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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5:58

[일본영화] 클럽 진주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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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진주군


1.영화 또는 역사적 사실 해석의 인류 보편적 가치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는 개인의 취향이겠지만 사실에 대한 해석만큼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의 소속이 국가 단위로 확대가 되면서 민족이나 국가 그리고 역사라는 문제가 게재되면 일어난 ‘사실‘ 도 ’역사적인’ 이란 수식을 받으며 ‘역사적인 사실‘ 로 화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민족, 국가 중심의 왜곡된 해석이 서로 충돌하면서 사실에 대한 해석은 공존할 수 없는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어느 국가나 민족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민족위주로 해석하려는 국가이기주의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럽 진주군>은 한국인의 관점에서는 상당한 사실 왜곡과 감정적인 편향을 나타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감독이자 각본을 쓴 사카모토 준지의 사실에 대한 이해가 아무리 객관적이라거나, 그 마음이 따뜻하다고 해도 그 한계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침략 전쟁에 의해 희생된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참회나 반성적 사고가 철저하게 배제되고 단순히 전쟁 피해자로서 일본인의 상처와 승자로 주둔한 미국과의 화해적인 제스쳐 만을 언급하는 몰역사적인 태도가 그의 시각에 배여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는 인간을 사지로 내몰아 비인간화시키는 잔혹한 전쟁에 대한 반전 논리가 인류 보편성의 추상성(이데아)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인간의 잔혹한 행위와 비극에 대한 철저한 규명은 그 거대한 추상성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요구하는 아시아 나라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일본 정부의 사고나 의식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일본 젊은이들의 비극적인 삶의 갈래들을 다양하게 드러내면서도 정작 전쟁을 일으키고 타 국가를 침략해 식민지로 삼은 일본제국주의와 잔인하고 잔혹한 인간 본성이나 인간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나 성찰은 정치탈색 이란 예술적인 모토 아래 의도적으로 빠트렸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따라서 영화 속의 젊은이들의 삶이 과연 인류가 공감하는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지는 아주 의심스럽다. 오히려 보편성의 획득은커녕 역사적인 사실의 왜곡이란 측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영화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영화라는 창백한 텍스트만을 외부적인 맥락이나 연관성 없이 보는 것도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클럽 진주군>을 영화만으로 보기에는 영화의 정치, 사회, 문화적인 영향력과 그 파급력을 고려해 본다면 다소의 문제 제기는 필요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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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화의 줄거리
이제 이러한 비판적인 전제하에서 먼저 영화의 줄거리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영화는 2차 대전 당시 필리핀의 밀림(필리핀이라는 것은 작중 겐타로의 대사에서 밝혀진다) 속에서  패잔병으로 남겨진 켄타로와 전쟁 종결, 천황 성명이라 적힌 전단지를 뿌리는 비행기로 시작한다. 전단을 뿌리는 비행기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 음악과 전단지보다는 재즈 음악에 넋을 잃고 비행기를 바라보는 겐타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렇게 전쟁이 끝난지 7일 만에 밀림에서 나온 겐타로는 귀향을 하고 버스에 내리면서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군들을 위한 쇼를 보게 된다. 그곳에서 음악 단원으로 콘트라 베이스를 연주하는 고야마 학교 군악대 2기 선배인 히라야마 이치로와 만나게 된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약간은 심드렁하게 느껴지는데 다소 인상적이라 그 대화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겐타로 이제 돌아 온 거야?”
“저 살아있죠?
“당연하지.”
“이 악단은 뭐죠?”
“악단? 이거 마셔봐.”
“무슨 맛이 이래요.”
“군악대 사람은 지금 재즈로 먹고 살아.”

이렇게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겐타로와 히라야마의 대화는 너무나 일상적이라 권태로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권태감은 아마 전쟁으로 인한 체념이나 허무감을 반영하기 때문일까? 마셔보라고 준 ‘병콜라’ 나 ‘재즈’ 가 미주둔군과 미국 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다. 

