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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9 16:32

[꽁트] 장로님, 장로님, 우리 장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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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십자가 위의 예수와 성 요한, 그리고 두 마리아
설명 : 엘 그레코 작, (1588), 캔버스유화, 120 x 80cm, 아테네 국립미술관
성경 : 요한 복음서 19,25-26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사진 및 글 출처:http://kr.blog.yahoo.com/clara



장로님, 장로님, 우리 장로님!

K는 장로이다. K는 언제나 믿음을 굳건히 하고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회개를 위해 교회를 찾는다. 교회는 K에게 피난처와 같은 곳이다. 믿음보다는 회개와 구원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K에게 회개는 세속적인 타락을 위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존재할 것이다. 즉, K에게 신은 세속적인 타락을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굳건했던 신앙의 삶 뒤에 뜻하지 않게 덮친 범법의 길로 들어서면서 K에게 신은 회개를 통해 범법을 사면 받는 용서의 신으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회개 뒤에는 또 다른 범죄가 뒤따르고, 그렇게 K의 범죄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 것이다. K의 회개는 이번이 몇 번째인지 모른다. 범죄와 관련된 회개만도 십 수번이 넘는다.


그러나 K는 신도들 사이에서는 신앙심이 돈독한 신의 자녀고 종으로 통한다. 그들의 종교적인 판단으로 K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신을 배신하지 않았다. 세속적으로는 탕자였으나 신앙적으로는 항상 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약하디 약한 양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실한 믿음이 아니고는 그러한 신앙생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이 하찮은 인간들을 사도로 세웠던 것처럼, K를 강한 사도로 세우기 위한 시련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K의 간증은 이러한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다. 회개와 함께 간증도 늘어가지만 누구 한사람 그의 믿음을 의심치 않는다.


K의 범죄는 주로 파렴치범죄에 집중되었다(K의 범죄 행각에 대해서 밝히고 싶은 생각은 없다.) K의 범죄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단 한 번도 세속의 법에 의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K가 그만큼 교묘해서 인지 하느님의 숭고한 뜻이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K는 그 자신의 범죄에 대해 신의 연단이라 위안을 삼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이다. 세속적 범죄와 신의 뜻 사이에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뇌하여야 할 처지임에도 K는 설상가상으로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범죄가 필요하다는 아주 황당하고 기이한 생각해 도달한다. 즉, 회개하는 양들이 더 많아져야 교회의 십자가가 더 는다는 악마적인 믿음에 사로잡힌다. 회개하는 양들의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선 세속적 유혹이 더 강해야 한다는 궤변과 같다. 세속적인 유혹이 인간들의 영혼을 더 공허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 공허해진 인간들은 교회를 더 많이 찾게 될 것이고 더 강력해진 세속적 유혹은 교회 밖으로 인간들을 불러 낼 것이다. K는 신에게 이렇게 기도한다.


그러나 신도들은 K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 오로지 회개하고 구원을 간원하는 K의 겉모습에서 신성을 볼 뿐이다. 그들에게 K의 전도 능력과 간증의 기적이 넘쳐흘러 보인다. K는 요단강에서 예수에게 물로 세례를 한 선지자 요한의 재림이라고 믿을 정도이다. K는 언제나 도시를 관통하는 어느 큰 강의 주변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어깨띠를 두르고 강 주변 정화 활동과 선교 활동에 열성적이고, 가끔 K가 바지를 걷어 올리고 강으로 들어가 부유하는 쓰레기를 줍곤 하는 모습이 다소 과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선지자 세례 요한으로 비쳐진 탓이다. K가 요단강의 세례 요한에 비유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종교적인 맹목성에 가깝다.


K의 음흉한 심중의 바램 탓인지, 소소한 범죄를 포함해서 이단적이고 세속적인 타락에 영혼을 더럽히고 다시 교회로 달려가 회개하는 새롭게 형성된 기독교적인 메커니즘이 일반화되면서 교회의 십자가는 나날이 늘어만 간다. 동시에 그 늘어난 십자가들의 영험 탓인지 세속적인 타락과 그것을 부추기는 유혹은 더욱 광범위해지고 노골화되어 가긴 마찬가지다. 모텔의 찬란한 온천표시와 유흥가의 네온사인들도 늘어만 간다. 악의 골이 깊고 더욱 어두울 때 십자가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은 진실이 맞아 보인다. K의 생각대로 십자가의 수는 더 늘어나고 유혹은 더 커져가고 그 사이에서 인간들은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타락과 회개만이 존재하고 분노와 심판의 신은 사라진 듯 보인다. 용서의 신만이 그러한 인간들의 타락과 회개로 이어지는 쳇바퀴 타기를 박수치며 즐기고 있는 듯하다. 서커스를 관람하는 청중으로서의 신!


이 지점에서 K는 더욱 오만해진다. 늘어가는 십자가와 늘어가는 신도들을 보면서 K는 자신이 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착각한다. K는 신조차 세속적 타락에 빠졌다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아니 K는 육체의 각질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을 타살해 버리기 까지 한다. K의 육체의 속과 겉은 너무나도 다른 세계이다. K는 자신이 타살한 신을 짓밟고 신도들을 내려다본다.


K는 이제 요단강의 선지자 세례요한으로 형제자매들에게 평가받고, 신을 조롱하고 타살까지 하는 자칭 신을 초월한 세속적 신이라 생각하기에 이른 것이다. K는 타칭 세례요한의 재림이면서 자칭 신을 초월한 세속적 신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타칭과 자칭, 세례요한과 신을 초월한 세속적 신의 탄생이다. 타칭에 의해 불려지는 세례요한은 K의 허상에 속아버린 종교적 순수의 결정체이며, 자칭 세속적 신은 K의 거짓과 불손과 위선의 결과물이다. K의 변신은 참으로 극적이고 숨 막힐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K는 현실의 특정인이 아니며 단지 상상의 인물이다. 항상 그렇지만 어떤 종교에서나 그 종교를 이용하는 사악한 인물이 있을 수 있고, 그러한 인물을 상상적으로 묘사해 보았다. 즉, 기독교를 잘못 이용하는 인간에 대한 비판이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양해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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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15:53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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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의 체통(2)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은 군국주의에 대한 참회라고 강조한 글을 썼다. 이것은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이다. 그러나 영화를 지나간 과거의 틀로만 해석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처럼 사무라이에 대한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나라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화 자체를 통해 일차적으로 영화를 해석할 것이다. 그러다 해석의 방법을 다양화해가다보면 일본의 군국주의와 대면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영화외적인 상황을 영화 해석의 근거로 삼든, 영화 자체를 해석의 근거로 삼든 보는 이의 다양한 시각으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영화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혼돈에서 질서가 생겼듯이 한 편의 영화도 수많은 해석에 의해 의미들이 생산되는 것이다. 해석에 의해 의미가 명료해 질수도 있고 더욱 불명료해 질 수도 있다. 전문가들의 이론에 기반을 둔 난해하고 현학적인 영화 해석이 후자의 경우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다양한 여러 해석들, 심지어 난해하고 현학적인 해석조차 하나의 텍스트로 귀를 기울이는 개방된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어느 민족이고 타민족에게 너그럽지 않다는 것은 역사의 수많은 전쟁들과 분쟁들이 증명해 준다. 심지어 민족 간에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은 왜 같은 동족에게 칼을 들이대고 총부리를 겨냥하는가? 이 질문은 인류가 풀어야할 영원한 과제가 아닐까 한다.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도 결국은 권력을 위한 수단으로 정착한 것이다. 같은 동족에게 피를 요구하는 문화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가 오랜 전통이 된 것은 그 시대적인 상황을 배우지 않고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사무라이를 있게 한 시대적인 상황에 대해서 언급하기에는 지식이 너무 짧다. 따라서 영화에 나타난 사무라이와 사무라이의 생활, 그리고 일반적인 일본 문화에 대한 몇 가지 인상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의 문화로 사무라이 문화를 이해하게 될 때 <무사의 체통>은 좋은 자료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동시에 일본 문화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우선 <무사의 체통>을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대단히 절제 있고 금욕적임을 알 수 있다. 미무라가 먹는 음식이나 입는 옷, 행동과 말씨를 통해 사무라이의 생활이 금욕적임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미무라의 식사가 스님의 탁발을 연상시킬 정도다. 이러한 사무라이의 금욕주의는 가마쿠라 시대(1192~1333)의 금욕적인 군사규율과 무로마치(1336~1573) 시대에 불교의 영향을 받아 사무라이 문화로써 무사도의 경지로 정착되는데 <무사의 체통>은 그러한 사무라이의 무사도(武士道)를 잔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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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http://www.news365.com.cn/wxzt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가 그렇지만 사무라이의 위계질서와 규율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다. <바람의 검>에서 사무라이의 그러한 엄격한 규율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사무라이는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의 작은 실수도 할복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만회한다. 주군의 식재료로 싱싱하지 못한 붉은 골뱅이를  선택한 식재료 담당자가 할복하는 것이 그렇다. 결과적으로 붉은 골뱅이를 먹은 독미역사인 미무라 신노조가 맹인이 되고 사무라이로서 처참한 삶을 살아가는데 그러한 실의는 전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데서 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마다에게 복수를 불태우면서 비로소 사무라이로서 살아나는 듯하다. 맹인이지만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는 미무라의 모습에서 무사도를 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맹인 무사의 주제는 <자토이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또한 검도 도장에서 스승에게 가르침을 부탁하면서 스승과 나누는 대화에서 그리고 미무라가 되풀이 하는 과거 스승으로부터 들었던 말에서 무사도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알겠냐. 미무라. 목숨을 주고받는 진검승부는 도장에서의 검술과는 다르다. 상대는 무엇을 할지 몰라. 칼끝을 피하지 마라. …… 너는 죽을 각오가 되었고 상대는 사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 그것 밖에 없다. 네게 기예를 전수할 때 전해줬던 말이 있었다. 기억하느냐?”

“같이 죽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라. 승리는 그 가운데 있으니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산다.” 


그리고 시마다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독미역사의 권태로움에서 깨어난 무사도의 외침이며 무사의 체통과 명예를 지키려는 사무라이의 전의인 것이다.


미무라에게는 토쿠헤(사사노 타카시)이라는 몸종이 있다. 토쿠헤이(천민)의 존재는 사무라이의 신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7세기초부터 사무라이는 지방귀족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농부, 장인, 상인들을 지배하는 계급으로 급부상한다. 실제로 부유한 상인이나 장인들이 사무라이와 혈연으로 맺어져 권력적인 기반을 닦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무라이 계급도 일반사병과 가신(家臣), 제후(諸侯)그리고 쇼군(將軍)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으로 분화되어 있긴 하나, 아무튼 사무라이가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분명하다. <바람의 검>에서 몰락해가는 사무라이를 보게 되는데 사무라이의 몰락은 18세기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 이르러서이다.


미무라는 주군으로부터 봉록을 받는 무사로 주군의 식사에 든 독을 감별하는 독미역사이다. 그런 하위 사무라이가 몸종을 이끌고 있는 것은 사무라이의 계급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무사의 체통>에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절대적인 복종이 있다.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분명하다. 아내 카요(단 레이)는 미무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듯이 보일 정도이다. 위계질서하의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카요의 바짝 엎드린 인사법을 통해 볼 수 있는 복종적인 여자의 이미지를 현대 일본 여성의 이미지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사마다가 아내 카요를 성적으로 농락한 것은 맹인이 된 자신을 농락한 것과 같은 차원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여자의 부정이 남편의 체통과 명예와도 관련이 되어 칼로 체통을 회복하는 것이 사무라이의 보편적인 방법인 것에도 무사도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호기심을 자아내는 또 하나의 것은 신사에서 발견한 스님의 존재이다. 카요가 남편의 건강을 위해 신사에서 기도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스님이다. 신사와 절이 동일한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니면 신사와 절이 공존하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지만 토속적인 일본의 신앙과 외래 종교 불교가 만나 어떠한 형태의 종교를 만들어 내는지 호기심을 자아낸다.


지나쳐 버린 것들이 더 많을 것이다. 또한 이면의 의미를 통찰하기보다 표면의 인상만을 읽은 것이 안타깝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이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일본인과 일본 문화를 차근차근 알아보는 과정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일본 영화를 보는 감동과 함께 재미중에 하나가 아닐까 한다. (*)


(2008.2.27.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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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7 00:10

[일본영화] 무사의 체통



 

무사의 체통

-일본이 진정으로 무사의 체통을 찾는 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http://kr.blog.yahoo.com/iamjina2000/

인간에게는 자신의 성격을 규정하는 명칭이 주어진다. 출생에서부터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성별(여자, 남자)과 가문․신분(양반, 평민, 천민 등)에서부터 다소 변화와 상승이 가능한 학벌(명문대 여부)과 경제력․직업(부자, 빈자, 과장, 사장 등)에 이르기 까지 다양하다. 고정된 사회 계급(계층)이 사라졌다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차별적인 관습이 여전히 개인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보면 사회적인 계급(계층)이 당연시되던 시대에는 그 엄격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계급(계층)에 따라 사회적인 역할이 규정되어 있어 그 계급(계층)적인 틀을 깨기라도 하면 사회 질서의 파괴로 간주되었다. 계급(계층)이 사회의 질서고 사회적인 질서가 곧 계급(계층)이기 때문이었다. 서자인 길동이 적자가 될 수는 없었고 천민이 과거에 응시할 수도 없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도 가문의 의지를 거스른 결과였다.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남편과 함께 생매장 당하기도 한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가 잔존한다. 심지어 원시 사회에서도 제사장, 추장, 남자, 여자, 아이에 따라 사냥물의 부위가 다르게 지급되었다. 이러한 계급(계층) 사회는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의 삶을 규정하고 의식을 지배했다. 따라서 계급(계층) 사회는 차이를 무시하는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역사는 차이에 따라 차별하는 비인간적인 계급 사회를 벗어나 개인이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사무라이 영화와 마찬가지로 <무사의 체통> 또한 그 내용을 떠나서 일본 사회의 전통적인 계급(계층)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일본의 사회의 계급(계층)에서 사무라이가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임진왜란과 일제 시대로, 세계사적으로는 태평양 전쟁으로 어렵지 않게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그 성격이 얼마나 호전적인가는 사무라이를 반영하는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 범죄를 통해 이미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사무라이 영화를 보면서 그 잔인한 무력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당사국으로서 일본의 사무라이에 대한 특성이나 성격을 살펴보는 것은 이러한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우선, 대개의 사무라이 영화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는 정의롭다. 정의가 언제나 승리한다. 그러한 정의가 일본을 벗어나서는 왜 잔인한 악의로 돌변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크게 두 가지 이유일 텐데, 하나는 영화가 실제의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미화했거나, 다른 하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다.


