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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더불어 삶을 아름답게 살자

by 컴속의 나 2008. 10. 26.
서구인들은 40이 넘어면 유서를 많이 쓴다는 글을 읽었던 것 같다. 그 숫자나 정도는 알 수 없지만 유서를 쓰고 공증을 거친 뒤 은행의 금고 등에 보관한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나라고 재산 문제로 분쟁이 끊이지 않지만 우리나라처럼 칼부림이나 칼부림은 아니더라도 혈연관계를 끊거나 남보도 못한 가족들이 되는 경우를 많이 목격하게 되는 것을 보면 분명 유서를 쓰는 것에는 좀 인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러한 현실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왜 우리는 유서를 쓰는 것에 인색할까 하는 궁금증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생각하다가 혹 묘지 문화와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공동묘지와는 달리 서구의 공동묘지는 도시속에서 산자들과 함께 존재한다. 심지어 일본도 그렇다. 일본영화들 보면 간혹 마을이나 도시속의 공동묘지를 볼 수 있다. 그 공동묘지에 앉아 놀거나 데이트를 즐기는 것을 목격하게도 된다. 가까운 아시아의 일본이 그러하다는 것은 약간 예외가 아닐 수 없다. 유럽등 서구의 경우는 더해서 공동묘지가 문화의 공간, 예술의 공간 심지어 관광의 공간이 되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인구 87만의 프랑스의 마르세유에는 21개의 공동묘지가 있다고 한다. 그 위치가 어떠하던 이러한 사실만으로 사자들이 산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 파리에는 파리지엥의 영원의 안식처인 페르 라쉐즈 공동묘지가 있다. "이 묘지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같은 녹지 공간중에 하나 이기도 하다. 이묘지는 프랑스 건축가 부로냐르가 최초의 정원식 묘지로 설계해 유명해진 이후유럽 각국과 미국에 선보인 공원묘지의 효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묘석, 기념조형물 등이 지닌 역사적 예술로 등록되어 사실상 박물관 묘지로 대접받고 있다"(세계묘지 문화기행 p.33, 박태호, 서해문집)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파리지엥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공원임을 알 수 있으며 죽은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Cimetiere Saint Pierre

이미지 출처:http://www.flickr.com/photos/70463156@N00/50309065/


cimetière Saint Pierre à Marseille

이미지 출처: http://www.pakhomoff.net/eos/cimSP.html


Cimetière du Père-Lachaise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Cimetière du Père-Lachaise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Cimetière du Père-Lachaise 이미지 출처:위키피디아




이러한 사실을 다소 추상화 또는 일반화시켜보면 죽음이 삶과 함께 어우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공원을 거닐고,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고, 명상을 하고, 운동을 하면서 죽음이란 자연스럽게 삶의 일부로 깊숙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더불어 하는 사색이란 얼마나 깊이가 있을까?  죽음과 더불어 하는 박물관 산책은 얼마나 예술적인 묘미가 있을까? 유명한 파리지엥의 묘비 앞에서 그 글귀를 함께 읽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느 무엇을 연상할 수 있는가? 프랑스가 예술과 문화의 나라라는 것에는 바로 이런 사실들이 밑바탕이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 공동묘지는 월하의 공동묘지, 공포의 공동묘지이고 보면 이러한 살아있는 자들 속의 사자들을 상상하기는 약간은 힘이 든다. 우리들에게 사자란 함게 생활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식으로 제례로 불러 내어야만 하는 혼이고 귀신이고 유령같은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산자와 사자와 분리되어 있는 세계, 분리되어 있는 공간에서 싹틀 수 있는 문화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러한 사실은 일반화 하거나 어떤 근거로 내세울 수는 없지만 묘지를 공원처럼, 박물관처럼, 예술과 관광의 견학지처럼 드나드는 문화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명절에 제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사자들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나라들 보다도 사자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마음이 한의 문화를 응어리리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수 많은 외침과 죽음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

이미지 출처: http://www.flickr.com/photos/misteriddles/228049760/



그러나 다 함께 마음으로 일상적으로 죽음을 소통하는 그러한 공간이 없기에 죽음은 자꾸만 멀리에만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는 개인의 마음 속에 응어리로 남은 한이 남은 것은 아닐까? 이것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고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다 함께 공유하기에는 힘든 것이다. 젊은 자식이 비로소 어머니의 한을 이해하는 데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돌아 돌아 그렇게 또 아비와 어미가 되었을 때가 아닌가? 가슴에 묻어두는 것은 어찌 글로 표현할 수 이쓰을까만, 우리는 너무나도 소통부재 속에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로할진대, 심지어 사자들과의 소통은!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은 죽음과 친근할 것이다. 죽음을 많이도 생각할 것이다. 시간에 대해서도 각별할 것이다. 공원묘지의 벤치에 앉아 보는 하늘은 각별할 것이며, 흐르는 강은 더욱 의미있게 다가올 것이다.이것은 아무리 과장이라고 해도 약간은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사자들은 산으로 추방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서구인들이 유서를 일찍 쓴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유서는 꺼림칙한 무언가는 아닐까? 재수없는 짓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시간에 과외를 하고 경쟁의 늪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명상과 사색이 없는 삶, 우리가 다 거쳐야 하는 죽음 조차에도 눈을 감고 살아가야하는 건조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마지막 죽음에 이르러 유언을 남기고 떠나는 것은 아닐까?