2년후 1947년(소화 22년 봄) 쇼단을 모집하는 미군 군용 트럭이 나타나고 겐타로, 이치로, 아키라, 쇼죠, 히로유키 등이 미군 기지내  클럽(Enlisted Men's Club)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이중에 트럼본을 부는 히로유키는 클럽내에서 겐타로에게 스카웃(?)되고 밴드의 이름을 담배 이름을 딴 Lucky Strike 정하게 된다. 쇼조(오다리기 조)는 드러머로 모집이 되었지만 실상은 드럼에 문외한이다. 또 이들 외에 비중 있는 등장인물은 밴드(특히 겐타로)와 갈등을 일으키는 대척적인 인물인 러셀이라는 미군이다. 일본 주둔군은 주로 유럽전에 참전한 미군들로 구성되었는데, 러셀의 경우는 예외로 일본군에 의해 동생을 잃어 일본군에 대한 분노가 지배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하나같이 전쟁의 상처들이 있다는 것은 앞서도 말했다. 이들의 음악을 매개로 만났듯이 음악이 주로 상처를 추스르고 위로하는 통로가 된다. 이렇게 음악을 매개로 만난 이들이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우선 그들의 상처를 살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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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쟁으로 상처 받은 개인들

겐타로는 필리핀 밀림에서 종전이 된지 7일 후에 미군 전단지를 보고 귀향하게 된다. 영화에서 켄타로의 상처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의 폭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겠다. 필리핀 정글에서의 생명이란 한 낱 피라 목숨처럼 처절했을 것이다. 군악대 단원이었던 겐타로가 부여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음악 외에는 달리 없었을 법도 하다. 히라야마는 먹고 살기 위해 재즈를 한다고 했지만 그러한 이유는 어쩌면 겐타로에게는 부차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겐타로의 아버지는 중고 악기점을 경영하고 있고 그다지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음악을 한다는 것이 다소 퇴폐적이고 현실 도피적인 의미도 부여할 수 있다면 겐타로의 경우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한다.

히라야마 이치로와 아사카와 히로유키의 경우는 (물론 전쟁이 상처의 본질적인 원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치로가 형과의 불화와 갈등(이념적인 갈등)으로 괴로워하고 히로유키가 마약 중독으로 자기 파멸으로 나아가는 것은 전쟁이후의 시대적 상황의 상징적인 의미를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치로의 형의 공산주의 이념 신봉과 히로유키의 마약은 음악이나 콜라 아이스크림과는 달리 인간의 정신을 토막내고 경직되게 하는 공산주의 이념과 저질의 미국문화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오노 아키라의 쇼조의 경우는 전쟁으로 비롯된 비극적인 가정사가 그들 상처를 잉태하고 있다. 아키라의 경우는 전쟁으로 풍지 박산이 된 가족과 이복 동생의 가출로 상처받고 있고 나가사키 출신의 쇼조의 가족은 직접적인 원폭의 피해자이다. 동생이 병원에 입원하고 있고 쇼조는 동생의 병원비를 위해 도쿄로 온 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의 비극적인 상처를 안고 있는 다섯 명의 일본 젊은이와 한 미군의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끌어 가고 있다. 이들의 상처는 다양한 갈래에서 함께 모여 음악으로 그 상처들을 서로 위로하고 있지만 그들 상처를 잉태한 뿌리는 전쟁과 맞닿아 있다. 그 외에도 영화의 군데군데에 기지촌의 여성들, 유기된 아이들, 민중시장, 부랑자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극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상처를 품고 있는 그들의 만남과 삶은 전패 이후 상처 받은 일본인이 처한 정신적인 상처와 고뇌의 축소로 읽어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축소가 일본의 민족주의나 국가 이기주의라는 특수성으로 해석 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확대지향적인 보편성으로 나아가기에는 이들의 상처가 너무 일본이란 테두리에 머물며 옹색한 자기변명,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시대적인 배경이 1945년을 걸쳐 본격적으로 1947년 봄에서 1950년 여름에 걸쳐있다. 즉 2차 대전의 종결과 6.25 한국전쟁의 발발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은 그 배경 자체뿐만 아니라 그 배경에 놓여있는 인간들의 인식과 사고에 대한 많은 의미 해석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의 비극을 체험한 일본군과 미군에게는 인간과 세계, 죽음과 삶 따위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잉태하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반전사상과 전쟁고발의 주제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말 할 있으나 이미 언급하였듯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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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1:11