첫째로, 만약 일본이 사무라이 영화를 통해 사무라이의 성격을 왜곡하고 나아가 미화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 군국주의의 과오에 대한 정당성과의 관계를 충분히 의심해 보아야 한다. 사무라이 영화의 폭력성은 결코 군국주의의 폭력성과 혼돈되거나 정당화 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존재할 수 있을까?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복수)이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서부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정의로운 폭력은 인간성을 좀 먹는 잘못 된 생산물(가치)이다. 영화 속의 허구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고작 정당방위 정도일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습은 정당방위조차도 아니었다.

  

둘째로, 일본의 경우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아마도 군국주의화된 사무라이의 가치보다도 어쩌면 타민족, 특히 한국인과 중국인에 대한 배타성이 일본 민족의 특이성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 일본 근대화 시절의 탈아입구의 가치나 아시아 민족에 대한 야만적인 인식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민족주의라는 인류 보편적인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군국주의의 유래 없는 잔인성이 인류 보편적인 특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만주에서 731부대의 생체실험이나 카미카제 특공대 그리고 북경 대학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인성은 인류의 특이성이지 보편성으로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러한 잔인성에서는 일본 민족만의 특이성이 존재하며 사무라이의 폭력성과도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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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kochinews.co.jp/cinema/06cinema35.htm

 


따라서 사무라이에 대해 일도양단이나 쾌도난마식의 명쾌하고 정의로운 측면만으로 무협의 재미와 복수와 정의의 감동만을 찾는다면 사무라이에 대한 미화에 전적으로 빠져드는 위험이 있다.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홋카이도의 아이누 족을 비롯해 재일 한민족에 대한 차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일본은 독일을 배워야 한다.


무사의 체통은 일본적인 인식이다. 무사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은 체통이나 명예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사무라이 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할복은 체통이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극단적인 표현이다. 물론 체통이나 명예라는 가치는 모든 인간들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이다.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체통과 명예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에게는 더욱 숭고한 가치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사로서의 체통, 아니 일본인으로서의 체통은 사실상 군국주의와 태평양전쟁으로 수치스럽게 상실했다. 체통뿐만이 아니라 인간성마저 상실해 버렸다. 아주 불의하고 잔인한 전쟁을 일으키고 인류에게 해악을 끼쳤다. 이제 일본인이 인류에게 체통을 지키는 것은 일본 민족에 한정된 배타적인 체통이 아니라 전 인류로 향하는 개방된 체통이다. 아직도 일본인의 체통을 잃고 있는 상황에서 <무사의 체통> 운운하는 영화를 버젓이 만든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슬픈 현실이랄 수도 있다. 일본은 역사적인 과오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고 참회하면서 잃어버린 무사의 체통을 회복하려고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 신조(기무라 타쿠야)는 사실상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인의 심정을 반영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즉 사실상 강간당한 아내로 인한 무사의 체통을 지키려는 미무라의 의지는 36년 동안 침탈당한 한국인의 의지와 동일하다면 동일할 수 있다.  


“시마다는 카요를 가로에게 조언해 준다고 거짓말 하고 불쌍하게도…… 카요에게 강간이나 다름없는 일을 당하게 했다. 내 속은 아직도 화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다.”


만약 야마도 요지 감독이 수치스럽게도 무사의 체통을 잃어버린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 영화 <무사의 체통>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8.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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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6 12:22

[꽁트] 잡글 인간




잡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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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별명은 잡글 인간이다. 그의 삶이 잡글처럼 잡스럽기만 해서 그가 쓰는 글도 장르불명의 잡글처럼 잡스럽기만 하기 때문이다. 이 별명은 다른 사람이 붙여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붙인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서다. 그에게 유감인 점은 자신이 꽁트라고 생각하는 글이 소설, 더 나아가 웅대한 서사소설로 확대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더 축소되어서  꽁트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잡글이나 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인식과 사고의 얄팍함에 대한 자조인 셈이다. 즉, 그에게 잡글 인간이란 말은 그렇게 잡글 밖에  쓸 수없는 운명과 동격인 것이다.


그의 삶이 잡글 처럼 잡스럽기만 하다는 말은 서사보다는 단편적인 에피소드, 아니 에피소드라 하기에도 좀스러운 짓들로 삶이 구성되어 있다는 것과 같다. 깊이가 없고 무게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기도 하다. 인과의 꼬리를 물고 무는 삶의 이야기, 즉 서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단편적인 파편들로 흩어진 삶이었다는 것이다. 항상 우연적인 삶에는 인과가 반드시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인과로 엮으려는 상상력을 발동해 보지만 잡글로 끝나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그는 결심을 했다. 잡글 인간을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편린들을 인과로만 연결시키지 말자. 삶에는 우연성이 인과의 고리를 맺은 필연성 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고. 특히 그의 삶을 언급하고자 한다면 우연을 개입시키지 않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삶을 되돌아보면 지나간 사건들이란 반드시 그러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필연으로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실 잘못되었다. 순전히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너무 관용적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사건과 사건, 인간과 인간을 인과로 맺어주는 어떤 실재란 존재 않지도(신의 부정은 아니다) 않고 따라서 동시에 필연 또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필연이란 이름을 고상하게 달고 있는 것들 ― 필연적인 만남이니 필연적인 사랑이니 필연의 인연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 ― 은 단지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필연처럼 보이는 것은 그저 일시적이거나 자의적인 해석의 결과일 뿐이다.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그는 비록 잡글이 될 망정 그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꽁트를 쓰기 시작했고 자신의 삶과 의식을 단편적으로 반영하는 꽁꽁트들과 꽁트들 간의 인위적인 연결 고리를 찾아 이어 꽁트를 다시 모방적으로 확대재생산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고 그저 그의 우연 한 토막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내 삶 전체가 그렇지만 그 날은 특히 잊을 수가 없어. 아침에 잠에서 깨었는데 말야, 낯선 장소가 아니겠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신 날에도 이런 일은 없었거든. 그런데 전날은 술도 마시지 않았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 침대에서 잠을 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거든. 그런데 낯선 곳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정말 기가 막혔어. 마법이나 꿈도 아닌데 말야.


놀란 중에서도 방안을 둘러보았지. 벽에 걸린 액자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난 기절을 할 뻔했어. 그 액자 속의 인물이 말야, 내가 쓴 꽁트 속의 인물과 똑 같지 않겠어. 뒤통수가 담겨있는 사진 액자였거든. 그래서 창가로 달려가 거리를 내다보니 사람들이 다 뒤로 걷고 있는 거야. 이게 바로 내 꽁트 <뒤로 걷는 사람들>의 세팅과 똑 같았어. 이제야 내가 쓰고 있는 꽁트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인간들은 엉덩이에 눈이 붙어 있다. 하의(下衣)는 언제나 큰 구멍이 두 개가 뚫어져 있다. 그 구멍으로 큰 두 눈이 깜빡거린다. 눈의 형태는 같지만 그 기능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눈알이 360도 회전이 가능하다. 바깥은 물론이고 몸의 내부도 볼 수 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 수 있다. 음식물이 식도를 따라 위로 내려와 위액과 뒤섞이고 다시 대장 소장을 통해 똥이 되는 과정을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눈이 엉덩이에 붙어있다 보니 입으로 음식을 먹고 똥을 눈다. 항문은 없다. 식도와 분뇨도가 입으로 통해서 입에서는 언제나 악취가 난다. 그들은 너무 익숙해져 악취라는 인식자체가 없다......<뒤로 걷는 사람들, P.1>


한 인간이 이런 세상에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육체가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비실용적으로 설계된 구조에 당황하지 않겠니. 아니 당황할 정도 그 이상이겠지.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지지 않겠니. 음식과 똥이 입으로만 들락거리는 것을 어떻게 참을 수가 있어. 음식물과 똥이 뒤섞이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물적인 구조는 그야말로 너무나 고역이고 최악이야. 상상만 해도 최악이야. 오직 꽁트 따위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다행스럽게도 거울을 보니 얼굴은 그대로였어.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어. 상상조차도 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현실적인 행동이 가능할 수 있겠니. 내가 쓴 꽁트 속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살이었어. 나를 너무 비관론자로 생각지는 말아. 자살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글의 감옥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가 말야.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겠니. 또한 이 지옥 같은 곳에서의 삶 자체가 죽음이 아니겠니. 너라도 나와 마찬가지 결론에 이르렀을 거야


나는 자살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어. 침대의 카버를 찢어 연결해 방 천장에 연결하고 침대에 앉아 마지막으로 가만히 생각해 보았지. 나의 행동이 너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에 말야. 이게 과연 나의 자유의지인가고 혼란스러워 진 것이지. 꽁트 속의 등장인물이 된 내가 스스로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고 말야. 이 꽁트를 쓴 작가로서, 아니 내가 쓴 꽁트의 등장인물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그런 고민으로 하고 있을 때 짜증스런 고함 소리와 함께 갑작스러운 충격이 뒤통수로 전해져 왔어.


“이런 글을 꽁트라고! 완전히 잡글이구만! 에이~~.


이어서 충격은 뒤통수를 거쳐 머리로 다음에는 어깨로 그리고 배로 점점 아래로 전해서 발가락에 이르러 멈추었어. 책이 덮이면서 나는 책 속에서 압사당하고 만 것이지. 자살만이 아니었어. 압사도 있었던 거지. 나는 한 편으로는 행복했어.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러나 나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지. 어떤 꽁트 작가도 자신이 쓴 꽁트 속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단 걸 말야. 독자가 꽁트가 아니라고 하면서 책을 덮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거든. 행복감이 사라지면서 슬픔이 몰려왔지. 그러나 또 한편으론 희망이 엿보였어. 우연이란 그 사실 때문이었지. 내가 이렇게 우연하게 압사당하리라고 어떻게 생각했겠어. 결국 꽁트는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란 놈이 쓰고 있었어.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 따위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일이 일어 날 수 있는가 말야. 이것에는 어떠한 필연성도 인과성도 이성이니 과학적인 합리성이니 객관성도 없어. 그래서 분명하게 한 마디 하고 싶은 건, 내 꽁트에서 깊이나 진지함 따위를 잊어 달라는 것이지. 형식 따위도 너무 따지지 말란 것이지. 우연이고 파편이고 그저 똥이나 누면서 시간이나 때울 수 있는 존재로 보아 달라는 것이지. 좀 더 친근한 존재였으면 더 좋고 말이야.


그는 그렇게 죽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못했다. 그는 행방불명되고 만 것이다. 이 처럼 그의 꽁트는 필연이나 인과와는 거리가 먼 우연에 불과한 파편일 뿐이었다. 심지어 그의 죽음조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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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4 00:09

[생각 돌아보기] 간판


 

간판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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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지나면서 간판을 보지 않는 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각 장애인들이면 모를까 멀쩡히 두 눈을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간판을 안 보려야 안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자체가 간판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과장일까? 심산유곡에 들어가도 간간히 볼 수 있는 것이 간판이다. 그러나 또 너무나 흔하기에 쉽게 지나치는 것이 간판이다.



간판들을 볼 때마다 우리사회가 얼마나 광고에 의존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나 치열한 경쟁사회인지 알 수 있다. 거의 엇비슷한 가게들이 엇비슷한 간판들을 내걸고  밀집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야 말로 치열한 경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거의 주택가와 상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간판이 널려있는 지경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인 모든 나라가 다 그럴 것이고 우리나라만이 예외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널려 있는 게 간판이니 말이다.



치열한 간판 경쟁은 낮보다 밤에 더 선명해진다. 특히 향락문화와 간판은 일종의 공생적인 관계로 어울려 더 휘황하고 찬란하다. 향락문화와 휘황한 간판은 은유의 관계로 까지 자리하고 있을 정도다. 화려한 네온 간판들은 어둠을 밝히며 온갖 인공적인 불빛들을 토해낸다. 불꽃놀이 보다 더 화려한데 역시 그 이면에는 이윤의 욕망을 위한 치열한 경쟁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치명적인 독이 있는 아름다운 버섯처럼 아름답게 피어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인간들의 유혹과 탐욕도 더 깊어진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렇게 날개 짓을 퍼덕거리는 것이다.


또한 간판하면 떠오르는 것이 출세지향적인 인식이다. 간판이 좋아야 한다는 말은 한 인간의 물질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이 또한 자본주의 경쟁의 단면이 언어에 까지 스며든 경우이다. 누구는 간판이 좋다는 표현은 경쟁에서 이겨 우월한 자리를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즉, 남들보다 좋은 간판을 가졌다는 것은 다소 거친 표현으로 돈을 잘 번다거나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좋은 간판이 양심적이고 순수하며 인간적인 내적 가치를 은은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직업과 재력 같은 외적 가치를 호사스럽게 나타내는 것으로 자리 잡았다. 간판이란 말이 예외 없이 인간들 자신조차도 물화시킨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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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3 18:25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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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3)

―마츠코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편지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스런 내 딸, 마츠코!

