 화장실이 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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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image.yahoo.com/GALL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사내의 행동을 알게 된다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요? 비정상적이고 변태적이며 엽기적인 짓이라 경악할 것입니다. 사회의 일탈 행위로 격리되거나 수감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야말로 연구 대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사내가 그런 사실을 알 만큼 정상적이기에 아무에게도 띄지 않으려고 아주 은밀하게 화장실을 드나드는 것이겠지만 사실 그의 행동이 알려지고 공개가 되는 경우 사건의 심각성은 커지는 것입니다. 하이에나 같은 언론과 방송은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이 사내를 집중적으로 발가벗겨 놓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그 사내가 그러한 사실을 더 잘 알 것입니다. 그 사내는 사회 통념상 변태성욕자나 성도착자나, 파렴치범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고 여자 화장실에서 머무르는 고약한 짓을 하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런데 뜻하지 않게 그 사내의 기괴하고 엽기적인 행동의 이유가 드러났습니다. 그 사내의 친구들, 다시 말해 도반승 둘이 화장실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화장실 밖에서 둘 중 키 작은 스님 한 분이 이렇게 소리쳤던 것입니다.


“청송스님, 동안거의 처소(處所)치고는 퍽이나 황홀경(怳惚境)이요, 화계대택(花界大宅) 이외다! 참으로 감탄이 절로 나오는 구려! 오탁(汚濁)의 연(蓮)이요, 진세(塵世)에 열반(涅槃)이로군요! ”      


이제 사내라는 단어 대신에 스님이란 단어를 쓴다면 이러한 엽기적인 상황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스님이 동안거를 위해 여자 화장실을 선택했다면 이 사회의 인식은 어떠할까요? 비록 범부의 생각으로는 그 경지를 헤아릴 수는 없겠지요. 그랬던 것입니다. 동안거를 여자 화장실에서 끝마치며 그 사내, 아니 청솔 스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일갈(一喝)했습니다. 남녀분별 분별지생, 분별계교 변태자생(男女分別 分別智生, 分別計巧 變態者生). 남녀동인, 변소위인(男女同人, 便所爲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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