[꽁트] 꽁트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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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선언서




꽁트 선언

글을 읽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그건 당연하다는 반발도 만만치 않다. 글을 대체하는 수많은 매체들이 등장했고, 이제 글은 낡은 전축과 LP 레코드판처럼 시대와는 걸맞지 않다고들 한다. 글이 문학의 유일한 매체였을 때 문학은 문화 그 자체로서 인식되곤 했다. 그러나 수많은 매체들의 등장으로 문화의 영역이 확대되고 대중화됨으로써 이제는 문학이 문화의 하위 개념으로 저 한 구석을 자치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의문이다. 왜 짧은 꽁트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는가? 단숨에, 가볍게 읽을 수 있고 부담 없이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꽁트가 왜 그 가치와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하는가 말인가? 화장실에서 똥을 누는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인 꽁트가 왜 똥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할까? 이건 정말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꽁트가 재미있고 유쾌하면서, 경박하지 않고 진지하기까지 하다면 속도의 시대에 적합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말이다. 문학비평가나 문화 비평가들은 왜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을까? 저속한 통속소설이나 저질문화를 강하게 비판하기는 해도 꽁트에 대한 적절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꽁트가 비평가의 애정 어린 관심 대상이 되지 못해왔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의 위기 운운하면서도 순수의 노스텔자에 빠져 대하소설이나 장편소설, 그리고 순수소설을 옹호하거나, 마지못한 현실과의 타협인 냥 문학 영역의 확장으로써 판타지 소설이나 유사 역사소설 등 대중소설에 관심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도대체 왜 꽁트는 아닌가? 도무지 이러한 현상을 이해 할 수가 없다. 비평가들은 꽁트는 문학 위기의 시대에 애정과 관심을 보낼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지함과 깊이가 없다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의문은 풀리지가 않는다.

그러나 비평가들만을 탓을 것도 아니지 싶다. 정작 당사자인 소설가들의 꽁트에 대한 태도 또한 비평가들의 무관심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한 것은 아니다. 그들 또한 꽁트가 작품을 쓰는 중에 간간히 빼내는 배설물 정도로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여간 가슴 아픈 일이 아니다. 왜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백주대낮에 태연하게 자행되고 있는가? 이건 테러고 강간이다. 소설을 쓰면서 억눌린 욕정을 푸는 강간행위에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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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독립선언서



대중들은 또 왜 변덕스럽고 괴팍스러운가? 다매체시대의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진지함을 부여하면서 읽기의 편리성을 고려한 적정한 길이와 읽기의 재미를 왜 인정하지 않는가? 코미디나 개그에 빠져들면서도 짧은 꽁트에는 왜 그토록 무관심한가? 똥을 누지 않는가? 똥을 누면서 꽁트 정도는 느긋하게 읽을 수 있지 않는가? 적어도 중급의 문학의 질을 보장 할 수 있는 꽁트가 순수와 대중, 고급과 저급의 중첩부분으로 양자를 만족 시킬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있지 않는가? 양극단, 이를테면 고급과 저급, 고질과 저질, 순수와 비순수로 양분되는 문화의 극단적인 분리현상을 완화시킬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있지 않는가?

꽁트는 소설 엘리베이트의 1층이다.

이 말은 꽁트를 위한 중요한 선언이다. 대중들은 위로는 꽁트와 연속적인 선상에서 순수소설과 더 많은 접점을 가지게 될 것이며, 동시에 아래로는 꽁트와 연속선상에서 대중소설과 더 많은 접촉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문제를 비평가와 소설가와 독자 모두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꽁트 자체에 대해 무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비평가, 작가, 그리고 대중들로부터 소외받고 있는 꽁트를 시대의 한 트렌드로 세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부지런히 꽁트를 쓸 것이다. 경멸과 멸시의 시선도 감수 할 것이다. 박쥐같은 처세라고 비난도 할 것이다. 그러나 꽁트를 문학의 지평 확대를 위한 튼실한 기반으로 세워 놓고 말 것이다.