마츠코, 세상의 어느 아비도 자식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단다. 행복하기만을 바란단다. 세상 모든 부모의 심정이 그렇다. 자식의 불행을 지켜보아야 하는 그 사실 만큼 가슴 아프고 고통스런 일이 어디 또 있겠니.


그런데 마츠코, 난 널 지켜주지 못했구나. 불행하게 만들고 말았구나. 이 못난 아비로 인해 네가 불행해 지고 말았다니 나 자신이 용서되지가 않는구나. 이 아비의 부덕한 탓이다. 가슴이 찢어지도록 고통스런 일이다. 아비의 굳어버린 입장에서 새싹 같은 마츠코 너의 가슴에 피멍 맺히게 하고 말았구나. 그러나 믿어주렴. 처음부터 네 불행을 바란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이 아비의 가슴 깊숙이에 마츠코 너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네 동생은 병든 아이였다. 사랑과 관심이 특별히 필요한 아이였단다. 그러나 이 아비가 네 동생에게 보여준 사랑은 네게서 빼앗은 것은 결코 아니란다. 마츠코, 네 동생이 더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불쌍하고 가여웠기 때문이란다. 그 당시에 마츠코 네가 그렇게 생각했듯이, 결코 네 동생에 대한 편애는 아니었단다. 그러나 어린 네 마음에는 아비의 사랑이 그리웠고 외로움이 참기 어려웠겠지. 이 애비가 네 아픈 동생만 편애 한다는 오해는 어린 마츠코 너의 마음엔 지울 수 없는 상처였겠지. 이 애비가 네게 조금만이라도 더 따스하게 대했더라면 네 삶이 그토록 힘들게 되지는 않았겠지. 마츠코 네가 이 애비의 웃음을 얼마나 필요로 했는가를 진심으로 알았더라면 비극적인 오해는 생기지 않았겠지. 이 애비는 너의 그 깊은 슬픔을 안단다. 이 애비가 아픈 네 동생만큼이나 마츠코 너에게 사랑과 관심을 가졌다면 너의 삶은 얼마나 순탄했을까, 하고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온단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 대수롭지도 않는 일들이 당시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란 걸 모르는 바 아니다. 이 아비도 어린 날의 삶의 과정을 거쳐 왔으면서도 미처 네게만은 이해의 따스한 손길을 내보이지 못했으니 인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잊어버리는 동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구나. 어린 내게는 아비의 무관심이 절대적인 고통이란 걸 미처 깨닫지 조차 못했다. 이 아비가 살아 온 방식으로 마츠코 너의 삶을 속박하려 했구나. 나에게는 살아온 시간이 더 많았고 너에겐 살아 갈 시간이 더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 지나간 과거의 방식으로 너에게 부단하게 영향을 끼치려고 했구나. 결국 아비의 굳어버린 머리 탓이었단다. 용서해 주렴 마츠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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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직에서 해고된 것이 이 아비의 무관심과 관련이 되어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단다. 이 아비의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으면 이 아비를 웃기기 위해 익살스런 표정이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을까. 결국 그것은 이 아비의 굳어진 표정이 초래한 희극적인 동시에 비극적인 습관이라고 생각하니 아비의 무관심이 뼈에 사무치는 구나. 그 굳어진 익살스러운 표정이 네 학교에서의 사건을 더욱 악화시키고 마침내는 사표로 이어지는 불행과 그 이후의 비극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쉬움이 있다면, 마츠코야, 병들어 누워 있는 네 동생에 대해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마츠코, 네가 학교에 사표를 내고 동생을 저주하면서 목을 조르고 가출하는 행동도 충분히 이해를 한단다. 그러나 마츠코, 어린 시절의 너와는 달리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교사였던 너의 행동에 조금은 지나친 데가 있었다. 자기중심적이고 감정에 전적으로 지배받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너는 성인이 아니었니. 그런데 여전히 동생을 원망하며 동생의 목을 조르고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마츠코야, 네 삶이 너무 가엾고 가슴이 아파 이 아비가 뒤늦게 하는 넋두리라고 생각해라. 너를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인데 지나쳐 온 시간들을 아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마츠코, 이 세상 어느 누구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도 넌 내 자식이다. 마츠코, 네가 이 아비를 탓해도 언제까지나 넌 내 자식이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어린 자식일 뿐이다. 마츠코, 너에 대한 이 아비의 사랑이 너무 가슴 깊숙이에 있어 서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오해였던 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감정을 쉬 내보이지 않으려는 이 아비와 너무 깊어 보이지 않던 이 아비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마츠코 네가 서로 빗어놓은 어처구니없는 오해 말이다. 너무나도 긴 시간 후에 서로의 진실이 해후한다는 그 사실과, 그 오해와 해후 사이에 마츠코 네 비극적인 삶이 놓여 버렸다는 것이 너무나도 기가 막히고 가슴을 찢는 고통으로 다가오는 구나. 늦었지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네가 이제는 이 아비의 사랑을 이해하듯이 이 아비 또한 네 진실을 알고 있단다. 이 아비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세상에 보여주려 했던 네 진실을 말이다.


마츠코, 이 세상엔 별 만큼이나 많은 오해들이 존재한단다. 그러나 이 애비와 너의 오해만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오해들은 다 사라졌으면 좋겠구나. 마츠코 너로 인해 이 세상에 그런 오해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그런 작은 오해로 큰 불행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프기 때문이란다.  아주 작은 오해 하나가 마츠코 너의 삶을 휘감는 큰 불행과 비극을 낳았다는 데 이 애비는 너무나도 가슴 아프고 괴롭단다. 이제 긴 시간을 우회해서 우리의 오해도 풀렸지만 아직도 마츠코 네가 혐오스러운 존재라고 오해하고 그렇게 부르는 인간이 여전히 많은 듯하다. 작은 오해로 비롯된 네 삶을 빗대어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혐오스러운 마츠코라 불러도, 이제 더 이상 넌 결코 혐오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란다. 이 아비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내 자식이란다.


마츠코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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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22 18:12

[일본영화]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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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blog.yahoo.com/donjuan0203/1.html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世界の中心で, 愛をさけぶ


감독:유키사다 이사오

주연:오사와 다카오, 시바사키 코우, 나가사와 마사미



1.앞에 붙인 사족

인간에겐 특별한 발명품이 있습니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을 (일시적으로) 잡아두는 음성, 영상매체들이 그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이러한 매체의 발전은 기록의 발전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더 생생해지는 것입니다. 말에서 문자를 거쳐 음성 기록, 영상에 이르기 까지 생생해져가는 기록의 역사인 것입니다.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음악이 그렇고 영화가 그러하며 TV 프로그램들이 그러합니다. 인간들에겐 시간을 죽이거나 살리는 방식이 더욱 다양해진 셈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을 과거로 퇴색시켜버리는 시간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뉴스가 그렇습니다. 뉴스(News)는 새로운 것을 보는 듯하지만 사실은 과거의 지난 것(Olds)에 불과합니다. 사실 영상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들은 그 ‘시제’ 가 과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생방송이 그 예외에 속합니다). 그런데 뉴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아마도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의식을 깨우는 그 무엇‘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쳐 온 시간 속에는 놀랄만한 사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뉴스란 우리가 이런 놀라운 사건과 놀라운 감정이 함께 공존하게 합니다. 한 개인에게 있어 이러한 뉴스들은 단순한 기억보다는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을 때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음성, 영상매체들은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듯 합니다. 과거를 다시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해주니까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기술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기술이 긍정적이지 만은 않아 보입니다. 음성이나 영상으로 시간 한계의 폭을 넓혀주기는 했지만 사실 좀더 생생해진 과거에도 불구하고 돌아갈 수 없다는 그 애틋함은 더 커지는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음성이나 영상은 사진 몇 장으로 빠져드는 과거로의 추억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과거 그 자체에 빠져드는 감정’을 유발할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한 인간을 방에 가두어 두고 죽은 자들의 소리들과 영상들만을 들려주고 보여준다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이러한 상상은 여러모로 의문이나 의미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음성이나 영상은 시간으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유사 과거로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려는 인간의 강렬한 욕구를 다소 완화시켜줄 것인가? 아니면 더 큰 절망에 도달하게 할 것인가? 한 국가로 확대해 보아서 독일을 예를들어 생각해 본다면, 한 국가로서 독일이 히틀러나 유대인 학살에 집착만 한다면 독일 국민들의 정신 건강에 유익할 것인가? 유대인 학살에 관한한 ‘과거의 현재 진행형’이란 역사적 조명이나 성찰은 간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쳐도 좋지는 않게 여겨집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인 것입니다. 현재를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으로도 국가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적 조명이나 성찰은 학문으로 법으로 연구해서 그것의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실제로는 유대인들만이 아니고 동성연애자나 살인자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이나 폴포트의 학살들은 영상에 의한 전형적인 뉴스의 모습입니다. 혹 알렉산더 대왕이 히틀러 만큼이나 잔인하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징기스칸이나 네로 황제는 어떻습니까? 어쩌면 더 야만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기록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알렉산더 대왕, 징기스칸, 네로 황제의 이름만 남은 건 왜 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뉴스화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등을 뼈에 사무칠 정도로 ‘현재 진행형화’ 할 수 있는 것은 영상 매체의 덕입니다. 인간은 영상 매체가 도달하는 범위내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아주 객관적인 듯 합니다. 하지만 영상 매체가 닿지 않는 범위내의 사건들에 대해서는 주관적이고 혼란스럽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영상매체의 한계로 의도적인 조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기억에 의존하는 것과 영상으로 남겨진 것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을까요? 정말 기억해 두어야만 할 것들만이 영상에 남겨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저 선택된 것일까요? 평가하는 시점에서는 그 중요성이나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생생한 영상이 오히려 사건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주관적이고 편협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 개인에게 있어서’ 차라리 기억들에 의존하는 것이 좀더 공정하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억 속에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이 좀 더 중요하고 의미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솔직히 공정한 게임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공정하게 보인다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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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화 속으로

이 영화에서는 카셋 테이프 하나가 중요한 모티브가 됩니다. 이 테이프 하나가 구성과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씨에 비유하면 될 것입니다. 테이프는 과거를 반추케 하고 기억을 떠오르게 하니까 말입니까. 남자 주인공 사쿠(오사와 다카오)와 리츠코(시바사키 코우)는 애인 사이입니다. 이사를 가기 위해 짐을 사던 리츠코는 작은 분홍빛 스웨터에서 오래 된 카셋 테이프(1986.10.28)을 발견합니다. 이것은 단절하지 못한 그녀의 과거의 상처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테이프는 리츠코가 병원에서 언니로 알게 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아키(나가사와 마사미)[고교시절 사쿠의 여자친구]로부터 사쿠에게 전해주라고 부탁받고 학교 신발장에 테이프를 넣으러 가다 교통사고로 전해주지 못한 아키의 마지막 테이프였기 때문입니다. 리츠코는 이 테이프 때문에 부채감속에서 살아온 여자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듣고 있는 과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과거를 ‘재생‘ 하는 것입니다. 리츠코는 태풍 29호가 몰아치는 밤 ’재생‘의 배경이 되는 시코쿠로 떠납니다. 사쿠는 이사를 가는 리츠코를 도와주려고 리츠코의 집에 들었으나 리츠코는 이미 떠나고 없습니다. 사쿠는 리츠코의 행방을 찾다가 친구 류가 일하는 카페에서 태풍 속보를 내보내는 텔레비전 뉴스 속에서 리츠코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순간 타카마츠 공항과 태풍 29호는 사쿠에게 아키와의 추억으로 맹렬하게 빠져들게 합니다. 테이프가 리츠코를 시코쿠로 떠나게 했다면 텔레비전 태풍 속보는 사쿠를 시코쿠(과거)로 떠나게 합니다. 여기서 음성과 영상 매체가 두 남녀 주인공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후로는 사쿠와 아키의 ’뉴스’가 인상적으로 재생됩니다만 그들의 순수한 사랑이 아키의 백혈병과 죽음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는 슬픈 러브 스토리의 전형을 되풀이 합니다.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흔한 도식에 약간은 식상합니다만 젊은 날을 지탱하는 아기자기한 장식들과 슬픔의 감정은 영화를 의미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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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금속 이물질 ’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것을 좀 더 긍정적으로 좋게 말한다면 ‘창조적 모방‘ 이라거나 ‘창조적 시도’ 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저에겐 왠지 불필요한 것의 개입이 두드러져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가 남녀간의 고전적인 러브 스토리에  카세트의 녹음기술을 덧칠을 해놓은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들의 기억에 근거한 회상들이 카세트(워크맨)에 의해 대체되고 매개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조용히 눈을 감고 회상하는 모습과 함께 과거의 추억들이 플래쉬 백 되는 것이 일반적인 영화의 양식인 것입니다. 서로 카셋 테이프를 녹음해 주고 받는 것도 그다지 자연스럽지도 않습니다(물론 영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만들고 있지만.) 만약 이 영화에서 몇 몇 장면들을 제외하고는 굳이 카세트가 없더라도 기억에 근거한 회상으로도 얼마든지 스토리를 전개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매개도 대체로 기억이나 일기장, 그림, 음악, 사진 등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의 감독은 과거를 좀 더 생생하게 현재와 공존시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이프속의 생생한 목소리가 좀 더 실감나는 감정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흐릿한 기억이 아니라 좀 더 현대적이고 좀 더 분명한 기억의 근거를 제공해주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 사쿠가 워크맨 헤드폰을 끼고 자신의 고향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재생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사랑이란 서정적 감정에 금속 이물질이 끼어든 것처럼 어색해 보였습니다. 물론 저만의 느낌이겠지요. ‘금속 이물질‘을 창조적인 작업인지 불필요한 덧칠인지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겠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여러분의 판단과는 별개로 앞서도 말했지만 전통적인 러브 스토리에 금속 이물질이 끼었다고 했지만 ‘이러한 시도들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볼 필요는 있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영화 <연애사진>은 ‘금속 이물질’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진기나 워크맨이나 달리 볼 필요는 없을 듯도 합니다. ‘운영의 묘‘ 를 효과적으로 적용한다면 충분히 극복될 문제가 아닌가도 생각됩니다. 시대는 변하고 있고 영화도 진화해야 되니까 말입니까? <연애사진>이 카메라와 사진에 중심을 두고 있다면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카세트 녹음기(워크맨)에 중심을 두고 있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영화감독 간에 교류가 있다면 이러한 흡사한 모티브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교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발명한 이러한 기계들을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인간들의 욕망입니다. 타임머신을 타던 영상을 보던 그 도구 외적인 의미의 공간에서 그 욕망은 크게 두 가지로 향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현실 도피적인 욕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치유의 욕망입니다. 이 영화에서는 치유의욕망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쿠가 찾아가는 과거라는 시간. 리츠코가 찾아가는 과거라는 시간. 그들은 과거라는 시간과 다시 ‘대화’ 를 하고자 합니다. 대화라는 말은 카셋 테이프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과거라는 시간 속에서 그들이 지키지 못했던 약속을 다시 지키기 위해 과거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러한 치유의 욕망은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만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하기에 미래 지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미래 지향적인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냉정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깊은 감정에 빠져 워크맨 헤드폰을 쓰고 여기저기를 휘젖고(?) 다니는 사쿠와는 달리 <우평사진관> 주인 시게 아저씨의 존재는 우리가 우리의 과거(시간)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있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시게 아저씨의 가슴에는 젊은 날의 부글부글 끓는 열정이 사라지고 원숙한 냉정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진관의 존재가 마치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시간을 잡아두는 사진관이지만 초월적인 시간의 존재를 관조하는 장소이기에 그렇습니다(종교적인 의미로 확대해도 될 것입니다.) 비록 시간을 사진 몇 장으로 잡아둘 수는 있겠지만 시간을 거스러지는 못하는 인간의 종속적 위치에 대해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냉정한 관조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시게 아저씨의 모습은 조금 차갑고 쌀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감독이 우리가 닮아가야 할 어떤 상징으로 제시했다면 이 시게 아저씨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져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제 백혈병으로 죽은 아키와 관련해서 잠시 언급하고 이 영화에 대한 감평을 끝맺기로 하겠습니다. 아키는 다재다능한 소녀입니다. 그녀에게는 소중한 꿈이 있습니다. 사쿠와의 순수한 사랑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사춘기 시절의 순수한 사랑의 감정은 절대적인 감정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들이 갖는 애틋한 감정을 유발시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불치병에 걸려 그 대상 중에 하나가 죽는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청소년기에는 자기 확장의 욕구가 큽니다. 자기 현실을 벗어나 꿈이나 이상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도 바로 자기 확장의 욕구가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키와 사쿠가 배를 타고 ‘꿈의 섬‘ 으로 가는 것이나, 그곳에서 발견한 카메라에 찍힌 호주 우룰루(호주 원주민들의 말로, 세상의 중심이란 뜻)의 사진을 보며 꼭 가보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기 확장의 욕구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렇게 자신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시기에 백혈병이 아키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백혈병으로 인해 이러한 자기 확장의 욕구가 꽉 막힌 아키의 존재입니다. 살아야 할 시간이 까마득한데 벌써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녀의 대사에 그러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호주로 가기 위해 시게 아저씨의 사진관에서 죽음을 앞둔 아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전 잊혀지는 게 두려워요. 지금의 저를 사진에 담아주세요. 사진은 영원히 남잖아요.” 그리하여 사쿠와 아키는 결혼 사진을 찍습니다. 사쿠가 언제나 가슴 아파하는 것은 아키와 마지막 꿈인 호주 우룰루에 가지 못한 것입니다. 태풍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시코쿠에서 리츠코와 만난 사쿠는 아키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우룰루로 떠납니다. 비록 차가 고장나 우룰루에는 오르지 못하지만(실제 우룰루로 설정하기에는 그곳이 너무 높았던 것 같음) 근처 둔덕에서 아키의 유골을 뿌려줍니다. 그들과 함께 아키의 영혼도 자유로워 집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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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7 21:58

[꽁트] 아픈 사랑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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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youkan.egloos.com/i13

아픈 사랑의 노래

아름다웠다, 그 노래는. 박자나 음정 따위 가식적 장식에 불과할 뿐, 투박하고 거친 그 음악은 정녕 아름다웠다. 귀로 듣는 노래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야 하는 노래, 그랬다. 그랬기에 그 노래는 정녕 아름다웠다. 그 노래를 그토록 애잔하게 부른 그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나는 그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잔인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그 날은 비극적이면서 동시에 희극적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떠났고 나는 그녀와의 관계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는 막 비행기를 탔다고 휴대폰에 메일을 남겼다. 퇴근 후 나는 그녀에게 나오라고 한 카페의 화장실에서 똥을 누면서 그녀가 남긴 메일을 읽고 말았으니, 운치 없고 분위기를 모르는 휴대폰이었다. 남녀 사이에 흔히 벌어지는 결말의 한 방식일 뿐이었지만 나는 가슴속에 마침표를 찍고 나서도 몇 방울의 눈물을 더 떨어뜨려야만 했다. 나는 치질이 심했고 그 통증은 참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치질의 쓰라림. 그녀와 나란히 앉아 어렵게 영화를 보던 시간들, 나의 속사정도 모르고 똥 침을 놓던 그녀의 천진난만함, 공원 벤치에서 그녀가 내 허벅지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세며 꿈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 기나긴 시간들, 돼지고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날이면 몰래 화장실에서 여성용 생리대를 차야만 했던 기억들...... 이렇게 그녀는 깊은 고통의 흔적을 남기고 떠났던 것이다. 변기 속을 내려다보니 붉은 핏물이 포도주처럼 진하디 진했다. 악화 일로를 걷는 치질! 나는 물 내림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꾹 눌렀다. 


내가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9시. 나는 카페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술을 한 잔 하려다 그만두었다. 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비극적 사실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사랑하는 그녀는 떠났고 나는 밤새 술이라도 들이키며 슬픔을 달래는 작별의 의식을 거행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적인 생각으로 나 자신을 설득했다. 치질 따위 생각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일 업무관련 보고가 있으면 어때......하면서도 내 이성은 현실을 직시하라고 나를 유혹했던 것이다. 나는 힘없이 아파트 입구 계단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갔다. 입구 왼쪽에 있는 경비실 창으로 창백하게 굳어있는 초로의 경비원 김씨 아저씨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연배의 여인이 앉아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고 그들을 지나치면서 그들에게 서려있는 이상한 슬픔의 기운을 감지했다. 김씨 아저씨도 치질일까?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 10층 버튼을 부드럽게 눌렀다. 버튼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는 신경질을 꾹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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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www.flickr.com/photos/micti2007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거실 카펫 위에 대자로 엎드렸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덩어리가 밀려왔다. 잊으려 잊으려해도, 후끈거리는 치질 덩어리가 느껴졌다. 아침에 차고는 시간이 없어 갈지 못한 축축해진 생리대가 불결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아, 이런 상태 위에 더해진 처절한 사랑의 비극이라니! 이런 고통 위에 그녀와의 작별의 슬픔이라니! 그녀는 이런 착잡한 나의 심정을 알기라도 할까!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가 남긴 메시지는 얼마나 건조했던가, 철없었던가! “나를 치질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그냥 니 머리 속에서 지워버려. 아니, 잘라버려. 나 보다 좋은 여자 만나.” 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고통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며 카펫 위로 떨어졌다. 그 순간 거실 벽면에 부착된 인터폰으로 혀가 꼬부라진 김씨 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실수로 인터폰의 전원이 켜진 것 같았다. 김씨 아저씨는 그 사실을 모른 채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끝내 당신은 떠나는구나! 나이 들어 혼자서 살고 싶다고 하더니...... 자식들 다 컸겠다, 임자도 이제 자유를 누려야지, 암. 나 같은 사람 만나 고생만 실컷 하고는......젊어선 술에 절여 사는 남편한테, 늙어선 애먹이는 자식들 때문에 호의호식 한 번 못해보고......딱(탁자 위에 병 같은 것이 부딪치는 소리.) 카~~. 아이구, 처량하구만. 그래, 뭐 혼자 이렇게 살다 가는 거지 뭐! 두마안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엣사아공~~"


나는 아저씨의 노랫가락이 정말 좋았지만 아파트 입주자들은 황당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김씨 아저씨의 황당한 행동에 짜증을 내었을 것이다(구체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본다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상상력을 발동해 보고 싶지만 치질의 고통이 워낙 깊어 그만두련다.) 사람들은 이별의 슬픔을 이겨내려는 아저씨의 모습, 그 모습을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이 후로 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첨언: 나는 그날로부터 3일 뒤에 있었던 반상회에서 아저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비난과 질책과 황당함과 짜증과 욕설과 매도가 반응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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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6 13:47

[꽁트] 거시기를 위하여


거시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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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년(某年) 모월의 어느 여름 전국을 강타한 태풍이 지나가자 그 작은 마을의 주민들이 서서히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주민이라고 해봤자 고작 200명 안팎이지만 놀랍게도 그들 모두는 졸부들이었다. 최근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세계 최대의 금광 때문이었다. 가난한 산촌 마을에 내려진 횡재라면 횡재였다. 자신들의 땅과 집 밑에서 금 덩어리가 솟아져 나와 적게는 수억에서 수 십억이 굴러들어 왔으니 갑작스러운 돈벼락이었다.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는 다소 이상스런 표현은 순박하던 촌사람들이 처음에는 그 돈벼락에 어리둥절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개의 졸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행태들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는 의미이다. 그들의 돈을 유혹하는 온갖 검은 마수들이 달려들면서 마을은 과거의 순수하고 순박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온갖 잡스럽고 불미스러운 일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의, 식, 주와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문제에서부터 도시적인 치정(癡情)문제는 물론 일상의 작은 꼴깝과 지랄과 발광에 이르기까지 밑바닥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 마을 사람들 중에 우리의 ‘껄떡’ 씨와 ‘딸꾹’ 씨도 당연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졸부가 되기 이전부터 껄떡씨와 딸꾹씨는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는 단짝이었다. 마을에서 유일하게 바람난 마누라들이 야반도주한 동병(同病)의 아픔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그들 마누라들에 대한 넋두리와 취기가 오른 그들이 자주 내뱉던 한탄조의 말들을 종합해 볼 때 문제는 바람난 여편네들 보다 그들에게 있었다. 흐느적거리는 버들가지처럼 죽도 못 쑤는 물건이 문제였던 것이다. 마을 주민들이 부르는 ‘껄뚝‘과 ’딸꾹‘ 이란 그들의 별칭만 보더라도 그저 질질 침이나 흘리는 ’껄뚝’에 놀란 ‘딸꾹’ 질이 전부이니 각자에게 붙여진 별칭으로 제격이었다. 그 좋은 이름 두고 동네 꼬마 녀석들까지 ‘껄떡’이니 ‘딸꾹’이니 불러댈 뿐 아니라 무자식에다 여편네들까지 도주한 그들이고 보면 ‘거시기’ 에 맺힌 한은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졸부가 된 그들이 총을 갈고 닦고 기름칠하는 데 헌신하리라는 것을 모두들 쉬 추측할 수 있으리라. 그야말로 ‘껄떡’ 과 ‘딸꾹’ 의 사슬을 끊는 것이야말로 지상과 지하, 이 우주의 과제였다. 미확인이지만 그들이 제일 먼저 어슬렁거린 위인들이지 싶다. 그들은 산천 초목 누비며 구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으리라는 신념으로 사생결단 전국과 세계(?)를 누비며 돌아다녔다. 동남아의 대부분 국가들, 유럽, 일본 미국, 캐나다등 손가락으로 셀 수 없이 많았다. 자신들의 폐물(廢物)을 보물(寶物)로 바꾸어 놓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의 결실이었든지 그들의 폐물(廢物)이 아직 보물(寶物)은 아니었지만 물건다운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했고 몇 달 간격으로 싸구려 물건은 거들떠 볼 것 같지 않게 생긴 호색한 여자들과 재혼까지 한 것이다. 그러자 제법 남자 흉내를 내는 그들에게 마을 사람들은 격상된 별칭을 달아주었는데 껄떡씨는 헐떡씨로 딸꾹씨는 빨딱씨로 불리여졌다. 그들은 주로 토속적으로 보다는 고상한 모던풍으로 ‘허니 헐떡’ 과 ‘미스터 빨딱’ 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달라진 마을의 공기 탓이었다. 모텔, 카페와 단란주점들이 들어서면서 토속적인 분위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세련된 도시풍이 만연한 탓이었다. 아무튼 그들의 별칭은 용맹스런 군인들에게 주어지는 무공 훈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타고난 재능은 아니었지만 후천적으로 총을 갈고 닦아 전투에서 전과를 올리는 그들이 어찌 무공의 전사가 아니겠는가.



그들에게 아프리카 바람이 분 건 [단란주점 쿨]의 미스 강 때문이었다. 자칭 서울의 명문대학교를 나왔다는 미스 강은 여느 아가씨들과는 달리 뭇사내들이 쉽게 범접하기 어려운 어떤 기운을 뿜어내었다. 그 기운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어쩌면 학력이 변변치 않는 마을 사람들이 갖는 고학력에 대한 위축과 함께 날카롭게 쏘아대는 요염함이 그 정체이리라. 이 남자 저 남자들이 쉬 꺽을 수 있는 노류장화가 아니라 춘향이처럼 절개있는 행실도 또한 그 정체의 일부가 아닐까 싶다. 그런 미스 강이 첩첩한 산중의 마을 구석에 들어 온 것이 순전히 돈 때문이 아니라고 하니 또 희안한 일이 아닌가.