*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정권접수위원장님에게 간곡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바입니다. 차기 정부에서는 문화부의 명칭을 문화꽁트부로 추진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학교의 정규교과에 꽁트 과목도 신설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학의 세계화란 차원에서 영어로 꽁트를 쓰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동시에 기러기나 펭귄 아빠와 사교육비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영어교육의 일대 혁명적인 방법으로 정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소 황당하고 사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아주 중차대한 조치로써 모든 건물의 엘리베이트 1층을 [꽁트층]으로 표기할 수 있도록 건축법으로 명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4층을 F층으로 표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노력을 꽁트를 통한 문화 진작에 거대한 기여를 할 것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기를 앙망합니다.

*

당신이 보낸 선언서 답잖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좀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당신의 꽁트에 대한 그 열정은 치하합니다. 우선 당신이 간과한 사실 하나를 언급하자면 언론의 관점입니다. 당신의 그 의미있는 발상을 언론은 얼마나 유치하게 치부해 버릴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는 충고이니 언론에는 이런 선언서 따윈 보내지 말았으면 합니다. 당신이 정신병자나 사기꾼이나 위선자로 매도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꽁트 따윈 이 세상에 별 상품성이나 가치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우리의 대중문화의 우상인 나모씨 같은 가수와 꽁트를 결코 동일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거니와 진심어린 충고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꽁트 부지런히 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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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10:50

[생각돌아보기] 영어광고, 과장인가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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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광고, 과장인가 사실인가?

요즈음 신문 지면을 보면 영어회화 광고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다. 학원 광고와 학습 교재는 물론 영어 학습 관련 서적을 비롯해 각종의 다양한 학습법들이 선보이고 있다. 정말이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대부분의 광고가 그렇듯이 영어 광고 또한 긍정적으로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준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정적으로는 오히려 절망감과 좌절을 안겨주지 않을까 걱정이다. [영어회화를 단기 완성]하고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될 것]처럼 떠벌리고 [최고의 학습법이라 단언]하는 광고들이 과연 과학적으로, 아니 양보를 해서 현실적으로 사실일까.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만약 광고대로 라면 필자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기]와 [저절로]와 [최상의 학습법]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필자 자신의 지능에 대한 절망감이며 투자한 시간들에 대한 절망감이다. 도대체 [나는 지금까지 무얼 했는가] 하는 절망감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대개의 영어 광고들이 진심으로 영어회화의 [습득]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 [돈]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과장이고 실현성이 희박하다면 어느 정도 안도가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에겐 그러한 광고들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을 밝혀낸다면 자신의 지능에 대해 절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무슨 수로 과장임을 밝혀 낼 수 있는 것인가? 솔직히 학습이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증명해낼 도리가 없을뿐더러 혹 결과가 광고의 사실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다른 요소들에 핑계를 댄다면 어쩌겠는가. 이를테면 영어에 흥미가 없다거나 성격상의 문제 등 심리적인 측면으로 말이다. 이것 또한 증명해 낼 수도 없는 것 아닌가. 만약 학문적으로 이론적으로 광고의 내용을 뒤엎고자 한다면 두루 이론을 섭렵해야 하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이것 또한 완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 습득이론 자체가 완전히 객관화시킬 수 있는 과학이 아니라 추론과 가설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머릿속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실험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 필자의 절망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것만 같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추론과 가설은 어느 정도 해석상의 유연함이 가능하기에 터무니없는 논리만 아니라면 과장이라 지적한들 논박을 받을지언정 거짓이라 손가락질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종의 능력 없는 자신의 위안으로서 필자 혼자만이라도 이렇게 단언하는 것이다.   

과장 광고에 대한 문제가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하지만 영어광고는 과장의 지적은 커녕 시류에 편승해서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광고의 규모도 신문의 한 모퉁이가 아니라 전면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영어회화의 학습 광고가 때대로 마치 신문의 광고면을 점령한 듯 보이기도 해 영어의 중요성이 얼마나 파괴력이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혹 이것은 영어 공용화가 공론(c�의 대상이 되게 한 정부의 세계화 정책과 상응하기 때문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과장 광고라고 지적한다면 세계화 전략에 차질을 빗을 것을 염려해서 일까. 과장이라 했다가 영어 학습 열기에 찬물이라도 끼얹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돈도 많이 날아가겠지). 그렇다면 지나친 아부이지 싶다.