“금광 졸부촌이라구요? 한 밑천 잡은 졸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구요? 내가 그런 썩어 빠질 금광과 졸부 때문에 이 구석으로 찾아든 것 같아 보여요. 천만예요. 내게도 꿈이 있다구요, 왜 이래요.” 


어느 술자리에서 했다는 말인데 졸부보다는 그녀 자신의 꿈을 쫓는 태도에 모두들 숙연해지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허나 그런 미스 강을 달갑지 않게 보는 사내들이 있는 건 당연했다.


“제깟게 무신 고상은 고상이여. 꼴깝이제. 술 팔고 웃음 팔먼서 뭔 절개는 지켜댄다꼬 생 날리여 날리는. 지가 이 산골 금광촌에 기어들어왔으믄 뻔한기지 안그려. 한 밑천 잡을라 카는기 아이고 뭐란 말이여. 여시야 여시. 무신 꼼수가 있을끼여. 고년 조심해야 되겠어.”



특히 아낙들이 더 그랬다. 고상하다 고상하다 추켜세우는 사내들의 말을 들으면서 아낙들의 오해와 경계는 더 두터워져만 갔던 것이다.


“미시 강 고년 고거 사내들을 그리도 잘 홀린다면시”

“고 잡년이 사내들을 다 잡아묵을라 카나”

“고년 고거 고단수여.” 


자칭 고고하길 바랬던 미스 강의 뜻과는 달리 그녀는 아래녁 장수의 나락에 떨어졌고 유언 무언의 압력이 미스 강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여편네들의 입방아질에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사내는 아무도 없었고 어쩔 수 없이 미스 강을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악사천리라고 작은 마을의 소문은 절구방아 찧듯이 하루가 멀다하고 찧어대어졌기에 미스 강이 버텨내기란 어려웠고 급기야 마을을 떠나야만 하는 비운까지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소문에 우리의 헐떡씨와 빨딱씨는 감회가 남달랐다. 평소 미스 강과 술친구가 되다 시피한 그들인지라 그녀의 떠남이 못내 아쉬웠던 것이다. 자신들을 등지고 짝짝이 야반 도주한 과거의 아내들과는 달리, 그리고 현재 재혼한 색골의 여편네들과는 달리 미스 강은 색다른 여자였던 것이다. 솔직히 미스 강 앞에서는 과거의 그 기막힌 ‘껄떡’ 과 ‘딸꾹’ 으로 돌아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지만 그녀와의 격의 없는 분위기의 대화만은 언제나 좋았던 것이다. 그들이 재무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대화에서 기인한 바 컸다면 컸던 것이다. 미스 강의 고언(?)이 한 몫을 했다면 했고.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 세상 근심 걱정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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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기에 그녀가 떠나기 얼마 전 허니 헐떡와 미스터 빨딱씨가 미스 강과 술판을 벌린 것은 당연했다.  이별을 위한 밤이었기에 마시고 또 마셨고 붓고 또 부었다. 그들 셋은 취해 떠들고 노래했다. 횡설수설, 뒤죽박죽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미스 강에게도 쉬 보이지 않던 취기가 엿보이기 시작했다.



“여편네들이 문제예요. 남편 간수, 남편 간수, 하는데, 사내들이 밖으로 도는 것은 여편네들 탓이에요. 그걸 제대로 못하면서 사내들만 타박하는 거라구요. 사내들도 마찬가지구요. 집안에서 죽여줘야 불만이 없고 밖에서도 자유로울 수가 있는거라구요. 말만 그럴싸하고 떠들썩한 남정네들은 무게중심이 없어 가벼운 거예요.”


헐떡씨가 꼬부라진 혀로 입을 열었다.


“고거는 말이제, 우리가 오래 전에 깨달은 것이라카이. 사내 구실 고거 중요한 것이제. 고런데 말이데이, 미시 강. 인자 미시 강이 떠나뿌먼 우리는 마 어짜노. 미시 강 설움은 누구 보다도 잘 알제. 미시 강도 알겠지만서도 이 촌구석에 있는 인간들은 다 엿놈, 엿년들인기라. 우리 거시기 문제를 저것들 문제 맨치로 개지랄 병들을 다 안틀었나 마. 미시 강도 마 들어서 쪼금 알끼다.”


빨딱씨가 맞장구를 쳤다.


“이 촌구석은 마 빨리 떠뿌는기 좋타카이. 시발 우리가 빙신 개나발 소리들으면서 얼매나 생똥을 쌌는데. 시원컸다, 미시 강. 암. 시원쿠 말구로.” 


취기가 올라 발그스름해진 미스 강의 얼굴에 근심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흐느낌도 함께했다.


“이제 아프리카로 돌아갈 거예요.”


예기치 않게 느닷없는 흐느낌과 함께 흘러나온 미스 강의 말이었기에 헐떡씨와 빨딱씨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흐느낌으로 보아 이곳에서의 수모에 대한 울분의 표현인 듯도 했지만 아프리카란 말에는 영 감(感)이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두 사람의 혀 끝에서 아프리카란 말이 계속 맴돌기만 했다.


“아프리카에 제 남편과 아이들이 있거든요. 제가 버리고 온 남편과 자식들이 말이에요.”


헐떡씨가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기 무신 말이고, 미시 강. 아쁘리까라이?”

미스 강이 수건으로 눈을 훔치며 나즈막히 말을 이어나갔다.


“저 명문 대학 나왔다는 거 거짓말이에요. 이 바닥에서 저를 지키는 것은 고고한 척 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거예요. 처음에 이 촌구석에 들어올 때는 흙과 함께 살다 죽으려고 들어왔었어요. 헌데 어찌 이 단란주점으로 빠지게 된거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자꾸만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고통스러웠어요. 자꾸만 마음이 약해졌죠. 그래서 돈도 벌어야 했던 거죠. 하지만 두 사장님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이곳에서 깨끗하게 돈을 벌었어요. 졸부들이 우글거리는 이곳에서, 마음만 먹으면 한 밑천 잡을 수 있는 이곳에서, 전 정말이지 깨끗해지고 싶었어요. 그것이 아프리카에 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한 저의 떳떳함이라 생각했던 거죠. 그들과 함께 돈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죠.”


빨딱씨가 호기심을 빨딱하고 일으켰다.


“그라믄 아쁘리까로 이민을 간기가, 미시 강.”


미스 강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흑인과 결혼을 했어요. 공장에서 일하다 만난 흑인이었는데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죠. 솔직히 그때 저는 미국을 동경하고 있었거든요. 공순이 소리를 들으며 희망없이 살 바에야 국제 결혼이라도 해서 미국에서 살고 싶었어요. 참 그땐 허영이 심했죠. 그 흑인과 동거를 시작했고 자식들을 줄줄이 낳기 시작했어요. 5남매를 낳았어요. 1년에 한 명 꼴로 낳아대었죠. 전 솔직히 자식들을 인질로 삼을 셈이었어요. 그래도 지 자식들인데 도망이야 가겠나 하고 말이죠. 정말이지 도망가지 않았어요. 그리고 절 끔찍이도 사랑해 주었어요. 자식들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일이 터지고 말았어요. 미국 흑인이 아니라 아프리카 흑인이었던 거예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는 건 말짱 거짓말이었고 그저 불법 입국자였던 것이었죠. 경찰에 체포되어 강제 송환된다니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더군요. 하지만 자식들이 문제였어요. 흑인은 내게 빌며 매달렸고 아이들은 엄마라고 울어대고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우리 정부에 선처를 호소하고자 했지만 그다지 내키지가 않았죠. 아이들에 대한 편견과 생활이 염려가 되었죠. 함께 아프리카의 고국에서 새로운 가정을 꾸미기로 결심을 했던 거예요. 그 때처럼 모진 각오를 했던 적도 없을 겁니다. 남편도 남편이지만 자식들에 대한 책임을 끝끝내 지울 수가 없었던 거죠. 어디 아프리카의 생활이 호락호락하겠습니까. 내 한 몸 던져 자식들 만이라도  살리리라 각오를 했던 것이죠.”


빨딱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양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쁘리까에서 그런 각오가 싹 오그라들던 가배, 미시 강. 그래서 아쁘리까를 떠났나?”              

미스 강이 또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에요. 분노 때문이었어요. 아프리카에 마누라들이 셋 이나 더 있지 뭐예요. 그기다 아이들은 스물명이나 더 되었어요. 그것도 손바닥만한 집에서 바글바글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꼭 개집 같았어요. 어떻게 제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할 수 있었겠어요. 솔직히 저 일주일만에 야반도주했어요. 일부다처제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생활을 접하게 되니 분위기가 너무나 싫었어요. 분노도 함께 치밀었고요. 왜 흑인 남편은 한국까지 와서 일부다처제 속으로 저를 끌어들였는지 꾀심 했어요. 너무 타문화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주의라고 생각했죠. 성적으로도 인정하기 어려웠어요. 아마 그래서 아프리카에는 에이즈가 만연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타고도 후회는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얼마동안 생활하면서 아이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어요. 미칠 것 같더군요. 이곳으로 찾아들은 것은 바로 그런 그리움을 잊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흙에 묻혀 과거를 다 잊고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안되더라구요. 이곳에서 술동무가 되어 돈도 꽤 벌었으니 이제 아프리카로 가서 모든 것 사죄하고 함께 살아 갈려는 거예요. 이제 아프리카가 왜 등장했는지 아시겠죠.”


참으로 헌신적인 한국의 여인상이랄까. 논픽션에서도 가능한 이야기일까? 미스 강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참으로 어리석으리 만치 희생적인 사랑이요 모성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의 헐떡씨와 빨딱씨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고 미스 강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명 취기 탓이었다. 솔직히 헐떡씨와 빨딱씨는 너무 취해있었다.  

미스 강의 심기를 괴롭힌 건 빨딱씨의 이런 말 때문이었다.


“미시 강, 그 흑인 말이제~ 어짜믄 그리도 셀수가 있노, 응.”


헐떡씨는 한 수를 더 떴다.


“깜디들이 마 거시기 하나는 끝내준다 아이가. 마, 미시 강도 정신 차리래이. 거시기 하나로 인생을 다 살아가는 기 아인기라. 딸꾹~~ ”


미스 강의 얼굴에 분노랄까, 동정이랄까, 한심하다는 걸까 뭐 그런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미스 강의 목소리에 약간의 콧바람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과 자연산 아르마딜로의 날개와 캥거루의 거시기가 등장 한 건 바로 그때쯤이었다.


“사장님들, 요새 힘이나 제대로 쓰시고 계세요? 집안에서 사모님들이 편안해야 벌려 놓은 사업들이 잘 돌아가는 거예요. 아르마딜로 날개나 캥거루 거시기 한 번 잡숴 보세요. 제 흑인 남편도 그걸 많이도 먹었대요...”


헐떡씨가 헐떡거리며 말허리를 잘랐다.


“뭐, 아리마...골로...뭐 그 날개 하고 캥가리 거시기라! 미스 강, 거기 증말이가. 거기 진짜 죽이주나 응?”

    

“아니 아르마 골로가 아니라 딜로에요. 그럼요. 자연산 아르마딜로 날개와 캥거루 거시기는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대인기래요. 비아그라보다도 약효가 더 끝내준대요. 최근에 미국에서 임상 실험이 다 끝났다는 군요.”


빨딱씨가 괴성을 내질렀다. 


“뭐라, 그 머시기...비아그라보다도! 히안하대이(신기하네)!”


미스 강의 눈가에 어떤 서글픔의 감정이 맺혀있는 듯 했다.


“사장님들도 이 번에 저와 함께 아프리카 가요. 좋은 물건 제가 가감 없이 소개해 줄테니.”


빨딱씨가 무엇이 그리 신이 났는지 맥주 잔에 작은 양주잔을 힘있게 처넣으며 말했다.


“그렇제,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이고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도 아쁘리까는 생각도 안해봣째. 마, 이번 기회에 미시 강하고 아쁘리까에 함 가볼까. 가마이(가만히)생각해봐도 아프리카 거가 시커머이 힘 쓸만한 기들은 다 모이가 안있겠나. 맛다 맛다.”


미스 강이 맛장구를 쳤다. 단단히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조금 있어 보세요. 우리 나라에 아르마딜로 날개하고 캥거루 거시기 소문이 쫙 퍼질 거예요. 값 뛰기 전에 아프리카 관광도 하고 보조식도 한 번 잡숴보세요. 저도 덕 좀 보게요, 호호”



다음 날 미스 강이 흘린 그 정보에 대해 헐떡씨와 빨딱씨는 진지한 논의 끝에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


‘밑지봐야. 본전 아이가. 그라고 미시 강이 이때까정 좋은 거는 많이도 소개 안해줏나. 아르마딜로 날개하고 캥거루 거시기도 함 무보자(먹어보자). 이 참에 마 안 가본 아프리카 관광도 하고 다른 건강보조식도 묵어보먼 안되겠나. 그라고 보이 아프리카 하이 힘있게 느끼지네 시꺼머이 마. 껌디들이 죽이 주는 거는, 마, 다 이유가 있다 아이가. 둘 만이 가는기다. 아무도 모리게 말이다. 미스 강은 아쁘리카에서 합류하고 말이제.’


그리고 사흘 뒤 그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르마딜로 날개와 캥거루 거시기를 상상하며 아프리카로 떠났다. 명분은 아프리카 기아체험으로 말이다.(*)


그림출처:세계일보&세계닷컴(www.segye.com)
사진출처:www.delarg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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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3 15:04

[꽁트]청국장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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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국장

 

청국장의 맛


이 간단한 진리를 부모들은 왜 이다지도 모르는지 몰라. 식빵에 이렇게 치즈와 햄을 놓고 다시 식빵 한 조각을 올려먹는 것이, 포크로 돌돌 말아 쪽쪽 빨아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를 말야. 악취(?)가 나지도 않고 얼마나 좋아. 그리고 먹으면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설거지 따위의 노동이 필요 없어 시간을 유용할 수 있고 말야.


그런데도 우리나라 음식의 위대성만을 주입하려는 그 얼빠진 부모들이, 아니 모든 한국인들이 난 정말이지 싫어. 아주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음식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지고 케케묵은 것인지 몰라.


밥과 국그릇을 비롯해서 그 많은 반찬그릇들이 얼마나 공간적, 시간적으로 비효율적인가 말이야. 자원의 낭비는 물론이고, 이동성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부수적으로 따르는 노동의 양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말야. 제사를 예로 떠올려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이동성이라는 말을 하면 혹 김밥이 우리나라 음식이라고 주장하는 얼빠진 인간들은 없겠지. 이왕 김밥이란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인데 스시도 얼마나 좋으냐 말야. 이 세계화의 시대에, 일분 일초도 아까운 이 속도의 시대에 밥과 국, 반찬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그 정신 사나운 장면을 상상해봐. 갓 쓰고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것 같지 않니.


이렇게 본다면 또한 우리나라 음식문화는 야만의 상징이 아닐 수 없어. 허위의식과 권위주의는 물론이고 자원낭비와 환경파괴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음식문화는 종적으로 횡적으로 많은 부작용만을 잉태하고 있으니 말야.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런 음식 문화 하나만 봐도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다른 문화들이 갖는 성격들을 고스란히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니. [빨리 빨리 문화]가 그런 것 아니겠어. 그 많은 밥과 국과 반찬에 여유롭게 반응할 수 있겠니. 빨리 빨리 먹어야 모든 반찬을 한 번씩이라도 먹을 수가 있지 않겠니. 귀신은 뭐하고 있는지 몰라. 이런 음식 문화를 개혁하지 않고 말야. 무슨 무슨 개혁들이다 말들이 많은데 도대체 왜 우리나라 음식문화 개혁은 안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난 밥이 정말 싫어. 국이 정말 싫어. 김치가 무지하게 싫어. 청국장이나 된장찌개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난단 말야. 한국 사람인 나에게도 구역질이 날 정돈데 뭐 김치가 세계인들의 음식이 되고 있다고 떠드니, 나 원 참. 김치에 들어있는 젓갈의 효능과 발효를 과학이란 이름을 빌려 두리 뭉실하게 신비화시키기 전에 좀 더 냉정하게 김치의 실용성과 김치에 대한 세계인의 의식을 알아 볼 수는 없을까.


아직도 지동설처럼 대한민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으려는 한심한 인간들이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라니. 가관인 것은 한국 사람은 김치 아니면 못산다는 그 얼토당토않은 세뇌공작이지. 민족의 동질감이니 공동체 의식이니 하며 음식부터 내세우는데 정말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어. 내 부모들이 매일 똑같은 밥에 국과 반찬을 식탁에 올려놓는 것은 이런 세뇌의 결과인지도 모르지.


도대체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밥과 김치가 주식이 되어야만 하고 국이 약방의 감초처럼 따라다녀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어. 다른 것들은 다 바뀌는데 왜 이 식탁 위의 음식들만은 바뀌지 않는지 말야. 정보의 시대에 인터넷이 가정에 속속 들어와 앉아있는 이 마당에 패스트푸드나 일식이나 양식으로 식사를 할 법도 하잖아.


세계화의 시대에, 개방의 시대에 식탁에 수저 대신에 나이프와 포크를 올려놓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구. 부모들은 언제나 밥과 김치와 된장찌개를 왜 주식으로만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단 말야. 난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아.


특히 아빠가 즐겨먹는 청국장과 젓갈이 식탁에 오르기라도 하면 구역질을 참지 못해 화장실로 뛰어가기가 일쑤였지. 언젠가는 엄마가 임신으로 오해한 적이 있었지 뭐야. 구역질을 하며 뛰쳐나가는 나를 보고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 한참을 화장실에서 토하고 나서도 여전히 콤콤하고 썩은 듯한 냄새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지.


그날 난 엄마에게 모진 취조(?)를 당해야만 했어. 요즘 신세대론을 쉴 새 없이 내뱉어대지 뭐야. 하지만 그런 잔소리는 청국장 냄새보다는 쉽게 참을 만 했어. 나는 엄마의 잔소리가 끝나자 청국장 때문에 구역질을 했다고 말했지. 나의 그런 말에 엄마는 의심을 쉬 뿌리치지는 못했지만 임신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안도하는 듯 했어. 하지만 청국장 때문에 구역질을 한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지.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마 대한민국의 청국장 옹호론자들은 내게 벼락이라도 내리고 싶겠지. 엄마도 예외는 아니었던 거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는 막무가내로 나를 나무라기만 하셨어.


“망할 년, 넌 한국 사람이 아니냐?”


그런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나의 식성은 조금도 고려하지도 않고 청국장이다 젓갈이다 된장 등을 식탁에 꾸준하게 올려댄 건 두말할 나위가 없어.


한참 사춘기의 예민함으로 고민하는 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어. 물론 엄마는 간혹 샐러드나 햄, 샌드위치나 포크커틀릿을 해주시기도 했지만 영 엉성하기만 했지. 샐러드 옆에 된장찌개가 놓이고 샌드위치와 함께 김치를 올려놓고 포크커틀릿에 미역국을 함께 먹어야했으니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었겠니.


난 집에서 밥을 먹을 때면 언제나 다이어트를 핑계로 양을 줄이곤 했는데 이유는 바로 우리의 위대한(?) 주식 때문이었다는 걸 눈치는 챌 수 있겠지. 내가 제일 행복할 때는 말야,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햄버거나 닭고기를 먹으며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것이지. 물론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먹는 다거나, 아니면 스시에 샤브샤브를 먹거나 이탈리안 식당에서 스파게티나 피자를 먹는 것은 더 행복한 일이지만 흔치 않은 일이라 안타까울 뿐이지. 마치 탈옥한 죄수가 세상의 공기를 호흡하듯이 말야.


난 이런 음식들을 진정으로 사랑해. 찌꺼기가 남아도니, 아니면 밥그릇이다 국그릇이다 반찬그릇이다 하며 그 많은 그릇들이 필요하니. 그러니 설거지가 없어 물이 절약되고 환경에 해로움을 덜 미치지 않니. 이렇게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음식 문화를 난 진심으로 사랑해. 패스트푸드라고 하며 아주 눈을 깔고 대하는 우리나라 음식 옹호 골수분자들은 도대체 이러한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건지 말야. 그저 콜레스테롤 타령이나 하면서 비만이다 고혈압이다 위협과 협박을 해대기만 하고 말야. 무식해도 너무 무식하단 생각이 들어.


대한민국이란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이고 그 한국 사람은 한국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나와 있는 법이니. 물론 외식집들이 번창하고 있긴 하지만 가정에서의 한국 음식 집착은 여전하기만 하지. 한국 음식만을 고집하는 고리타분한 부모들의 혓바닥하고는......


어쩌면 난 대한민국이란 땅을 떠날지도 몰라. 그 지긋지긋한 음식문화 때문에 말야. 난 정말이지 청국장 냄새나 된장 냄새, 젓갈 냄새나 김치냄새 따위와는 함께 살수가 없어. 한국 사람 운운하며 동일한 미각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넓게는 대한민국이, 좁게는 부모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니 솔직히 말하면 증오스럽기까지 해.


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음식들과 음식문화를 나 하나 저항한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일이고 보면 개인적인 선택으로 한국 음식을 피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것이 나의 한계이며 우리 10대들의 한계가 아니겠니.


내가 집을 뛰쳐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 가출이 유일한 대안이었어. 내가 이 나라를 떠나려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지. 난 한계를 뛰어넘고 싶었어. 진정으로 말야. 난 패스트푸드를 위해 내 가족을 버렸어.


남들은 내 가출의 이유를 이성문제다 학업문제다 연예인 문제다 뭐 그런 것 따위에 초점을 맞추나 본데 결코 그런 것 때문은 아니었어. 지긋지긋한 밥과 김치와 청국장과 된장과 젓갈 때문이었지. 무엇보다도 청국장이 결정적인 음식이었어. 가출을 하던 날도 말야, 그 역겨운 청국장 냄새를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거든.


이제 그런 지옥으로부터 도피를 했으니 내 마음대로 음식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어 너무나도 행복해. 다시 말하건대 가출 이후에는 이 나라를 미련 없이 떠날 거야. 청국장과 된장과 김치가 없는 세계로 말이야.  


이랬던 그녀였다. 패스트푸드의 나라 미국으로 이민 후 청국장과 김치와 고추장과 젓갈이 먹고 싶어 거의 미쳐버린 그녀는 한국 음식 예찬론자가 되어 한국으로의 역이민을 다시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다음 기회에 그녀의 한국 음식 예찬론을 들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사진 출처:http://kr.blog.yahoo.com/qkrgudwns011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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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10 14:32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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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

영화가 끝날 무렵 조카인 쇼는 마츠코를 신이라 부른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종교적일 정도로 희생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은 ‘성스러운’ 마츠코가 아니라 ‘혐오스런’ 마츠코이다.

그녀가 혐오스럽다는 단서는 강가의 낡은 아파트에서 한 마리 더러운 벌레처럼 살아가는 모습이다. 그곳에서 마츠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먹고 마시고” 하면서 “화장도 치장하는 것도 청소도 하지 않고 숨 쉬는 것도 귀찮아져 이대로 죽는구나” 할 정도로 삶을 포기한 상태이다. 마츠코는 그녀의 인생 속으로 더 이상 아무도 허락하지 않는다.

마츠코에 대한 혐오의 시선은 마츠코의 방 옆에 살고 있는 전위적인 메탈 밴드의 멤버인 듯한 오쿠라 슈지의 것이 대표적이다. 오쿠라 슈지는 마츠코에 대해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라고 말하면서 그녀에게 혐오라는 딱지를 붙인다. 이 혐오라는 단어, 즉 오쿠라 슈지의 시선이 현재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시선은 기성 질서의 가치관이 그것이다. 여기서 잠깐 언급하자면 이러한 기성 가치관을 대표하는 존재가 항상 흑백사진처럼 존재하는 마츠코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마츠코의 동화적인 세계와 접촉하는 유일한 방식은 고작 미소를 띠는 정도에 불과하다. 마츠코의 남동생, 즉 쇼의 아버지 또한 아버지의 흑백사진 속에 머무는 존재이다.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유골함을 들고 2년 만에 쇼와 재회한 날 무덤덤하게 마츠코에 대해 이야기 한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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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코를 보는 이러한 두 시선은 동일하다. 방향은 다르지만 오쿠라 슈지나 마츠코의 남동생은 마츠코의 인생에 찍힌 혐오스런 타인들의 지문을 읽지 못하는 피상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마츠코의 일생에 담겨진 ‘혐오’ 의 정체를 마츠코에게만 조준해 버린 것이다. 마츠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왜 고통스럽게 살아왔는가? 하는 이해는 전무한 것이다. 


“사회의 법칙도 이웃에 대한 예의도 다 무시했지.” 이 오쿠라 슈지의 말은 오히려 ‘사회의 법칙조차 이해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예의를 상실한 무지한 표현’ 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오쿠라 슈지가 보는 마츠코의 ‘현재’ 의 모습은 ‘혐오스럽겠지만’ 쇼처럼 마츠코의 일생에 대해 진지한 의문이나 물음 같은 것을 던지지는 않은 것이다. 만약 오쿠라 슈지가 예술(음악)을 한다면 그가 음악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는지 의심스러워 지는 것이다. 단지 다자이 오사무의 환생이라는 야메카와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마츠코를 ‘혐오’의 낙인을 찍은 오쿠라 슈지는 타인의 전생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인간으로 낙인찍혀 마땅한 것이다.