지금의 과열되고 맹목적인 영어 학습열을 살펴볼 때 학부모들은 이성을 잃은 듯(?)하다. 사이비 종교에 맹목적으로 빠지는 것과 같이 과장의 여부를 확인조차 않고 교육이란 이름으로 자녀들을 맡겨버리니 이 어찌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맹신과 다를 수 있겠는가. 학부모들은 영어회화라는 사이비 물신에 빠진 정신나간 신도들은 아닐까. 고작 해댄다는 것이 학교에서 공부 제대로 안시키고 교사들 안이함만 타박하니 정작 자신들의 잘못은 보이는지 안보이는지. 그저 영어 하나에 사생결단으로 뛰어들어 학생들의 재능과 자질은 무시하고 수백에서 수천 만원까지 하는 유학이나 연수를 보내거나 좀 못한 경우는 수 십만원하는 국내의 학원에 보내니 이것이 진정한 교육인지 이기주의고 탐욕인지는 구분하지 어려울 정도다.

또한 사회는 영어를 통한 돈벌이에 혈안이 된 듯한 느낌이다. 세계화의 고상한 겉옷을 입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교육과는 거리가 먼 상업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다. 공권력도 정치의 눈치를 살피는 것과 같이 팽배한 영어회화의 폐해에 대해 학부모들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과장이라고 지적하므로써 이러한 과열과 맹목과 이성상실을 완화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작은 좀도둑 보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을 싹트게 하는 큰 문제인지를 제대로 파악조차 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누군가가 [벌거숭이 임금님]이라고 소리쳐 주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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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9 15:45

[꽁트]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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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모든 파편들을 잉태한다. 그 자신이 부서지면서까지도......



자료출처:wvs.topleftpixel.com/archives/..

거울
-거울은 알까, 그들의 속삭임을

나는 지금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시간의 손아귀에 뜯기고 뜯겨 온갖 장식으로도 가릴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다 늙어 버린 한 노인인, 나를 지금 바라보고 있다. 나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의 본질을 단 한마디로 나타낸다면 슬픔이란 것이다. 삶에 대한 달관으로 고요히 잠들게 하지 못한 노욕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슬픔은 주름으로 뒤덮인 노화된 육체 속에 구속된 나의 젊은 영혼 때문이다. 늙음이 모든 과거를 주름으로 삼켜버리고 거울 속에서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 늙음으로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내 젊은 영혼은 젊음을 원한다. 젊은 육체를 원하고 젊음의 언어를 원하고 젊음의 시간을 원하고 젊음의 공간을 원한다. 그러나 늙은 육신의 각질은 이 모든 것을 단단히 구속한다. 시간은 육체와 더불어 고뇌와 방황의 몸부림을 끝내라고 영혼에게 속삭인다.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라! 죽음에 영혼을 맡겨라!’

나는 슬프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이 사실이. 시간은 내게 죽음을 재촉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제 갈 길로 가버린다는 것이. 나는 본다. 거울 속 노화의 각질 속에 퀭하니 뚫린 두 눈에 잠긴 슬프디 슬픈 영혼의 그림자를. 제기럴!

나는 거울 밖을 본다. 화려한 색계이다. 싱그러운 여자의 육체가 있다. 푸르른 육체에 와 닿는 쾌감이 있다. 그 푸르른 육체를 부서질 듯이 안고 싶다. 그녀의 허리가 부서지도록 안고 싶다. 그녀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듣고 있다. 포갠 다리와 몸을 흔들고 있다. 그녀는 껌을 씹고 있다. 반나의 상체가 너무나도 탐스럽다. 내 젊음에 어울리는 반나의 푸르디 푸른 육체이다.