글의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지만, 오쿠라 슈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색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오쿠라 슈지의 외모와 행동은 참 재미있고 웃음도 자아내고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오쿠라 슈지가 말한 ‘혐오’ 라는 단어가 마츠코를 수식하는 단어가 된다는 것은 현대의 대중문화의 속성을 말해준다고 하면 과장일까? 그 자신 혐오스런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의 법칙이나 예의라는 말을 언급하며 마츠코가 혐오스럽다고 하는 태도는 대중문화의 건전성에 대한 긍정적인 변호로 읽혀짐과 동시에 대중문화의 깊이 없는 피상적인 모습으로도 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봐도 시시한 인생이었어.” 마츠코의 동생, 즉 쇼의 아버지는 가출한 마츠코와 간간히 접촉하면서도 마츠코의 일생을 결국 이해하지 못하고 “시시한 인생” 이라고 못 박아 버린다. 이렇게 죽은 후에도 마츠코는 이해받지 못하고 남동생에게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처형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남동생의 오해는 현재의 마츠코의 모습만을 피상적으로 본 오쿠라 슈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세계와 가치관(기성의 가치관)으로만 마츠코를 본 결과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본 결과라는 면에서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의 삶이 마츠코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동화와는 거리가 먼 가부장적 남성의 질서에서 마츠코를 보았을 때 마츠코의 일생은 시시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남동생의 시선 또한 진지하기는 하나 전통과 기성의 가치관에 집착하는 불완전한 시선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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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소 감상적이긴 하지만 쇼의 시선이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선으로 등장한다. 쇼는 마츠코 고모의 일생을 결코 혐오스럽다거나 시시한 일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신과 같은 존재’ 로 보는 것이다. 혐오와 시시함으로 못 박힌 고모 마츠코의 일생에서 그 오해의 못들을 빼버리는 것이다. 마츠코의 일생에서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오쿠라 슈지와 아버지의 시선은 쇼의 진지하고 성찰하는 시선으로 대체된다. 쇼는 ‘혐오스러움’ 의 이면을 관찰하고 그곳에서 마츠코의 신성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 때  삶의 공허함에 빠져 음악, 술, 섹스로, 마침내는 자살로 현실을 탈출하고자한 쇼가 마츠코의 일생을 통해 인간과 대중문화(음악, 술, 섹스)의 공허한 속성을 성찰하고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추락하던 젊음의 자기 비상을  같은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전통과 기성의 가치(속마음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 깊은 사랑)를 통해, 이러한 자기 비상이 현실을 저버린 이상만으로는 성취 할 수 없는 세계라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쇼의 갑작스런 진지함과 성숙함은 바로 이러한 생각의 균형에서 싹튼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약간이나마 억지스럽게 <마츠코의 혐오스런 일생>에 대한 오해를 푼 듯하다. 어쩌면 죄책감을 드러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혐오스러운 세상을 위해 혐오스러움을 뒤집어쓴 한 여자의 일생을 위해서……(*)    

이미지 출처:http://www.koreafilm.co.kr/movie/today_movi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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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6 14:16

[일본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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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인간의 삶이란 한 편의 서사(긴 이야기)와도 같다. 그러나 의도한데로 구성하고 전개할 수 없는 서사이다. 동화적인 상상과 환상으로 서사를 이끌어 갈 수도 없다. 언제나 폭죽을 터트리고 꽃이 만발하고 음악으로 가득 찬 동화의 세상으로 바꾸어 놓을 수도 없다. 이 세상 어느 인간도 작가가 소설을 쓰듯이 자신의 삶을 의도대로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겨우 불확실한 미래를 추측가능하게 하려고 노력하거나 지뢰밭을 걷듯이 조심스럽게 나아갈 수밖에 없다. 원고지에 쓰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쓸 수는 없는 것이 인생이다. 마츠코의 남자중 하나인 소설가 야마카와 처럼 삶의 원고를 찢어버린 다는 것은 바로 죽음인 것이다. 아무리 불행한 삶이라도 다시 번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넝마처럼 끌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꽃동산이나 폭죽은 아니더라도 의도대로 조차 삶을 살아갈 수 없을까? 왜 원치도 않는 고통을 감당해야만 할까? 인간의 삶을 비틀어 버리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마츠코의 일생은 바로 그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대답처럼 여겨진다. 마츠코의 비극적인 죽음에 부단하게 영향을 미친 크고 작은 이유들은 비록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가벼운 사회면 신문 한 장이 이를 잘 입증해 준다. 그러나 신문은 알량하게도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사회면 단 몇 줄의 기사에 무감각하게 싣는다. 비일비재하게 기사화되는 일상이지만 동시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된 일상이기도 하다. 약간의 동정으로 얼마의 적선만을 던져주면서 좀 더 감각적이고 색다른 뉴스에 시선을 집중한다. 아니면 애당초 시선을 빼앗겨 그냥 지나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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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속 요정이 된 마츠코


모든 생물체가 커져가는 성장의 과정을 거치듯이 마츠코의 일생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여기에서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은 과거에 아주 귀여운 마츠코의 가족에서 시작된다. 아주 사소한 오해 그러나 어린 마츠코에게는 강박에 가까운 의식이었다. 아버지가 어린 동생만 사랑한다는 오해였다. 그러한 오해는 외로움이 되었고 동생에 대한 증오로 변해갔다. 아버지가 표현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오해는 이렇게 커져만 갔다. 아버지는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일기장에 마츠코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루 일기를 아버지는 꼭 ‘오늘도 마츠코 연락 없음’ 이란 말로 끝맺음을 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은 마츠코의 삶이 뒤 틀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너무나도 사소한 듯이 보이는 이 오해가 삶을 빙빙 돌아 해소가 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놀이동산 무대에서 배우들이 짓는 묘한 얼굴 표정을 보고 아버지가 웃자 그런 표정을 흉내 내면서 아버지를 웃게 만들려는 마츠코의 마음은 그저 동심이었다. 그러나 동생에 빼앗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끊임없이 아버지 앞에서 표정을 지은 결과 그것이 씻지 못할 버릇이 되어 더 큰 불행을 가져 오게 된다.

마츠코의 일생은 가정에서 비롯된 부녀간, 자매간의 오해에서 부조리한 학교 현장, 비현실적 예술 공간, 맛사지 클럽, 미용실, 감옥, 야쿠자, 변두리 아파트로 이어지면서 고단한 부침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마츠코의 일생을 비틀어 놓는 것은 모두 남자들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감독이 철저하게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여자들은 대체로 수동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제의 가족, 남교사 중심의 학교, 남성중심의 성문화, 문학의 변태성과 폭력성, 야쿠자, 교도소, 남성 아이돌 등 전부 남자들이 마츠코의 삶에 끼어들어 영향을 미친다. 아직도 사회의 구석구석에는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요소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 보인다. 좀 더 정형화해서 남성 중심의 사회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마츠코와 교도소에서 만나 유일하게 우정을 나누는 포르노 배우인 메구미의 말이 남성적인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여성의 위치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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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강을 바라보는 마츠코



“여자라면 누구나 백설공주, 신데렐라 그런 동화같은 이야길 동경하지. 그러나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백조가 되고 싶었는데 눈을 뜨면 새까만 까마귀가 되있다나 어쩐다나. 오직 한 번 뿐인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인데 이게 동화라만 너무 잔혹해.”

백마탄 왕자가 나타나는 동화이기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마가 아닌 권위적인 남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곳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마츠코의 심상이 후광처럼 동화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주지만 현실과는 불협화음을 일으킨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의도라 하더라도 마츠코의 비극적인 일생에 동화적인 요소, 즉 화려한 색채와 발랄한 음, 그리고 과장된 행동과 인물 등을 끼워 넣은 것은 다소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가 종교적인 엄숙성(저녁노을)이나 성화의 인상을 엿보이게도 하지만 너무 과장되어 있다. 결국 마츠코의 아름다운 동화는 동화를 잃어버린 아이들에 의해 비참하게 깨어지는 파국을 맞이한다. 아이들이 작은 현실의 동화마저도 부수어버리는 이 각박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만 할까? 인간의 이해를 벗어난 종교적인 영역에 내 맡겨야만 할까? 영화는 조카인 쇼가 마츠코를 신이라 부르게 하지만 신을 이토록 타살한 현실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마츠코와 그녀를 둘러싼 삶의 조건들을 돌아보면서 삶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조건들이 삶을 살게 만드는 굴레의 측면을 본다. 인간의 삶이라는 서사 장르 중에서 동화는 저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이 영화를 한 편의 성인 동화라고 볼 수 있다면 그 나마 다행이다 싶다. (*)

이미지출처(링크):www.monadist.com/5?TSSESSION=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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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4 13:03

[꽁트] 바람의 신화


 

영화 바람의 파이터 중에서



바람의 신화


K가 홀연히 사라져버린 건 여름방학을 일주일쯤 앞두고였다. 사회의 통념을 깨려고 부단히  온 몸으로 발버둥 쳐왔던(?) K이고 보면 방학을 앞두고 무단결석, 아니 행방을 알 수 없는 가출을 한 것이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패싸움으로 머리가 깨지고, 오토바이를 몰다 중상을 입고, 여자 친구 낙태를 시키고, 가출을 다반사로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학교로 돌아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처음의 무던한 생각과는 달리 이번 가출은 그저 기우로만 여겨지지가 않았다.


정말이지 K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K의 사라짐은 말 그대로 완벽한 사라짐이었다. 집에도, 학교에도, 여자애들과 어울리는 클럽에도, 비디오방과 만화방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K의 자취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K가 바람처럼 사라진 사건은 한동안 편모에게, 담임에게, 친구들에게, 심지어 경찰에게도 지우지 몰할 슬픔과 충격처럼 다가왔지만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리고 드디어는 잊어야 할 불필요하고 기분 나쁜 기억이나 물건처럼 여지없이 망각의 강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다 K가 바람처럼 홀연히 다시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고 바람처럼 나타난 것이다.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중간고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K가 다시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사회와 학교에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K였기에 K 스스로 떠나던 쫓겨나던 학교를 그만두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K가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운동화를 신고 바람처럼 다시 나타난 것이다. 교복도 가방도 헤어스타일도 학교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한 듯 했지만 여전히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K의 외모는 급하게 정리한 흔적들이 많았다. 그러나 바람 같은 변덕과는 다른 단호한 모습이 서려있었다. 신산했던 K의 뒷모습만을 기억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그런 모습은 신비하고 경이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무어라 할까, 이전의 K가 모나고 달구어진 돌이었다면 이젠 바닷가 흰 포말로 깨어지는 갯바위 같았다. 이전의 K가 삭이지 못한 분노로 몸부림치던 폭죽 같은 인간이었다면 이젠 숯불 같은 그윽함이 서려있었다.


K가 학교로 돌아 온 날 담임은 K에게 딱 한마디만을 했다. 좀 잘해보자! K는 아무런 말없이 이전의 호전적인 눈빛으로가 아니라 온화해진 눈빛으로 담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운 변화였다. 사실 담임은 K를 퇴학 처리하려던 참이었다. K에 대한 원망보다는 다른 학생들을 위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경찰에서 신원을 찾지 못하는 상태에서 학적을 유지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달라진 K의 눈빛을 보는 순간 담임은 K에게 중간고사를 치도록 허락하고 말았다.


중간고사를 치고 K가 또 홀연히 떠나버렸다. 아니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버렸다. 중간고사를 치고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람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속에 칼을 꽂고 떠나갔다. 영웅의 칼이었다. 전교 1등이라는 칼이었다. K의 칼은 우리의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예리한 고통으로 박혀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충격이자 이변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충격과 이변의 감정은 전설이 되어갔고 신화가 되어갔다.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들에게, 그렇게 세상의 신화가 되어갔다. 그리고 영원히 교육이란 것이 존재하는 한 신화로 남을 것 같았다. 이 신화을 사리사욕에 의해 왜곡시키는 인간들-사교육을 부채질하는 인간들과 학원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영웅의 고고하고 신선한 회오리 바람에 형체 없이 내동댕이쳐졌다. 영웅의 신화는 인간의 가슴에서 꿈틀거리며 각박하고 메마른 세상에 오아시스가 되어 주었다.


사족: K를 이용하는 사악한 인간들은 K의 신화와 더불어 늘어만 갔고 동시에 K의 신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악한, 괴물)들이 되어갔다. K가 그들 학원 출신이라고, 그들 출판사의 교재로 공부했다고, 그들 학용품을 사용했다고, 그들 학습지로 학습했다고……. 그렇게 허위 광고는 눈덩이처럼 커져 이 또한 바람 아닌 거품 같은 전설이 되어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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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3 21:24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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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http://www.movist.com/movies




클럽 진주군(3)

여성적인 손길로써의 음악

모든 인간들이 만든 이야기는 곧 관계를 의미한다. 관계가 없는 이야기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사물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서로 갈등을 일으키거나 화해를 하거나 무관심하거나 사랑하고 증오하거나 하면서 이야기가 만들어 진다. 또한 이야기가 전달되지 못한다면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말 할 수 없다.

영화도 일종의 이야기이라면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무리 자연만을 담았다 하더라도 그 자연은 감독의 시선과 관계하고 있으며 관객과의 관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담고 있는 관계들, 특히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영화의 내용(사건)을 만들고 의미를 생산해 내는 영화 그 자체라고 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 조명이나 촬영기법이나 언어 등 영화의 장치들은 이러한 관계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부수적인 장치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부수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영화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클럽 진주군>에 있어서도 영화에 드러나는 여러 관계들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덧붙여야 할 것은 관계는 또한 구성(형식미)과도 긴밀하게 관련이 되어 있기에 영화의 형식 이해에도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러한 영화의 기법적인 이해는 영화 비평가나 전문가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   

<클럽진주군>에서 인간의 관계들은 전쟁의 비극이 잉태한 절망적인 현실에 부단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 추상적인 전쟁의 비극이 인간들의 관계들에 의해서 구체화 되는 것이다. 시장의 인간 군상이나 거리의 부랑자들, 버려진 아이들, 겁탈당하고 성을 거래하는 여자들을 통해 생생하게 시각화 되는 것이다. 영화의 생동감으로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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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 말하자면, 전쟁의 비극이 잉태한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 관계들이란 대체로 부서지고 단절되어 있다. 관계 단절의 극단적인 양상은 죽음인 것이다. 신체의 일부가 훼손된 것은 그 신체를 훼손한 자의 상처이며 관계의 파괴인 것이다. 여자를 겁탈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비극을 보면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왜 이러한 비극이 일어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면서 인간에 대해서 회의하거나, 절망하기도 하면서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관계를 회복(복원)하려는 노력이 존재하기를 바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노력이 존재하는데, 그 노력의 중심에 음악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악은 폭압적이고 파괴적인 남성에 대해 부드럽고 평화로운 여성적인 것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남성적인 마르스에 대한 여성적인 아폴론의 부활인 것이다. 이러한 여성적인 것(음악)의 부활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창녀가 유곽앞에서 술 취한 미군에게 겁탈 당하려는 여자에게 냉소적으로 내뱉는 대사에서 아주 인상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일본이나 네가 좋아하는 미국이나 병사들은 다 같아. 전쟁을 시작한 것은 남자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어 일본은 졌으니까.”