나 자신 만이 늙은 육신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젊음도 나의 늙어버린 육신을 거부한다. 거울 속의 나는 체념할 수밖에 없다. 구속된 육체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상상력과 두 눈과 두 귀 밖에 없다. 나는 여자의 날씬한 육체를 훑어 볼 뿐이다. 고혹적인 목소리를 들을 뿐이다. 그녀의 나신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주름에 파묻힌 각질의 무심한 표정 뒤에 끓어오르는 욕정을 삭여야 할 뿐이다. 내 젊은 영혼은 각질화 된 육체 속에서 미치도록 방황할 수밖에 없다. 이 영혼의 방황은 조용히 사그라지거나 공짜로 탄 지하철 화장실의 변기 속에 자위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다. 각질을 뜷고 나온 고뇌의 흔적일 것이다.

늙은 육신은 내겐 고문이다. 그 늙은 육신을 반영하는 거울은 일종의 고문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거울을 보는 것은 자학적인 행위이다. 그러니 거울은 깨어버려야 한다. 밟고 짓이겨야 한다. 세상에서 거울 따위의 쓸모없는 것은 사라져야 한다. 나의 늙은 육신을 반영하는 거울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비극이다. 아무리 거울로부터 달아나려 해도 사방은 거울로 넘쳐난다. 거울로부터, 아니 거울에 비친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눈을 감는 것이란 건 견딜 수 없는 모욕이고 비극이다. 시간은 철저하게 젊음을 농락하고 비극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니 말이다. 눈을 감는다. 검은 어둠속에서 시간의 혓바닥에 닳아 쩍쩍 갈라져 버릴 각질화 된 육체 속에 갇혀질 운명, 내 젊은 영혼의 운명을 본다.

“자기야 다왔어!”

게집애가 몸을 흔들어 댄다. 꽤 긴 잠을 잔 듯하다. 나의 정면에 앉아있는 노인이 아직도 나의 거울처럼 앉아있다. 깨어버리고 싶다. 박살을 내 버리고 싶다. 내 젊은 영혼이 머물러야 할 곳이 저 노인의 다 늙어빠진 주름투성이의 육신 같은 곳이라니. 나는 참을 수가 없다. 왜 나를 저 따위 주름투성이의 각질 속에 가두려고 하는가 말야! 자신의 분신처럼 나를 바라보는 저 노인은 미쳤음이 틀림없어! 슬픈 눈을 끔벅이고 있는 저 노인의 영혼은 썩어버린 것이 틀림없어! 저 주름투성이의 각질을 산산이 깨어버려야 해! 구속된 영혼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해! 젊음 육체와 쾌락을 마음껏 향유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도록 해야 해! 나는 거울을 박살내어야 해. 사방에서 비명이 들려온다. 계집애의 비명 소리도 들려온다. 작은 거울 조각이 내 얼굴에 박혀든다. 그리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

나를 미친 듯이 사랑한다고 했던 계집애가 내 곁을 떠났다. 나의 젊음에 눈부셔하던 계집이 나를 떠났다. 계집애들이 나로부터 떠난다는 건 흔한 일이다. 한 마리의 야수처럼 철창에  갇혀있는 나를 버리고 또 다른 젊음을 찾아 떠난 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고작 단 한 번의 면회도 참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그러나...... 정말이지,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내가 박살내었던 거울 속으로 그녀가 스스로 걸어들어 갔다는 사실이다. 박살났던 거울은 직소퍼즐처럼 한 조각, 한 조각씩 붙어져 다시 반짝이는 거울이 되었던 것이다. 계집애는 나를 대신해,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의 죄를 대신해 노인을 가끔 문병한다고 했다. 그녀가 노인의 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노인의 주름투성이의 각질화 된 육체에 그녀의 나신을 맡겼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도 노인은 거울이었다는 것이다. 계집애는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말했다.

“노인은 내게도 거울이었지. 소중한 거울말이야. 나의 모든 탐욕를 채워 줄 수 있는 재력이 그에겐 있었거든. 후후. 나는 그 거울을 통해 나의 호사스러운 미래의 행복을 보았거든. 너 처럼 젊음 하나로 날 뛰는 불쌍한 영혼이 이젠 싫거든. 잘 있어!”

(2008.1.24.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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