음악으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lucky strike라는 악단으로 조직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회복(복원)의 상징적인 의미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음악은 관계들의 조화를 통해 탄생하기 때문이다. 음악(여성)은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지면서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다. 음악을 통한 이 젊은이들의 작은 노력은 그래서 큰 공감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소죠는 음악을 통해 원폭피해자인 여동생과의 관계를 복원하려고 하며, 아키라는 피아노를 통해 동생을 되찾으려 하는 것이다. 물론 히로유키의 죽음과 이치조와 형과의 불화는 관계 복원에 실패하고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커다란 힘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켄타로와 러셀의 음악을 통한 관계 회복(복원) 이나 소통도 인간성 회복이나 인류평화라는 보편적인 의미로 확대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회복(복원)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우리에게는 재미와 감동 같은 의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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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2 21:24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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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진주군(2)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진부한 표현이다. 일본영화 <클럽진주군>도 그 예외가 될 수 없다. 상상력도 현실과는 무관할 수 없으므로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 결코 아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세상 밖에서 현실과는 무관하게 상상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현실을 반영한다는 당연한 말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막연해 지기 쉽다. 도대체 현실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가지고 있는 대답이 ‘문화’ 라는 단어이다. 문화가 현실 그 자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화를 이해한다거나 배운다고 한다. 사실 속임수다. 아니 거짓말일 수 있다. 그러나 어쩌랴, 능력 부족인 것을.

문화는 사전적인 의미로 생활방식, 즉 삶속에서 드러나는 유무형의 방식을 의미한다. 영화를 통해 음식이 어떤가? 사람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옷은 어떻게 입는가? 인간관계의 특성은 어떠한가?…… 등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사실 일본영화를 접하기 시작한 이유도 일본 문화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아주 가까이에 일본이 있고 그 일본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정작 일본사람을 한 번도 만나 본적도 없고 일본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는 전무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 이상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오히려 당연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러한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자기반성이 일기 시작했다. 도대체 일본을 보아 온 통로라고는 대개가 과거 식민주의 역사와 신문과 방송의 대체로 부정적인 단신들, 이를테면 역사왜곡, 교과서 왜곡들이었다.

이러한 오랫동안 관습화된 생각에서 살다가 일본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다. 나의 시야에 구체적인 일본의 모습이 드러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이러한 감정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겠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거쳤던 생각일 테고 경험했을 체험 일테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클럽 진주군>를 통해 어떠한 문화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었는가? 우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반전사상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비극에 대한 성찰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전쟁을 다룬 모든 영화의 주제이기도하다. 언제나 반성은 하되 전쟁의 비극이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추가하지만 말이다.

예술, 특히 음악의 힘을 이해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음악을 통해 교류하고 공감하면서 상처받은 서로의 영혼을 치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여러 추상적인 가치들이 있다. 삶이나 죽음이 그렇다. 미래 희망이나 꿈도 그렇다. 그러나 다시 반복하는 말이지만, 이 또한 인류 보편의 가치이며 달리 해석의 여지가 없다.

보편적인 것을 넘어서 일본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중요한 것은 일본인만의 구체적인 무엇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느끼는 이질적인 무엇이다. 전쟁을 보는 그들의 관점이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이거나 영화 곳곳에서 나타나는 일본적인 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러한 것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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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면에서, 가장 먼저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원자 폭탄을 투하한 승전국 미국에 대한 일본인의 태도였다. 필리핀의 정글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미군과 전투를 하던 켄타로가 귀향해서 (비록 생활의 방편이나 음악 때문이기는 하겠지만) 미군의 클럽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일본적인 무엇으로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카미카제(몽고군을 물리친 신의 바람이란 뜻으로 자살 특공대에 붙여진 이름), 옥쇄 등 극단적으로 미군과 싸웠던 일본군이 어떻게 이토록 하루아침에 순하게 될 수 있는지는 일본인들의 의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에서 그 원인이 신적 존재로서의 천황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에 덧붙여 스시와 할복의 명쾌한 칼, 즉 사무라이의 일도양단의 의식이 잠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형과의 언쟁 후 히라야마 이치로가 벽장 같은 ‘밀폐’ 된 곳으로 파고드는 모습이었다. 이러한 모습은 일본 영화를 통해 몇 번 보면서 호기심을 지니고 있던 것이었다. <란도리>에서 권투에서 진 등장인물이 자책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으로 세탁기에 들어가는 것이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여주인공 조제가 벽장 같은 밀폐된 곳에서 은신하는 것, 그리고 성격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사무라이 픽션>에서 방의 천정에 숨어있는 닌자들, 큰 덩치의 선수들에 비해 너무 좁아터진 원형경기장 등도 이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령씨가 도시락, 쥘부채, 분재, 이레코인형, 하이쿠, 다다미 등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일본의 문화가 ‘축소지향적’ 이라고 분석하였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축소’ 와 더불어 ‘밀폐’ 또는 ‘은폐’ 의 성격을 발견하였다.(개인적인 인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이것은 쉽게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지 않는 일본인의 특성이나 역사왜곡을 예로 삼아 봄직하다. 아마도  칼을 품고 있는 국화를 연상해 보거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셋째는 이념이나 종교보다도 현실지향적인 삶의 태도였다. 이것은 영화의 영어제목을 <Out of this world>, 즉  세상 밖으로라고 붙였으나 내용은 다소 세상 안으로(into this world)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들이 내면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현실지향적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따지고 보면 음악이란 것도 어려운 삶을 일시적으로 망각하거나 위로하는 수단으로 등장할 뿐이지 음악을 통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식의 도피적이고 퇴폐적이거나 발악적인 느낌은 없었다. 음악은 세상 밖으로의 도피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자기 위안이나 위로로 여겨졌다. 켄타로의 음악적인 고뇌가 전부이며 음악은 현실로 존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대체로 돈을 벌기위한 현실적인 수단으로 음악을 한다. 소죠는 동생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히로유키는 마약을 위해서, 아키라는 이복 동생을 찾기 위해서 드럼을 배우고 트럼본을 불고 피아노를 친다. 히라야마의 경우도 “군악대 사람들은 재즈로 먹고 산다” 고 말한다. 여기에서 예외적인 인물이 켄타로 정도이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음악에 대한 고뇌가 ‘음악을 배운다’ 는 것과 대체로 일치할 뿐 신의 구원 같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종전 삐라는 믿지 못했어도 비행기에서 흐르는 재즈는 믿었어요.” 라고 말하는 켄타로의 태도에서 천황(신)의 자리에 음악을 세우려는 듯 했으나 사실상 음악에 대한 태도는 너무나 현실 지향적이었다. 또한 이념지향적인 형에 대한 히라야마의 조소적인 태도에서 그리고 처참한 삶의 가운데서도 신에 대한 의지나 저주 한 번 내뱉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서 현실지향적인 모습은 떼놓을 수가 없었다. 재즈라는 현실적인 감각, 콜라나 아이스크림 같은 구체적인 사물, 형(이념)으로부터 “너처럼 타락한 놈”이라고 비난을 듣지만 오히려 이념이 몰락하는 현실은 일본인의 현실 지향적 태도를 반영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이상은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느낀 몇 까지 호기심이며 나름대로 이해하고 배우려고 노력한 것들이었다. 그 외 에도 이 영화에는 일본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유무형의 구체적인 사물이나 인간, 그리고 사고와 의식들이 담겨있을 것이다. 재미와 감동과 더불어 이러한 것들을 이해하고 배운다는 것이 영화가 던져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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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1 20:24

[생각 돌아보기] 성욕의 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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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성욕과 관련해서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일정한 나이, 대체로 사춘기에 접어들면 예외 없이 자연스럽게 성적 욕구가 생겨나게 되고, 따라서 내면의 본능적인 성적 욕구와 외부의 강제적인 도덕과 사회적인 요구와 기대 사이에서 찢어지고 흩어지는 분열된 자아로 고뇌하게 된다.


이러한 면에서 성욕의 해소와 억압의 문제는 인간의 자유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복잡하고 해결 난해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역사가 인간 중심의 이성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문명을 형성하면서 본능이 억압받고 중심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도화되고 체제화 된 인간적인 이성의 ‘차갑고’ ‘냉정한’ 문명이 그 존속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동물적 본능을 억압하거나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순화된 본능이 태양의 그림자같이 그 영역을 넓혀온 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은 인간의 이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억압된 본능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순화된 본능이기도 하다. 오늘날 인간의 문화를 억압된 본능(성욕)의 승화된 양상으로 파악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본능을 순화 시키는 것에는 예술과 더불어 교육제도가 많은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의 교육제도는 이성과 합리성의 계발과 더불어 인간성의 고취라는 명목 하에 동물적인 본능을 순화시키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인간성의 고취라는 것은 이 성욕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억압하고 창조적으로 승화시킬 것이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있을 것이다.  성욕이 창조적인 행위로 출구를 발산할 때 그것에 문화적, 교육적, 종교적인 라벨을 붙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어, 최근의 영어에 대한 강조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국가의 존속을 위한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파악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영어를 통해 국가 경쟁력과 실용적인 인간상을 강조하는 것은 본능을 강제하고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극단적인 변형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순화된 본능은 고급이나 세련미의 고상한 이름으로,  동물적, 본능적이고 탐욕스런 성욕에 관해서는 ‘양심의 가책’ 이나 ‘수치심’ 이나 ‘위선’ 또는 ‘정신이상’ 이란 감정이나 인식을 갖게 만들어왔다. 승화되지 않은 본능(성욕)은 저질이고 더럽고 타락한 것이란 인식의 팽배가 사회를, 특히 아직도 유교의 영향이 큰 우리 사회를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성격으로 만들어 놓은 측면을 간과 할 수 없다. 의식의 이면으로 감추어지고 억압되어져야 할 성욕이 건전하게 형성된 듯한 의식층을 뚫고나와 타인에게 성욕을 탐욕적으로 발산하게 될 때는 영락없는 위선자의 딱지가 붙여지는 것이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경우가 그렇다. 피해자들은 평소 가해자들을 존경하고 믿었던 것이다. 존경받고 믿을 만한 사람이었기에 위선의 감정은 더 깊어지는 것이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10대들에게 있어 성욕은 그 자체로서 위선이란 죄책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솔직히 필자도 어린 시절 그런 죄책감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특히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숨어서 자위행위나 만원 통학 버스에서 여학생에게 몸을 밀착하는 행위 등을 했을 때는 어김없이 위선자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괴롭고도 괴로운 성욕의 질곡이었다.          


바로 이 위선이란 감정의 사회 문화적인 경로를 추적해보면 아마도 사회적인 억압장치의 부산물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동물을 인간이게 하는 거의 모든 장치들이 아마도 성욕을 죄악시했을 것이다. 특히 가족과 공동체등 가부장적인 질서는 혼란한 성욕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성욕을 죄악시 한 것은 신에게 순종하는 종교적인 질서의 필요에 의해서일 것이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성욕의 통제라는 의미 해석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욕이 인간이게 하는 이 모든 제도와 체제의 원리와 반할 때 동물이라는 위선의 딱지가 붙어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위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자연스러워야 할 성욕을 폭력적으로 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행위에는 질서와 정정당당한 경쟁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인간에게 성행위는 그 나름대로의 원칙과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서로간의 동의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위선은 순화된 본능이 억압해온 성욕에 대한 지나친 죄책감이다. 성욕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샘물과 같다. 한 순간 막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홍수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특히 우리의 10대들에게 충고하건대 성욕을 때로 자위행위나 이성과의 교제와 같은 방법으로 해소하는 경우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위선이 아니다. 어차피 성욕에 대해 억압해야만 하는 환경이라면, 중요한 것은 성에 대한 건전한 의식이다. 그리고 임신과 낙태에 대한 정확한 정보, 건강, 교육, 경제적 여건 등 현실적 고려이다. 또한 성욕을 억제하는 것 그 자체도 괴로운 자기 수행이며 속과 겉이 다른 위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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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본능이 억압되고 통제되어 왔지만 앞서 말했듯이 본능이 그 영역을 넓혀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본능의 영역을 넓히고 그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예술은 인간 본능의 고귀한 산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성욕의 괴로움과 관련해서, 이제 인간은 두 가지 선택에 직면해 있다.(아니 이것은 인간 일반의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개인들 각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며 양자의 공존도 가능하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언급해 보면, 그 하나는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는 방식이며 다른 하나는 성욕의 직접적이고 동물적인 해소가 그것이다.

제도화된 결혼을 통한 성욕의 해소는 제외하고, 성욕의 직접적인 해소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매춘은 성상업주의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이것이 성욕의 변질되고 왜곡된 모습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단지 그러한 상업주의가 인간의 순수한 성욕해소는 무관하게 인간의 비극을 잉태한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술, 마약, 범죄 등 성욕해소를 변질시킬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대들의 원조교제는 이러한 변질의 전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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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이긴 하지만, 승화된 성욕이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으로 성상업주의보다 성욕 해소의 더 효과적인 방법임을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성욕의 해소를 주로 직접적인 방법에 의존하는 것 같이 보인다. 따라서 성욕으로 창조적으로 승화시킨 문화 보다는 직접적으로 성욕을 배출하는 성범죄나 성상업주의가 더 횡행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인류 문화는 성욕의 승화에서 창조되었다는 말처럼 창조적인 승화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과장된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야말로 성욕이 문화의 질을 높이느냐 저질로 만드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예민한 감수성이 있기에 많은 분야에서 창조적인 승화를 이룰 수가 있다. 예술, 스포츠, 컴퓨터 등이 그런 분야이다. 성욕의 괴로움에 빠져 범죄까지 저지르는 10대(사실 기성세대가 더 심각하며 10대들은 성범죄는 기성세대의 모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분명히 창조적인 다른 세계는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미래 자산인 10대들이 성욕의 괴로움을 창조적으로 해소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의 노력이 절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기성세대가 성욕을 창조적으로 승화하여 바람직한 성문화를 이루려는 의지와 노력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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